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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뮬러 원(F1) 히스토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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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05-11-09 14:4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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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뮬러 원(F1) 히스토리(2)

다음해인 1907년 제 2회 프랑스GP가 개최되었는데 이때에는 연료의 제한이 도입되어 그 사용량은 최대 231리터로 결정되었다. 이것은 100km당 30리터 이하의 연료로 주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기였다. 또 1908년에는 제한이 더욱 엄해져 피스톤의 면적은 755cm2이하, 또 차량중량은 1,150kg이상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08년 프랑스GP에서는 메르세데스에 탄 크리스티앙 라우틴 슈레거가 우승했다. 하지만 3년간 이어온 이 레이스도 그해를 끝으로 일단 중지되었다. 그래도 독일차가 프랑스차를 그들의 안마당에서 타도했다고 하는 것이 중지의 이유라고는 할 수 없었다(조금은 있었지만). 그리고 자동차 레이스에 대한 관심은 전반적으로 하강곡선을 타기 시작하고 또 레이스용차의 제작비가 급등한 것은 많은 메이커들에게 레이스에서 철퇴를 강요한 결과가 되었다.

1908년부터 11년에 걸쳐 유럽에서는 그랑프리 레이스는 전혀 개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쇠퇴기 중에도 1906년부터 시작된 공도 레이스 타르가 플로리오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미국 인디아나 폴리스 스피드웨이에서 500마일 레이스가 시작된 다음해인 1912년 그랑프리 레이스는 다시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랑프리 레이스를 만들어낸 것은 유럽사람으로 그들은 미국이 레이스의 명예를 독점하는 것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래서 1912년에는 프랑스GP가 부활해 디에프에서 행해진 레이스에서는 푸조가 우승을 차지해 프랑스인을 크게 기쁘게 해주었다.

그랑프리 레이스의 룰은 한층 강화되어 섀시 혹은 보디 폭은 최대 175cm까지로 되었다. 또 이듬해에는 연료소비가 100km당 20리터 이하로 억제되고 연료탱크 뒤에 유선형 테일 피스를 장착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최저중량은 800kg까지 끌어내렸다.

초기 그랑프리 머신은 고든 베네트 레이스에 사용되고 있었던 것처럼 도시 사이를 달리는 타입의 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스타일의 레이스의 출현에 반해 기술면에서도 진보가 요구되고 스위스인의 설계자 에르네스트 앙리는 이 점에서 큰 공헌을 했다. 1912년의 푸조를 위해 그가 설계한 실린더 헤드의 레이아웃은 그 후의 모든 고성능 머신의 기본이 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전 자동차 메이커는 레이스를 일종의 선전도구로 이용했다. 예를 들면 영국의 선빔의 경우 레이스에 관련한 1910년부터 13년까지의 4년간에 그 이익을 5배로 증가했다.

1913년에는 스페인GP가 시작되고 자동차 레이스의 인기는 점차 높아져갔는데 그에 반해 종래 시행되어왔던 것보다 아주 단순한 룰로 레이스를 규격화할 필요가 생겨났다. 그리고 1914년에는 그 후의 레이스에도 영향을 미쳐 큰 룰의 주축으로서 실린더의 용적, 즉 엔진의 배기량에 의한 제한이 등장했다.

엔진의 배기량에 대한 제한으로서 처음 채용된 것은 4.5리터 이하라고 하는 것으로 이 새로운 포뮬러는 리옹에서 개최된 1914년의 프랑스GP에 처음 적용되었다.
이 레이스는 제 1차 대전 전의 최후의 빅 레이스로 되었는데 프랑스 이외의 나라 팬에 있어서는 유쾌한 결과로 끝났다. 프랑스는 레이스의 주최와 실현에 정력을 쏟아 이번에는 메르세데스를 탄 크리스티앙 라우텐 슈레거, 루이 와그너, 오토 살사의 3인이 상위를 독점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메르세데스 엔진은 프랑스의 것보다 기술적으로 우수해 수개월 후에는 그 강력한 엔진이 독일읠 전투기에 탑재되어 비행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자 중단되었던 레이스가 재개되고 메이커는 이것을 자사차의 선전과 이익을 올리는 수단으로서 또 이용했다.

1921년 그랑프리 레이스의 룰은 또다시 변경되었다. 엔진 배기량은 3리터 이하로 되고 1914년의 프랑스GP때 1100kg까지 증량되었던 차량 최저중량도 다시 800kg으로 낮춰졌다.
1922년에는 자동차클럽의 국제기구, 국제자동차공인클럽협회(Alliance Internationale des Automobile Clubs Reconnus=AIACR) 이 소위원회를 발족했다. 이것은 그랑프리 레이스를 감독하에 두고 권위있는 규정에 의해 확실하게 운영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 위원회는 뒤에 국제스포츠위원회(CSI)라고 불리게 된다.

프랑스와 스페인에 이어 다른 다라도 그랑프리 레이스의 개최에 열의를 보여 자동차경기에 대한 인기를 점차 높아져갔다. 1925년에는 제 1회 벨기에 GP가 스파에서 개최되어 알파로메오에 탄 안토니오 아스카리가 평균속도 119.98km로 우승했다. 또 다음해인 1923년에는 독일과 영국에서도 그랑프리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이들 빅 레이스는 ‘그랑 에프루브’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시대의 F1레이스였던 것이다.

1926년에는 제 1회 독일GP가 아부스에서 행해져 메르세데스에 탄 루돌프 카라치올라가 승리했다. 한편 영국GP(당시 명칭은 RAC GP였다.)에서는 로벨 세네칼과 루이 와그너 두사람이 탄 드라쥬가 평균속도 115.24km/h로 우승했다.

그 제 1회의 영국 GP는 레이스사에 빛나는 유명한 서키트 블룩크랜즈에서 치러졌다. 서레이주 위이브릿지 근교에 있었던 이 서키트는 처음으로 레이스 전용으로 만들어진 크로스드 코스로 제 2차대전 발발까지 영국에 있어 자동차 레이스의 발상지였던 것이다.
이 당시의 기술면의 진보로서는 1923년에 피아트가 805라고 하는 머신의 8기통 엔진에 채용한 수퍼차저가 있다. 50년 이후의 터보차저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초기에는 여러 가지 트러블 때문에 골치거리였지만 그것이 해결되자 레이스에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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