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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스포츠의 역사(2)- 사망 80명, 부상 200명의 대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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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05-07-01 05: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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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스포츠의 역사(2)- 사망 80명, 부상 200명의 대 참사

영광의 르망 24시간은 1923년에 시작됐다. 레이스가 태동하던 시절에는 프랑스 육군이 서치라이트로 코너를 비추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오늘날은 F1그랑프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끄는 르망 24시간이지만 그룹C의 대표적인 경기로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스위스에서 발행되는 자동차 연감인 ‘Auto mobile Year’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이 분야의 출판물이다.
거기에는 매년 모터스포츠의 성적이 분야별로 싣고 있다.
그것은 정말로 여러 가지 분야에 이르고 있고 현재의 모터스포츠가 얼마나 구미의 사회생활에 침투되어 있는지를 입증하고 있다.

F1 그랑프리 챔피언십을 필두로 각국에서 열리는 포뮬러 3000, 카트 챔피언십, 그리고 미국의 대표적인 레이스인 인디아나폴리스500마일 레이스가 이어진다. 그리고 스포츠 레이싱 타입의 머신에 의한 GT챔피언십, 거기에 포함된 르망 24시간 레이스가 있다.

게다가 세계 랠리 챔피언십, 투어링카 챔피언십도 이어지고 유럽의 독자적인 랠리 크로스와 힐 클라임에 이르기까지 결과가 실려있다.
스피드 레이스의 최고봉은 뭐라해도 전회에 서술한 F1그랑프리 레이스인데 제 1차 세계대전(1914∼18년) 후 급속히 발달한 항공기술이 자동차에 환원되어 그 성능은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유럽에서도 자동차는 일상의 교통수단으로 되고 프랑스의 시트로엥은 유럽 최초로 양산 방식을 채용하고(시트로엥 5CV 22년), 영국에서도 오스틴 세븐(22년)이 등장하는 등 소위 중산계급에서도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되었다.

GP머신에는 어느 시대에도 최첨단의 기술이 빠짐없이 채용되어 왔으나 20년대 중반이 가까워지면서 그들은 일상의 자동차와의 성능의 차이는 커지게 되었다. 그래서 보통 거리에서 볼 수 있는 통상적인 자동차만으로 하는 레이스를 기획한 것이 프랑스 자동차 저널리스트, 샤를르 펄 외의 몇사람들이었다.
장소는 자동차, 그리고 비행기와 인연이 깊은 르망이 선정되었다. 여기에서는 전회에 서술했던것처럼 제 1회 프랑스 그랑프리가 개최되기도 하고(1906년), 1908년에는 라이트 형제가 유럽에서의 첫 비행을 한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레이스의 성격은 단순히 스피드만이 아니고 내구력을 테스트하는 것에 주안점이 주어졌다. 24시간이라고 하는 장시간 레이스로 된 것은 당시 아직 불완전했던 조명장치를 테스트한다고 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레이스를 개시하려하게 되자 역시 위험을 고려해 코너 등에는 프랑스 육군의 탐조등(야간에 적기를 발견하기 위한 강력한 조명)부대를 배치해 드라이버의 안전을 도모한 조치를 취했다.

출주차는 투어링용의 보디를 가장한 모델만으로 셀프 스타터를 갖추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또 드라이버는 24년부터 5랩 주행 후에 스스로 덮개를 올려(당시 클로즈드 보디는 귀했다) 사이드 커튼을 걸도록 정해져 있었고 그대로 일정 거리(2랩)를 주행해야만했다.
카테고리는 4개로 나뉘었고 거기에 성능지수상(인덱스 오브 퍼포먼스)이라고 불린 배기량과는 무관하게 각 차의 상대적인 성능을 비교해 주어지는 상도 있었다. 이에 따라 소배기량차도 균등하게 명예를 가리는 것도 가능하고 이 점도 르망 24시간 레이스의 큰 특징 중 하나였다.

르망에서 이기면 차가 팔린다!

제 1회 레이스는 1923년 5월 26일∼27일에 치러졌다.(후에 개최일은 낮이 긴 6월 하지에 가까운 날로 바뀌었다.)
출전차는 35대로 완주는 30대. 우승은 3리터 셰나르 볼케일(프랑스), 드라이버는 라가슈/레오날 조로 주행거리는 2,209.536km, 평균 시속은 92.06km/h였다.

이 레이스에서 우승한 메이커의 판매는 급증했고 메이커 자신도 이 레이스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했다. 그 때문에 출전차는 해마다 증가해 24년은 41대, 25년에는 미국, 영국, 이탈리아에서도 속속 참가해 49대에까지 이르렀다.
또 이해부터 그때까지 두 대씩 나란히 서는 그리드식이 개정되어 소위 르망식 스타트로 되었다. 머신과 드라이버가 커스 양쪽에 나누어 정렬하고 신호기가 펄럭임과 동시에 드라이버가 머신에 올라 타는 방식이다.

이렇게 해서 르망 24시간 레이스는 어디까지나 오너 드라이버에 의한 일반차 레이스라고 하는 성격을 강하게 내 세워왔었는데 이 레이스는 소위 빈티지 스포츠카의 대결장으로서도 큰 의미를 갖게 되었고 제 1차 세계대전 전에는 없었던 ‘스포츠카’가 일반 승용차, 그리고 GP머신과 별도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시초가 되게 되었다.
르망 레이스의 초기는 현지 프랑스세가 당연히 우세했다. 그런데 1924년은 개인 엔트리인 벤틀리가 행운의 1승을 올려 그것을 시작으로 1927년부터 30년까지 4연승해 벤틀리의 전설을 만들었다.
1931년부터 34년까지는 엔초 페라리가 이끄는 알파 로메오가 4연승하고 이후는 난전 양상을 보였다.

제 2차 세계 대전(1939∼45년)초 첫 르망 레이스는 1949년에 치러졌는데 이때 막 탄생한 페라리 2리터(기네티/셀즈돈 조)가 우승해 주목을 끌었다. 평균 시속은 132.420km/h였다.
전후의 르망 레이스의 인기가 높은 만큼 메이커간의 경쟁은 해마다 격렬해지게 되었다. 50년대에 들어서자 메르세데스 벤츠 300SL과 재규어 C/D타입의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었는데 이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것은 1955년의 소위 ‘르망의 비극’이다.
이것은 재규어와 메르세데스 벤츠의 싸움이 원인이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55년 6월 11일, 오전 4시, 60대의 머신이 일제히 발진했다. 그리고 그 2시간 20분 후, 피트측으로 4∼5대의 머신이 접근했다. 선두는 한바퀴 늦은 오스틴 히레이(마클린 조종), 그리고 마이크 호손이 탄 브리티시 그린의 재규어 D 타입, 이어서 3대의 메르세데스 벤츠 300SLR이었다.
호손은 마클린을 제치고 어찌된 일인지 오른쪽에서 옆으로 꺾어 피트로 들어왔다. 마클린은 당연히 급 브레이크를 밟으며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이 때문에 히레이는 슬라이드해 왼쪽의 메르세데스 벤츠를 밀어내게 되었다.

220km/h의 속도로 접촉한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에밀 르와슬이 탄 메르세데스는 공중으로 높이 솟아 올라가 만원인 관중석으로 처박히며 폭발했다. 사망 80명, 부상 200명이라고 하는 대 참사가 일순간에 일어났다. 이것은 자동차 레이스 역사상 최악의 사태였다.
현대를 상징하는 스피드의 제전, 자동차 레이스는 언제나 죽음과 떨어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것이 어쩌면 사람들의 마음에 강한 인상을 심어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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