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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뮬러 원(F1) 히스토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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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05-10-31 14: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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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뮬러 원(F1) 히스토리(1)

포뮬러 원(Formula 1)이란 무엇인가. 아주 간단히 말하면 자동차 레이스의 정점에 위치하는 것이다. F3000, F3, 스포츠 프로토타입, 투어링카, 힐 클라임....., 이것들은 모두 자동차 레이스에 있어 불가결한 요소이지만 진한 흥분과 스펙터클을 맛볼 수 있게해준다고 하는 의미에서는 빅 파워의 F1머신의 굉음에 필적하는 것은 아직 없다. 오늘부터 주기적으로 포뮬러 원이 걸어 온 발자취에 대해 더듬어 본다.(편집자 주)

엄밀하게 말해 포뮬러 원의 역사는 제2차 대전이 끝난 뒤 F1/F2라고 하는 구분이 설정된 때부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원은 19세기 말에 자동차레이스가 막 탄생한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은 최초로 자동차를 만들어 냈을 때부터 보다 빨리 달리고 그때까지의 기록을 깨고 다른 사람과 경쟁한다고 했던 것과는 함께 많은 희망을 내포해왔다. 제 1호의 자동차가 태어난 순간부터 자동차 레이스가 급속도로 발전해 온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알랭 프로스트와 아이르톤 세나, 넬슨 피케라는 드라이버들이 전용으로 설정된 코스를 때로는 300km/h가 넘는 맹렬한 속도로 주회한다고 하는 상황을 빅토리아조 시대의 인간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속도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기도 해 당시의 레이스도 현재의 맥라렌이나 페라리를 보는 것과 똑 같은 스팩터클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내연기관 엔진을 탑재한 자동차 제 1호는 1862년 5월, 파리에 등장한 에띠엔느 르느와르의 차다. 라 로케트 공장에서 최초로 자동차를 제작했을 때 르느와르는 자신이 세계의 이동수단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 엔진은 액화석탄가스를 사용한 것으로 출력은 1.5bhp였다. 그로부터 약 1년 반 후 그는 용감하게 그 제 1호차로 공도를 달렸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러시아 황제 알랙산더 2세로부터 주문이 들어와 일반들도 비로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한 자동차가 등장해 그 기술은 세계적으로 급속도로 진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가솔린 엔진이 등장하고 현재는 1890년대 중반 경에는 독일의 칼 벤츠의 공장은 자동차 메이커로서 세계 최대의 것이 되어 있다. 20세기로 세기가 바뀌자 프랑스가 자동차 생산대국이 되고 이어서 미국, 영국, 독일의 순이었다.

각국 모두 자국의 차를 한껏 과시했다. 결과적으로 라이벌 메이커와의 사이에서 행해진 레이스는 그 차의 실력을 증명하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나라의 위신을 세우는 역할까지 하게되었다.

세계 최초의 레이스는 1878년 미국 위스콘신주의 그린베이에서 매디슨까지 323km에서 치러진 것으로 우승은 오스코쉬라고하는 증기엔진을 탑재한 차였다. 하지만 이것이 세계 최초의 자동차 레이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은 아직 확실한 결론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서 1887년에 파리에서 치러진 거리 31km의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우승은 알베르 드 디옹 백작이 탄 4륜 증기자동차 드 디옹으로 그 평균속도는 59km/h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1895년 6월에 파리 - 보르도 간의 왕복으로 열린 레이스로 에밀 르왓슬이 최초로 골인한 것이었다. 그가 타고 있었던 것은 다이믈러 1.2리터 엔진(3.5bhp)을 탑재한 파날 르왓슬이라고하는 진정한 의미의 자동차였기 때문에 아마 이 레이스가 세계 최초의 자동차 레이스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파리는 그 주변에서 레이스가 행해지기도 하고 파리 보르도간 레이스처럼 출발점이 되기도 하는 등 많은 공도 레이스의 중심이었다. 레이스가 증가함에 따라서 자동차를 제작하는 사람도 그만큼 증가해 그들은 앞다투어 자신들이 만든 차가 라이벌차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기회로 삼았다.

이렇게해서 레이스의 수가 많아진 결과 레이스의 룰을 정립할 필요가 생겨났다. 그래서 불완전하지만 최초의 룰이 1898년 파리-암스테르담간의 왕복 레이스에 적용되었다. 다양한 종류의 차를 클래스별로 나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룰은 400kg를 기준으로 출장차를 라이트 웨이트와 헤비 웨이트의 두 개의 클래스로 나누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자동차의 제조는 국가의 위신에 관계되는 문제이고 어느나라도 세계 최고의 자동차를 만들어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1900년부터 시작된 저 유명한 고든 베네트 레이스는 자동차 제조에 있어서 어느 국가가 최고인가를 획실히 해주었기 때문에 그 기반을 튼튼히 했다. 이 레이스의 룰에서는 1개국에서 출장 가능한 것은 1팀 3대로 하고 출장하는 차의 부품은 모두 그 나라에서 만들 것이어야만했다.

이 레이스의 제안자는 미국의 신문 ‘뉴욕 헤랄드’의 사주 제임스 고든 베네트였다. 일 때문에 파리를 방문했을 때 자동차 레이스의 인기가 높은데 흥미를 느낀 베네트는 자동차산업의 진흥을 기도하는 호화로운 트로피를 기증했다. 그 제 1회는 1900년에 파리- 리옹간에서 치러져 프랑스의 파날이 1,2,3위를 독점했다.

승패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안전면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게 되었다. 차체도 엔진도 점점 커져갔고 필연적으로 사고가 다발했다. 1903년에 파리 마드리드 간에서 행해진 레이스는 상당히 사고가 많아졌기 때문에 도중에 중단될 정도였다. 그 후 공도를 이용한 레이스는 금지되고 이해 고든 베네트 레이스는 북 아일랜드 주변의 폐쇄된 코스에서 치러졌다.

결국 베네트는 레이스에 수반되는 정치적인 구속에 환멸을 느껴 프랑스, 오베르뉴에서 개최된 1905년 레이스 후 트로피를 거두어 비행기 레이스 후원쪽으로 관심을 돌려 버렸다.

고든 베네트의 레이스는 없어졌지만 자동차 레이스는 그후로도 발전을 거듭해 1906년에는 르망에서 세계 최초의 그랑프리 레이스가 개최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자동차 클럽의 주최에 의한 것으로 드라이버는 90초 간격으로 스타트해 1주 103.18km의 코스를 2일간에 모두 12주를 해야만했다. 또 출장차에는 최대 1000kg이라고 하는 중량제한도 있었다. 결국 1,200km 이상의 긴 레이스에서 우승한 것은 빨간 르노를 탄 헝가리인 페렝크 스미즈였다.

최초의 그랑프리 레이스가 프랑스에서 개최되고 그것도 프랑스제 머신이 우승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나라는 자동차 레이스 발상지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타당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스미즈와 그의 르노는 자동차 제조에 있어 프랑스의 지위를 점점 확고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출장차의 리스트를 훑어보면 프랑스의 승리는 당연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는 10개 메이커가 모두 23대를 엔트리했던데 비해 이탈리아와 독일은 3개 메이커가 3대씩 출장시켰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에서는 한대도 출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랑프리 레이스는 고든 베네트 레이스와는 달리 나라를 대표하는 차의 팀이 아닌 개개인의 차에 의한 레이스라고 하는 형태로 치러졌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포뮬러 1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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