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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동차기술 첫걸음에서 비상까지-6. 한국 최초고유모델 포니 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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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0-02-12 13: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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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동차기술 첫 걸음에서 비상까지-6. 한국 최초 고유모델 포니 양산

‘포니가 남산을 오르지 못하면 망한다’한국 최초의 국산 고유모델 포니는 1976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생산이 시작되었다. 소비자의 손에 넘어가기 시작한 것은 그 해 2월 29일. 한국 자동차산업의 태동이 되던 이 때의 기록은 내 머리 속에 혼돈 상태로만 남아 있다. 모든 것을 꼼꼼히 기록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1975년과 1976년 두 해의 기록은 찾을 수가 없어, 대부분은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이 기억나는 것은 결코 할 수 없다는 주변의 시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과물을 하나씩 만들어 갔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이탈디자인으로부터 받아 온 설계 도면이 개발 및 생산을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결국엔 우리 손으로 만들었다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글/이충구(전 현대자동차 시장)
출처/한국자동차공학회간 오토저널 2010년 1월호


이탈디자인의 쥬지아로가 우리에게 건네 준 도면은 토리노 모터쇼에 출품했던 완성된 차를 기준으로 만든것이었다. 토리노 모터쇼에 출품했던 모델은 그들이 당시 시중에서 구입 가능한 다른 자동차에 쓰이고 있는 부품들을 구입해서, 모터쇼에 출품할 포니의 외형에 맞도록 제작한 것이었다. 헤드램프를 포함한 램프류, 에어컨 및 히터 시스템, 와이퍼 시스템 등을 포함한 대다수의 부품들이 이렇게 현장 맞춤식으로 제작되었다. 따라서, 부품에 대해서는 외형의 형상 도면만 있었고, 구체적인 실제 제작용 도면은 전혀 없었다.

경영진은 이런 사정을 알지 못했고, 우리는 귀국 후 다시 도면을 그려야만 했다. 헤드램프를 포함한 램프류는 일본의 S사와 여러 차례의 논의 끝에 도면이 완성되었다. 에어컨 시스템은 일본 업체인 C사에 개발 의뢰했고, 와이퍼는 K사라고 하는 한국 업체를 선정해 우리가 그린 외형 도면을 주고 제작했다. 그러다 보니 와이퍼에 사용되는 고무 재질에 대한 경험이나 노하우가 없어 실제로 만들어져 나온 제품은 조악하기 그지 없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개선 노력을 했지만 와이퍼는 그로부터 10년쯤 후에야 일본 업체와 경쟁력 있게 개발 된것 같다.
어쨌든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택도 없는 일정’을 맞춰야 했다. 정세영 회장은 1975년 6월까지 연간 5만 6,000기 규모의 엔진공장을 완공하고, 그 해 11월까지 주조 및 단조 공장을 완성해서, 1976년 1월에는 반드시 고유모델 포니를 탄생시킨다는 시간표를 갖고 있었다.
이 일정 준수를 위해 우리는 1974년 2월 이탈리아로 가 12월까지 10개월 동안 설계를 배워왔고, 1년 안에 조립라인을 완성해야 했다.

아이디어 스케치부터 생산을 개시하기까지 주어진 시간은 27개월. 쟁쟁한 부품업체들이 즐비하게 준비된 오늘날에도 신차를 개발하기엔 무리한 일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유 모델을 그 기간내에 해내지 못하면 회사의 존립이 불가능 할 것이라는 명분 아래 그 일을 해낸 것이다. 그뿐인가? 막 생산이 시작되는가 했더니 숨 돌릴 틈도 없이 정세영 회장은 수출을 추진했다. 당시에 수출은 지상과제이었고, 우리는 그런 의지를 뒷받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영진들 사이의 논란과는 상관 없이 우리는 제대로 된 차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울산 공장을 총괄했던 것은 이양섭 공장장이었다. 이양섭 공장장은 건설 출신으로 정주영 회장이 이명박 사장등과 함께 태국의 건설 현장으로 보냈다가 자동차 생산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생각하여 1969년 자동차로 불러 들였다. 1970년 7월 1일 이사로 승진하여 부공장장으로 임명되었다. 기술정비부를 총괄했던 장낙용 부장은 생산 담당 책임자로 임명됐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 가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현장의 생산 책임자로서는 최적의 인물이었던 것으로 평가되었다.

기술담당에는 신현동 이사, 품질담당 김영목 부장, 자재담당 이철근 부장, 프레스 송준국 차장, 생산 기술은 이승복 차장이 담당하여 포니 양산 준비를 진행하였다. 한편 엔진과 트랜스미션 생산 및 기술에는 강명한 부장, 단조에는 조용이 부장, 주조에는 박성하 차장이 담당하고 있었다.

나는 생산을 총괄하는 장낙용 부장과 가장 접촉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생산 라인에서는 갖가지 문제가 다양하게 발생했고, 장낙용 부장은 그 때마다 설계 팀을 불렀다. 문제에 대한 현상파악과 함께 원인 분석에 따른 해결책을 내놓아야 했다. 문제가 발생하면 재설계를 하기도 하고, 부품업체들과의 조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면서 하나씩 프로세스를 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에도 부문별 전문가들은 있었지만 전체를 조망하고 총괄해서 프로젝트를 지휘해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각 분야 별로 직접 부딪히며 경험을 쌓아가면서 배워야 했다. 선진 메이커와 기술제휴를 했다고해도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또 모든 차가 같은 부분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 그때마다 문제의 양상이 다르고, 원인이 달랐다. 시스템이 잘못 구성되어 오작동될 수도 있고 부품 조립과정에 결함이 있을 수도 있었다. 이런 모든 경험들이 쌓이고 모여, 노하우가 되고, 설계도면에 반영되면서 부품제작자와 설계자 사이에 확실하게 이해되어야만 비로서 진정한 설계가 되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포니 프로젝트는 생산라인이 흘러 가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당시에는 파일럿 모델생산과 양산 모델의 구분이 없었다. 조립 도중에 문제가 발생하면 다시 시도 해보는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도장라인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도장 공정은 하도, 중도, 상도 등 단계적인 과정을 통해 페인트를 차체에 입혀야 하는데 디핑 과정에 차체 속으로 흘러 들어간 페인트가 빠져 나갈 홀이 없어 그대로 페인트가 차체 안에 남아 있기도 했다. 반대로 아예 페인트가 들어가지 않는 구석도 발생해 문제가 된 경우도 있었다.

