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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엔진 리어 드라이브차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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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05-02-19 16: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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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엔진 리어 드라이브차의 탄생

경량화와 구조의 단순화가 장점

FF차에 이어 이번에는 RR(Rear Engine Rear Drive)차의 뿌리를 찾아본다. 이제는 이미 과거의 방식이 되었지만 역사적으로는 실은 새롭다. 저 메르세데스 벤츠도 1930년대에 RR차를 만들었다. 그리고 폴크스바겐 비틀의 대성공에 의해 제2차 세계대전 후인 50년대부터 60년대에 걸쳐 구주, 일본의 소형 대중차는 거의가 RR방식을 채용하고 있었다.

인간의 도구의 형상은 일단 결정이 되면 점차 개선된다는 것은 생각처럼 그렇게 용이하지만은 않다. 자동차의 구동방식에 있어서도 프랑스의 파날 르왓슬차가 프론트 엔진, 알루미늄 커버 부착의 기어박스, 그리고 처음에는 체인, 나중에 프로펠러 샤프트로 뒷바퀴를 구동하는 소위 FR방식을 내 놓자(1897년)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존재는 제외하고 자동차만들기의 확고한 정석으로 되었다.

리어 엔진 리어 드라이브라고 하는 소위 RR방식은 그 의미로 보자면 완전한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구체화하기까지는 1930년대까지 기다려야만했다. 4WD와 FF방식이 이미 20세기 초두에 적어도 아이디어로서 제창되었던 것과는 달리 RR방식은 자동차의 컨셉트로서는 사실 새로운 것이다.

RR방식의 아이디어의 탄생에는 두 가지가 기초가 되었다. 그 하나는 선박 구동방식에서의 유추, 다른 하는 1920년대가 되어 부각된 공기역학이다.

선박에서는 원동기는 배의 중앙에서 뒤쪽에 걸쳐 배치되고 선비의 스크류를 돌려 전전한다. 끌고 가는 마차와는 반대로 선체를 ‘미는󰡑형태가 된다. 물론 FR에서도 미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RR방식에서는 프로펠러 샤프트가 없기 때문에 경량화와 구조의 단순화가 가능하다. 사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유럽에서는 보다 저렴하고 성능이 좋은 대중차의 개발을 위해 주목을 끌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중 항공기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새로운 학문분야가 생겨났다. 그것이 에어로다이나믹스(공기역학)이다. 그 새로운 사고방식이 자동차에 적용되기까지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보헤미아 태생의 에드몬드 룸플러가 공기역학에 타당한 트롭펜(물방울)바겐을 데뷔시킨 것은 1921년의 일이었다. 이것은 유선형 보디의 최초의 예임과 동시에 미드십 엔진 배치의 개척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작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차는 보디의 공기역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켜 역시 보헤미아 태생의 체펠린 비행선회사의 기사 파울 야라이는 연구 끝에 룸플러의 2차원적인 방법을 더욱 발전시켜 3차원적 유선형 보디를 제창했다.

야라이류의 방법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라디에이터와 엔진을 차체 전방에 놓는 데에 무리가 있었다. 대신에 엔진을 리어에 위치시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야라이의 유선형 이론은 구미의 자동차업계로부터 주목을 받아 미국에서도 크라이슬러 에어플로우(Airflow)가 탄생했다. (1934년) 이론은 엄격하게 적용하지는 않은 상식적인 FR차였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완성된 RR차

독일의 한 자동차전문잡지 편집장 요셉 간츠는 RR차의 이점을 역설해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30년대 초기에 독일의 아들러사 등에서 소형 리어 엔진차의 프로토타입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RR차의 기본적인 구조의 설정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모델이 등장했다.

그것이 체코슬로바키아의 한스 레드윙커가 설계한 소형 FR차 타트라11이다. 이 차는 1923년의 프라하 모터쇼에 데뷔했다. 공냉수평대향 2기통, 1056cc, 12ps 엔진을 탑재하고 있었는데 동관 백본 프레임을 사상 최초로 채용해 리어는 횡치 리프 스프링에 의한 스윙 액슬 독립현가로 되어 있었다.

1934년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물방울형(야라이)의 유선형 보디를 한 대형 세단 타트라77이 등장했다. 타트라11 이래의 백본(Back bone) 프레임의 뒤쪽 끝을 Y자형으로 해 거기에 3.4리터의 공냉 V8엔진을 탑재, 4륜 스윙 액슬 독립현가를 채용한 이 모델은 포르쉐에 강한 감명을 주었다.

간츠의 의견에 공감을 한 것은 레드윙커만이 아니었다. 다이믈러 벤츠사는 간츠를 초청, 사장 키셀과 기사 한스 니벨(뒤에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떠난 후 기사장이 되었다)이 그 의견을 경청했다. 이 즈음 포르쉐도 그것과 병행해 부하인 윌리 바르프와 로젠베르거와 함께 리어 엔진차의 설계를 개시했다. 포르쉐와 RR차의 관계는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니벨을 중심으로 한 다이믈러 벤츠사의 RR차의 연구는 1927년경부터 시작해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메르세데스 벤츠 130H다(1933년). 130H는 강관 백본 프레임과 전후 모두 횡치 리프 스프링에 의한 스윙 액슬 독립방식을 채용하고 있었다. 바로 한스 레드윙커의 타트라11 그대로의 레이아웃이었다.

그런데 130H는 실패작이었다. 오버 스티어 경향이 강하고 그 주행성, 로드홀딩의 열악함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것을 개량하기 위해 스포츠 타입 150H(1934년)에서는 미드십 엔진 배치로 되었다.

포르쉐가 다이믈러 벤츠사를 거쳐 슈타이어사로 이적해 머지않아 독립해 포르쉐 설계사무소를 설립한 것은 1930년이었는데 다음해인 1931년 오토바이 메이커 슌답사의 의뢰로 소형대중차를 설계했다(설계번호 12). 동사의 사주 노이마이어는 이전부터 소형 대중차의 구상을 되살리게 되고 거기에는 폴크스아웃의 이름이 붙여졌다.

31년 12월부터 32년 4월에 걸쳐 설계가 행해진 이 자동차에는 장래의 VW를 암시하는 몇 가지의 특징이 투여되었다. 중앙 백본 프레임, 리어 엔진, 유선형 보디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오토바이 시황의 호전과 함께 이 계획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같은 오토바이 메이커인 NSU사도 소형 대중차를 포르쉐설계사무소에 의뢰했다.(설계번호 32). 설계도는 33년 중에 완성되어 34년 봄에 제작이 진행되고 시작차는 34년 봄에 장거리 테스트를 실시했다.

리어에 탑재된 엔진은 공냉수평대향 4기통, 그리고 토션 바 독립현가는 바로 VW의 그것이었다. 이 계획도 중지되었는데 이와 병행해 1933년 봄에 히틀러의 요청을 받은 VW계획도 추진되었다. 그리고 VW은 35년에 시작차(VW3)가 완성되었고 본격적인 생산은 1939년에 시작되었다.

VW비틀의 탄생까지는 수많은 기술자들의 시행착오가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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