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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스포츠의 역사(1)-국가간의 대리전쟁으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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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desk(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05-06-17 05: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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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스포츠의 역사(1)-국가간의 대리전쟁으로 출발

속도를 겨룬다. 자동차가 생겨나자 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프랑스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세계 최초의 자동차 레이스가 치러진 이래 100여년. 벌써 1세기 이상 전의 일이 된다. 그 때의 평균 시속은 겨우 24km/h로 자전거와 비슷하 속도였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성능을 대폭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리고 자동차 레이스는 국위선양의 장으로 되었다. 이번에는 제 2차 세계 대전까지의 레이스의 역사를 살펴 본다.

오늘날의 자동차 레이스는 지극히 다양한 형태로 세계 여러나라의 엔터테인먼트의 하나가 되어 있다. 이 분야에서의 하나의 정점을 보이는 F1그랑프리 레이스, 르망 24시간 레이스로 대표되는 스포츠카 레이스 외에 각각의 나라에서 독자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예를 들면 미국의 드레그 레이스 등-것들이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레이스 그 자체의 성질은 20세기의 각 시대에 따라 달랐고 오늘날의 레이스는 말하자면 상업주의의 색채가 농후해져 버린 것이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의 스피드 레이스가 최초로 행해진 것은 1895년의 일이다. 그 전해인 1984년에는 파리-루앙간의 트라이얼이 행해졌지만 그 종료 직후 드 디옹 백작과 드 줄랑 남작 등 유지가 위원회를 결성해 보다 가혹한 조건에서의 본격적인 레이스의 개최를 기획했다. 이 위원회는 후에 프랑스자동차클럽(ACF)로 발전된다.

세계 최초의 파리-보르도간의 레이스는 전장 1,178km라는 장대한 것이었고 자동차 탄생 후 겨우 10년만에 프랑스에서의 자동차 개발을 어떻게 해서 급속도로 진척시켰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출발한 22대 중 15대가 가솔린차, 6대가 증기차, 1대가 전기차였다. 당시는 이 3종류가 병존하고 있었고 소위 주도권 쟁탈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세계 최초의 레이스에서 확실히 결론이 났다. 완주한 것은 9대 뿐이었는데 그 중 8대까지가 가솔린차였던 것이다. 선두는 에밀 르왓슬을 운전한 파나르(평균 속도 24.14km/h)였는데 2인승이었기 때문에 우승은 케클란이 운전한 푸조에게 돌아갔다.
그때부터 100년 후인 1995년 프랑스 푸조사의 주최에 의한 당시의 자동차에 의한 파리 보르도간의 기념 주행이 치러져 9대의 출전차는 어렵게 골인했다. 이에 대해서는 구미는 물론이고 이웃 일본조차 NHK를 통해 다큐멘터리로 상세하게 보도했었다.

파리를 기점으로 해 유럽의 주요 도시-빈, 베를린, 모스크바 등-를 잇는 소위 파리 레이스는 그 후 매년 계속되어 치열한 싸움을 했고 그를 통해 자동차의 성능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자동차는 레이스를 통해 약한 체질이 단련되었고 보다 실용성 높은 탈것으로 육성되었다.

그 속도도 파리-암스테르담-파리 레이스(1,485km 1898년)에서는 43.29km/h, 파리-톨-파리 레이스(1,347km 1900년)에서는 64.70km/h로 1회의 세배가 넘게 향상되었다.
그리고 꾀 많은 사상자를(드라이버와 공도의 주민) 낸 1903년의 파리-마드리드 레이스에서는 보르도(파리에서 550.4km)에서 선두로 나선 가브리엘이 조종한 모르즈(프랑스)의 평균 시속은 105.90km로 가볍게 100km/h의 벽을 넘었다.

