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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뮬러 원(F1) 히스토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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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05-12-31 13:5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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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뮬러 원 히스토리(4)

FIA는 이러한 이름을 붙인 큰 쪽의 포뮬러는 그 후로도 그랑프리 포뮬러로 계속 불리고 한편 새로운 포뮬러쪽은 포뮬러2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또 많은 관계자는 이 두 개를 포뮬러A/포뮬러B로 불렀다.
변화는 레이스계 전체에 파급되었다. 그중에서도 영국에서는 열렬한 클럽맨에 의한 새로운 타입의 레이스가 등장해 1949년이 끝나갈 무렵에는 500cc 엔진을 이용한 이 새로운 포뮬러는 국제적으로도 확고한 지위를 쌓아갔다.(이것은 후에 포뮬러3라고 불리게 되었다.) 1950년에는 프랑스 몬레리에서 이 새로운 포뮬러에 의한 최초의 국제 레이스, 파리GP가 개최되고 쿠퍼.JAP에 탄 케인 커터가 우승을 차지했다.

1950년에는 또 포뮬러1으로서의 첫 국제 레이스도 개최되었다. 4월 10일에 치러진 포GP가 그것으로 마세라티에 탄 판 마뉴엘 팡기오가 우승했다. 그 2개월 전 FIA는 중요한 그랑프리 레이스의 결과에 기초해 드라이버 세계선수권을 개최할 것을 결정했다.그리고 이해 5월 실버스톤에서 치러진 영국GP부터 여러 가지 챔피언십이 출발했다.
이렇게해서 50년에 걸친 그랑프리 레이스의 역사를 살펴보았는데 대략 ‘F1이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미 본 것처럼 그것은 그랑프리 레이스로서 계속해서 이어져 온 것이다. 예를 들면 그 이전은 포뮬러 1이라고 하는 이름은 없었다. 정확히 1940년대 후반까지 그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 때문에 그것을 시발점이라고 말하기는 무리가 있고 또 옳지 않다. 설명했듯이 세기의 변환점에 고든 베네트 레이스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포뮬러 1은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포뮬러 1으로 일단 탄생했으며 그것은 그랑프리 레이스의 황금시대의 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제 2차 대전 직전 리프 스프링이라는 다른 새로운 서스펜션의 스프링처럼 기술면의 진보에 의해 머신의 속도는 향상되었고 그 결과 드라이버에게도 최고의 기량이 요구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월드 챔피언십의 시대에는 그때까지 이상으로 그것이 필요한 결과로 되었다.
안타깝게도 쟌 피엘 위뮤 등의 모습은 이미 없고(위뮤는 1949년에 보아츄레트 레이스에서 사고사했다.) 위대한 타치오 누보라리도 그 빛나는 레이스 역사의 최후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팡기오와 알베르트 아스카리라는 새로운 얼굴들이 유명한 선배 드라이버들의 대를 이어갔다.

1950년 5월 13일, 눈부신 태양빛이 넘실거리는 실버스톤에 세계 최초의 월드 챔피언십 레이스, 영국GP에 출장하는 21인의 드라이버가 나타났다. 화려한 분위기가 흐르고 영국에 있어서는 세상에 위력을 떨치는 날이었다. 죠지 국왕부처와 마가레트 왕녀도 이 레이스를 관전했고 레이스 전에는 피트에서 드라이버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RAC(왕립자동차클럽)에 의한 완벽한 레이스 운영 하에 대 관중은 머신들의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스는 시판차의 생산에 힘을 쏟았기 때문에 1949년 1년간 레이스에서 멀어 졌었다가 이해에 복귀한 알파로메오의 독무대로 되었다. 그들은 스타팅 그리드 최전열을 독점하고 또 결승 레이스에서도 쥬세페 파리나, 루이지 파지오리, 레그 파넬의 3인이 표창대를 독차지했다.

월드 챔피언십의 1년째는 알파로메오에 탄 드라이버의 독무대가 되고 챔피언십이 걸린 7레이스 중 6레이스를 그들이 재패했다. 우승하지 못했던 것은 미국의 인디아나폴리스 500마일 뿐이었다. 이 레이스는 1960년까지 챔피언십 중 1전으로 치러져 왔었으나 계속해서 미국 독자의 분야이고 매년 5월에 치러지는 이 레이스에 유럽에서 원정온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결국 월드 챔피언십의 제 1호로 된 것은 몬차에서 개최된 최종전 이탈리아GP를 재패한 이탈리아 드라이버 파리나였다.