출고 된 차의 문제점들은 더욱더 다양했다. 비포장도로를 불철주야로 가혹하게 달리는 포니 택시들 중에는 차체가 금이 가거나 내구력이 약한 부품이 손상되는 것은 그래도 쉬운 문제였다. 비가 오면 여기저기서 물이 새는 차들도 많았다. 당시 대부분의 도로가 비포장이었는데 차체의 틈새를 통해 먼지가 들어 오는 차량도 많았다. 먼지 유입을 시험하는 더스트 터널 설비도 그 이후 도입해서 설치 하였다. 초기에는 그 시험장비에 사용하는 모래 먼지까지도 수입해서 사용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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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펜션 시스템의 고무가 갈라지거나 볼트나 너트가 풀려 버리는 것 들도 있었다. 어떤 차들은 여기저기 차 안에서 잡소리가 나기도 했다. 엔진과 트랜스미션이 제대로 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모든 엔진이 같은 결함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었다. 실린더에서 오일이 새거나 냉각수가 새는 등 문제 차량 마다 차별화되어 있어 들쭉날쭉했다.

그렇게 완성된 첫 번째 모델을 정세영 회장이 서울남산 주변을 돌며 시험(?)주행을 하다가 비 오는 날 하루 밤 세워두면 물이 새어 들어 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정세영 사장은‘포니가 남산을 오르지 못하면 우리는 망한다.’는 신념으로 성능에 대해 강한 집념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모터쇼에 출품한 차와 실제로 생산해 판매하는 차는 분명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프로토타입 차 외에 우리 기술진들이 5대를 만들어 1년 동안 주행과 내구 테스트를 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 1호 차가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내게는 이렇게 고생해서 완성된 1호 차와 함께 찍은 사진이 없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1호차 출고 기념식을 했는지에 대한 기억조차 없다. 포니와 찍은 사진이 나도 모르게 찍힌 사진 말고는 전혀 없다. 찍을 생각도 못 했고, 찍을 여유나 시간이 없었다. 당시 산적한 문제를 해결해야 생산 라인이 흐를 수 있었고, 문제 해결에만 몰두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도로에 나간 포니는 기대 이상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품질 평가는 당장 나오지 않았지만 엔진의 힘이 좋고 내구성도 당시로서는 수준급이고 기본적인 성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스타일링도 한 몫을 했다.‘ 꽁지 빠진 닭’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그것이 3박스 세단에 비해 특이한 디자인으로 받아 들여졌다.

이탈리아의 쥬지아로가 디자인한 모델의 신선함, 그것은 유럽 자동차업체가 설계한 모델이라는 인식으로 발전됐다.

그 바탕에는 소형차로서 포드 코티나나 독일 오펠 등 큰 차가 갖고 있던 약점을 커버한 대목도 일조했다. 탑승 공간이나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도 넓었다. 유럽스타일이라는 무엇인가 새롭고, 차별화 되었다는 반응을 얻으며 시장에서 인기를 얻어갔다. 동서양의 조화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발진가속과 추월가속 등도 당시 경쟁차였던 브리사보다 좋고 더 빠르다는 반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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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택시기사들로부터 반응이 엄청 좋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한국민들의 정서와 부합되 어 첫 번째 국산 고유 모델 포니는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당시 기록에는 포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되어 있다.
최초의 국산 고유모델(국산화 90%) 승용차. 현대자동차는 포드와의 사업추진이 허사로 돌아가자 이탈리아 디자이너 쥬지아로에게 스타일링을 맡겨 한국형 승용차“포니”의 개발에 성공하고 74년 10월 제 55회 토리노 모터쇼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함으로써 국산 고유 모델 시대를 열었다.

한국인의 취향과 체격, 그리고 도로사정에 맞는 경제형 차인데다가 내구성이 좋아 국민들로부터 인기를 끌었으며, 마이카 시대를 열어준 차였다. 포니가 나온 뒤 승용차 시장의 80% 정도였던 중형차는 밀려나고 소형차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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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는 1975년 12월 생산에 들어가 76년 2월 울산공장에서 첫 출고되었으며, 판매 첫해에 1만 726대가 팔려나가 국내 승용차시장 점유율 43.6%를 차지하면서 단번에 최고 인기 차로 떠올랐다. 그 해 7월 국산승용차로선 처음으로 에콰도르에 5대가 수출됐다. 이렇게 시작된 포니 시리즈는 1984년 단일 차종으로서는 처음으로 50만대 생산을 돌파 하였으며, 1975년 12월~1985년 12월까지 293,936 (내수 226,549대, 수출 67,387대)가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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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에는 1,439cc 92마력짜리 엔진과 왜건, 픽업트럭 등 가지치기 모델도 등장했으며 1976년 당시 포니의 차 값은 2,273,270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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