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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최고 속도 기록의 역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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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04-07-19 13: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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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최고 속도 기록의 역사 1

처음에는 자전거와 속도를 비교했던 자동차는 어떻게 해서 최고속도를 추구해 왔던 것일까. 오늘날과 같은 내연기관 자동차가 발명되었던 1886년 경. 당시 지상을 달리는 속도의 왕자는 철도, 즉 증기기관차였는데 그 속도는 이미 140km/h를 약간 넘기고 있었다. 겨우 걸음마를 하던 시대의 자동차 속도는 대부분 자전거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끊임없이 속도기록의 갱신을 향해 자동차는 맹렬히 돌진한다. 100km/h. 160km/h, 그리고 90년 전 가을 200km/h의 벽이 깨졌다.


모터스포츠라고 한마디라고 말해도 거기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다. F1 GP레이스를 시작으로 하는 스피드 레이스, 랠리, 힐 클라임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데 또 하나 우리들에게는 약간 생소한 분야가 있다. 그것은 속도기록에의 도전이다.
여기에 크게 나누어 두 개의 분야가 있다. 절대속도기록과 국제 클래스 기록이 그것. 후자는 배기량별의 킬로 미터와 마일, 또 시간별 기록이 있고 절대기록으로 해도 1km부터 1000마일까지, 1시간부터 24시간까지의 구별이 있는데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1km의 플라잉 스타트의 그것이다. 그리고 이들 모든 것은 국제자동차 연맹(FIA)의 통괄하에 치러지는 것이다.
현재 차륜을 구동하는 차량에 의한 최고기록은 미국의 로버트 S 서머스가 골든 로드호를 조종해 수립한 659.341km/h이다.(65년 11월 12일 보네빌) 이 자동차는 크라이슬러 헤미 426 V8엔진 4기(합계 1608ps)를 탑재하고 있다.
이 외에 차륜을 구동하지 않는 클래스(제트 혹은 로케트 추진)로서는 영국의 리차드 노블이 조종한 스러스트 2의 1,020.408km/h(83년 10월 4일, 블랙 록 D/ 호주 )다. 이 자동차의 원동기는 롤스로이스 RG 146에이븐 MK302C형 제트 엔진으로 그 추력은 17,000파운드였다.
거기에 FIA의 산하에 들어가지 않는 속도의 도전도 있다. 스탠 버레트의 조종에 의한 버드와이저 로케트에 의한 1,190.377km/h(79년 12월 17일, 에드워드 항공기지)의 기록이 있고 이 속도는 마하 1.0106으로 사상 처음으로 지상에서 음속을 초월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로만택 V4 로케트(액체와 고형연료 사용, 추력 2만 4,000파운드)로 사이드 와인더 미사일 4기(추력 각 6,000파운드)가 장착되었었다.

전기자동차 자전거를 이기다

자동차에 의한 속도기록 도전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지금부터 107년 전인 1898년의 일이었다. 19세기 말의 프랑스에서 자동차는 상류 사회 인사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당시는 자전거도 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었다. 자전거 경주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인기 스포츠였던 것이다.
여기서 당연히 의문이 생긴다.-도대체 자동차는 자전거보다 빠른가? 하는 것이다. 자전거 속도의 당시 세계 기록은 프랑스인 알베르 샹피온이 갖고 있는 1km 구간(플라잉 스타트) 66초였다. 시속으로 환산하면 54.5km/h가 된다. 이것은 오늘날과도 큰 차이가 없다. 현재의 기록은 1km 정지 출발이 62.091초.
막 태어난 자동차가 자전거의 이 기록을 깨트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상술로 사용한 것이 프랑스의 자동차전문지 ‘프랑스 오토모빌’이었다. 이 두 탈것의 속도 경주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자전거에는 전용 트랙이 있고(앞서 이야기한 샹피온의 기록은 파리의 프랑스공원의 트랙에서 수립됐다) 자동차는 거기를 달릴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 오토모빌지는 파리의 수많은 공원 중에서 아셸 아그리코 공원을 선택했다. 그 중앙 대 통로에는 꾀 긴 직선로가 있었는데 주최자측은 그 가운데 2km를 코스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km 정지 출발과 그 앞의 플라잉 스타트의 2종류의 기록이 동시에 얻어지는 형태였다.
1898년 속도 경주에서 이름을 날렸던 것은 샤슬 로버 백작 한 사람. 자동차는 장토 전기자동차였다. 그것은 1km 구간을 57초로 주파한 자전거보다 9초 이상의 큰 차이를 보였다. 평균 시속은 63.16km.
프랑스 오토모빌지의 기획은 대 성공을 거두었는데 더욱 그들을 기쁘게했던 것은 이 기록에 대해 즉시 도전자가 나타났던 것이었다. 이 남자가 벨기에의 까뮈 제나티였다.
두 사람의 속도 전쟁은 1899년에 5회에 걸쳐 전개되어 마침내 제나티는 4월 29일 1km 구간을 34초에 주파해 사상 최초로 100km/h의 벽을 돌파해 105.882km/h의 대 기록을 수립했다.
샤슬 로버의 자동차는 통상적인 로드카를 약간 개량한 정도의 것이었기 때문에 제나티의 특별제 쟈메 콩땅뜨호에는 아무리해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깨끗이 손을 땠다.
제나티의 대기록은 한동안 깨지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의 도전의 대상이 되었다. 그 중 이색적인 인물로서 후에 롤스로이스사를 창립한 C.S.롤스가 있었다. 그는 1902년 프랑스의 모르스차(가솔린 엔진)으로 101.5km/h의 기록을 수립해 가솔린차로서는 처음으로 100km/h의 벽을 넘엇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미국의 석유왕의 아들 윌리엄 K. 반더빌트는 메르세데스 심플랙스에 타 플라잉 킬로미터를 달려 제나티와 같은 34초를 기록했다. 이것은 오히려 당시 유치한 수준의 기록방법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음으로 200km/h의 벽에의 도전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성공한 것은 고트리프 다이믈러와 함께 근대 자동차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칼 벤츠였다.
벤츠는 어느쪽이냐 하면 보수적인 사람으로 처음에는 자동차 레이스에는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는데 20세기에 들어서자 그 선전효과에 고무되어 본격적으로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다이믈러 팀으로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한스 니벨(후에 포르쉐 박사의 후임으로서 다이믈러 벤츠의 기사장으로 된다.)을 시작으로 하는 젊은 기술자의 손에 의해 그 레이싱카는 차제에 강력히 되어갔다. 거기서 벤츠사는 200km의 벽에 도전한다.
그 당시 가장 빠른 탈 것은 증기기관차에 대해 지멘스 운트 하르슈케사의 전기기관차였다. (210.15km/h, 1903년) 그리고 비행기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때였다.
1909년 가을 벤츠사의 배기량 2만 1,504cc의 직렬 4기통 엔진을 탑재한 블릿첸 벤츠는 프랑스인 빅토르 에메리의 조종으로 플라잉 스타트 1km 구간을 17.76초에 주파해 시속 202.691km로 공식적으로 200km/h의 벽을 넘었다. (영국의 브룩크랜즈 서키트) 그리고 미국의 데이토나 비치에서 그 개량형이 1910년 3월 23일 바니 올드필드의 조종으로 기록을 211.267km/h로 향상시켰고 이것은 이후 8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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