한편 엔초 페라리는 알파로메오를 떠나 자신의 팀을 설립, 1951년에 그의 팀은 오랫동안 지배적 입장에 있던 알파에 대신해 주목을 끌게 되었다. 그 전해 그들은 자연흡기로 허용되었던 4.5리터 꽉 찬 배기량의 엔진을 탑재한 머신을 이미 개발해 놓고 있었다. 1951년 시즌 전반은 아직 알파가 우세를 보였으나 실버스톤에서 치러진 영국GP에서는 드디어 이 대배기량의 페라리에 탄 플로이란 곤잘레스가 승리했다. 이것이 지금도 알려져 있지 않은 유일한 이탈리안 콘스트럭터의 40년에 걸친 승리의 기록의 제 1보였다.

페라리는 다음해 52년 챔피언십에서는 완봉승리를 거듭해 종합결과의 상위 4위까지를 그들의 드라이버들이 독점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해 그랑프리 레이스는 큰 변화를 겪었다. 아쉽게도 출장차 중에 알파로메오의 자태는 없었다. 뉴 머신의 개발에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정부로부터 받아내는데 실패해 같은 나라에서 등장해 온 신흥세력도 없을 뿐 아니라 기존 팀들 중 철퇴하는 예도 늘어났다.

더욱 큰 변화는 1952년과 53년의 월드 챔피언십이 포뮬러1에서는 아니고 포뮬러 2에서 다투게되었다. 이에 따라 레이스는 자연흡기는 2리터 이하, 또 과급은 500cc 이하까지라고 하는 배기량으로 치러졌다. 또 컨스트럭터에 있어 이 2년간은 1954년부터 실시예정인 새로운 포뮬러1(자연흡기 2.5리터 이하, 과급은 750cc 이하)을 위한 준비기간도 되었다.

페라리는 초기스포츠카에 사용된 자연흡기의 1800cc 4기통 엔진의 개발을 추진했다. 그리고 이 엔진을 탑재한 티포 500은 포뮬러2로 치러진 2년간의 월드 챔피언십을 완전히 압도하게 되었다. 1952년에는 인디500을 제외하고 전 레이스에 승리하고 또 53년도 팡기오의 마세라티가 승리한 이탈리아 GP를 제외하면 완전히 똑 같이 전개되었다.
이 이탈리아의 우위도 1954년에 메르세데스 벤츠가 그랑프리에 복귀하게되면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메르세데스의 뉴 머신, 연료분사 2,496cc 직렬 8기통 엔진을 탑재한 W196은 그 후 4년 연속해서 챔피언이 된 팡기오의 드라이빙에 의해 데뷔 레이스의 프랑스GP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우승했다. 결국 팡기오는 이해 챔피언이 되고 페라리와 마세라티의 이탈리아세는 머신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메르세데스의 우위는 다음해 55년에도 계속됐다. 그 공세에 대해 엔초 페라리는 반격할 방법을 궁리해 숏 휠 베이스의 머신, 티포 553의 개량을 추진했다. 다른 컨스트럭터들도 이를 따르기 시작했다. 단체의 통합에 의한 머신의 시대는 가고 세련되고 슬림화한 외관의 머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55년 말 메르세데스는 그랑프리 레이스에서의 철수를 발표했다. 이것은 이해 르망 24시간에서 메르세데스의 머신 1대가 관중석으로 날아들어 8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는 대규모 참사로 인한 것이었다. 이 메르세데스의 퇴장에 의해 이탈리아세, 즉 마세라티와 재정난을 겪고 있던 란치아에 대해 페라리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탄생한 란치아 페라리가 지배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다.

1957년에는 실로 30년만에 영국 팀이 그랑프리 레이스에서 그 존재를 인정받는 성적을 남겼다. 실업가 토니 반더벨의 산하에 있는 반월이 스터링 모쓰의 드라이빙에 의해 영국(토니 브룩스의 머신을 모쓰가 계속 운전했다), 페스칼라, 이탈리아의 3개의 그랑프리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국이 영광의 정점에 이른 것은 이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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