국제 레이스, 대리 전쟁의 시작

사상 최초의 국제 레이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1900년부터 시작된 ‘고든 베네트배 레이스’였는데 이것은 미국 뉴욕 헤럴드지의 경영자 제임스 고든 베네트의 제안에 의해 발족해 프랑스자동차클럽(ACF)가 운영을 담당했다. 이것은 나라를 대표하는 팀(1국 3팀) 사이에서 치러지는 것이 큰 특징이었다. 오늘날의 레이스에서는 채용되지 않게 된 국가별 보디 도색도 제 1회 레이스부터 실시되었다.

자동차 레이스는 가혹한 실험대의 의미와 함께 출장하는 나라의 기술력의 경연의 장으로서 중요성이 부여되었다. 애국심과 그것을 토대로 한 국위선양을 고려한 것은 20세기 중반까지의 이어졌었다.
자동차는 독일에서 발명되어 프랑스에서 급속하게 발전했는데 고든 베네트 레이스의 1국 3팀의 규정에 발이 묶여 프랑스는 독자적인 그랑프리 레이스를 계획했다. 주최는 ACF로 제 1회 프랑스 그랑프리는 1906년 6월 26일 르망에서 개최되었다.

코스는 1주 103.18km로 이것을 이틀간으로 나누어 6바퀴를 달렸다. 우승은 12.8리터라고 하는 맘모스 엔진을 탑재한 르노를 운전한 페렌츠 시즈였다.

처음에는 그랑프리카는 맘모스 엔진이 주류였다. 1907년 피아트(15리터), 1908년 메르세데스(13리터)등이 활약했다. 하지만 1912년에 푸조는 사상 최초로 DOHC레이싱 엔진을 탑재(7.6리터), 조르쥬 보아로의 조종으로 우승했고 이후 열효율이 높은 보다 소형 엔진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제 1차 대전 후 그때까지 프랑스 뿐이었던 GP레이스가 각 나라에서 개최되게 되었다. 이탈리아(21년), 스페인(23년), 벨기에(25년), 영국, 독일(26년), 모나코(29년) 등이 그것이다. GP레이스는 각 나라의 대중의 큰 오락으로 인기가 높아져갔는데 그에 따라 국민의 인기를 얻으려고 했던 두 명의 독재자가 있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그들이다.

엔초 페라리가 이끄는 알파로메오 레이싱 팀은 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초에 걸쳐 유럽에서 무적의 활약을 이어갔다. 무솔리니는 중요한 레이스에 앞서 페라리의 앞에 서서 ‘이탈리아를 위해 레이스에서 승리를!’이라고 격려의 전보를 칠 정도였는데 히틀러도 두 손가락을 펴 보이며 지나치지 않았다.

1934년부터 시행된 소위 750kg 포뮬러에 목표를 정하고 독일의 다이믈러 벤츠와 아우토우니온 양사는 획기적인 레이싱 머신의 개발을 진행시켰다. 히틀러도 양사에 자금을 제공했는데 그 액수는 일부에서 말하는 정도의 거액은 아니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다임러벤츠는 수퍼차저 장착의 직렬 8기통 DOHC, 기통당 4밸브의 3.9리터 엔진(398ps)을 탑재한 W25(4륜 코일 독립현가)을 완성시켰다. 전설적인 실버 애로우가 그것이다.
한편 아우토우니온은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설계의 P 바겐을 내 보냈다. 그 엔진은 45도 V16 SOHC 수퍼차저 장착의 4.4리터 출력은 295ps였다.

이 엔진은 미드십으로 배치되었다. 앞은 트레일링 링크/토션 바, 뒤는 횡치 스윙 액슬/리프 스프링에 의한 4륜 독립현가.
독일의 양사 머신은 압도적인 파워를 발휘했다. 드라이버도 다임러 벤츠에는 루디, 카라치올라, 폰 브라우히치, 아우토우니온의 한스 스튜크, 베른트 로제마이어 등의 얼굴이 자주 나타났고 알파 로메오는 무엇보다 다른 출전차를 크게 의식하지 않아 독일세가 세계를 재패한 것을 증명하게 되었다.
34년부터 39년까지의 시기는 GP레이스의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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