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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뮬러 원(F1) 히스토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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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06-01-21 16:4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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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에는 석유회사가 업계의 활성화를 기대해 그때까지의 알콜 베이스의 특수연료에 대해 100∼130옥탄의 시판항공기 연료의 사용을 의무화하도록 CSI에 압력을 가했다. 결국 CSI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그 결과 몇 개의 컨스트럭터에서는 엔진의 개조가 필요하게 되었다. 반월도 그 하나였는데 반더벨은 그 개조에 성공해 그들의 머신은 6승을 거두었고 이해부터 새로이 신설된 컨스트럭터스 컵을 획득했다.

1959년에는 코벤트리 크라이막스의 4기통 엔진을 드라이버의 뒤쪽에 탑재한 미드십 머신 쿠퍼T51에 탄 잭 브라밤이 월드 챔피언이 되어 F1의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엔초 페라리도 이미 이 단순한 신시구의 장점을 인정하고 그 다음해 서둘러 디노 246에 그 레이아웃을 시험적으로 시도했다. 하지만 차제에 수를 늘려온 미드십F1 중에서도 쿠퍼 크라이막스는 눈에 띠는 존재였다. 무엇보다도 엔초 페라리도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아 1961년부터 실시된 새로운 1.5리터 F1에 대비해 착착 머신을 준비해 갔다.

새로운 포뮬러 1은 종래의 그랑프리 머신에서는 예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제한이 부과되었다. 엔진은 자연흡기뿐이고 배기량은 1.5리터 이하, 최저중량은 450kg으로 정해졌다. 연료는 시판 레이스 전용이 사용되고 그 외 롤바와 스타터 모터, 2계통의 브레이크 시스템 등이 의무화되었다. 게다가 거기에 더해 레이스 중 오일의 보급은 인정되지 않았고 또 차륜까지 씌운 보디도 금지되었다. 이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제한이 많은 신 규정의 포뮬러1이 실시될 때 페라리처럼 제능있는 인물이 우선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사태는 당연히 그대로 진행이 되었다.

61년 시즌 페라리의 디노 156은 5승을 거두고 이탈리아에 컨스트럭터스컵을 손에 쥐었다. 페라리가 새로운 포뮬러1에 적합한 머신의 제작을 진행시키는 한편으로 영국의 컨스트럭터들은 거리를 두게 되었다. BRM은 새로운 포뮬러1에 반대해 CSI에 소송을 제출하고 승소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뉴 머신의 개발은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제판에 패하고 나서야 그들도 페라리처럼 선견지명을 가져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페라리의 성공은 아주 단기간의 일이었다. 1961년의 말경 팀 메니저인 로모로 타보니를 시작으로 하는 많은 상층부의 사람들이 의견충돌을 일으켜 팀을 공중분해시켜 버렸기 때문에 영국팀에, 페라리의 내부붕괴를 기회로 한 호기가 다가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확실히 그렇게 되었다.

1949년 이래 그랑프리 레이스의 제패를 기도해온 BRM은 타입P57로 1962년의 컨스트럭터스 컵을 획득하고 또 여기에 탄 그레이엄 힐이 드라이버스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대폭 개량된 경량 섀시에 190bhp를 발생하는 V8엔진을 탑재한 이 머신은 위대한 콜린 채프먼의 손에 의해 개발된 라이벌 머신 로터스 크라이막스에도 충분히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CSI는 1.5리터 F1의 실시기간을 당초 예정했던 63년까지의 3년간에서 2년 연장한다는 것을 발표했다. 이것은 이것은 소배기량의 F1 머신의 제작에 시간이 걸리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영국의 컨스트럭터들에게 있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쁜 것은 로터스였다.

채프먼은 뉴머신의 타입25에 모노코크 프레임을 채용함으로써 레이스계에 큰 변화를 몰고와 다른 컨스트럭터들도 서둘러 이 방식을 채용해 갔다. 그가 생각한 아이디어는 놀라운 것으로 그때까지 누구도 생각지 못한 단순한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2개의 튜브 사이에 드라이버가 앉는다고 하는 것이었다. 스페이스 프레임은 이미 옛날 얘기가 되버리고 상자모양으로 형성된 두 개의 긴 알루미늄제 튜브를, 강철제의 벌크헤드와 크로스멤버로 일체화한 것이 거기에 대신했다. 이에 따라 드라이버가 앉는 위치는 그때까지보다 낮아지고 또 섀시도 경량화되었다.

1964년이 되자 페라리가 세미 모노코크를 채용한 티포 158로 최전선에 등장해 이것을 드라이브한 죤 사티스가 월드 챔피언이 되고 영국세의 공세에 대응해 갔다.
1.5리터 F1최후의 해가 된 1965년은 짐 클라크+ 콜린 채프먼 + 로터스가 드라이브/컨스트럭터의 양 타이틀 획득이라고 하는 영광 중에 시즌의 막이 내렸다. 무엇보다도 1.5리터 최후의 레이스, 맥시코 시티에서 치러진 멕시코GP에서 우승한다고 하는 영예를 손에 넣은 것은 전년 데뷔한 일본 메이커 혼다의 V12엔진을 탑재한 RA272였다. 1.5리터 F1으로서 치러진 47레이스에서 짐 클라크는 19승, 또 로터스 크라이막스는 22승을 올렸다.

그 2년 전에 CSI 는 1966년부터 배기량 상한을 자연흡기는 3리터, 다시 인정되게 된 과급기 부착 엔진은 1.5리터로 개정하는 것을 확실히 해갔다. 과연 영국세는 그때까지대로 우세를 보일 수 있을 것인가? 그와 함께 페라리가 살아날 것인가?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1965년에 처음으로 코벤트리 크라이막스사가 F1엔진에서 철퇴를 발표한 것은 영국의 컨스트럭터들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새로운 3리터 F1에 대한 준비가 여기에서 백지화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편 페라리는 스포츠카 레이스에서 오래동안 사용되어온 V12엔진이 있고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선두로 나선 것은 의외로 브라밤 팀이었다.

브라밤 팀 보스인 잭 브라밤은 그 F1 머신의 엔진으로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레프코사가 제작한 3리터 V8엔진을 채용했다. 이 엔진은 라이벌들의 것만큼 파워풀하지는 않았지만 심플하고 신뢰성이 높았다. 그리고 론 트라낵의 설계의 섀시도 또 심플 그 자체였다. 이것이 브라밤의 성공 비밀이었다.

3리터 F1의 최초 규정에서는 최저중량은 500kg으로 끌어 올렸고 레이스 거리는 300∼400km로 했다. 하지만 1969년에는 소화기와 안전연료탱크의 장비의무, 또 롤바의 규정 명확화 등이 추가되어 최저중량은 530kg으로 다시 상향 조정됐다. 점차 증대되어가는 공력에 의한 효과도 크기의 제한과 차량검사의 철저에 의해 제약이 더해갔다. 이렇게해서 엔진 배기량은 그대로 3리터였으나(기통수는 1972년에 12까지 제한되었다) 변경점이 얼마인가에 따라 레이스 그 자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브라밤 레프코의 성공 스토리는 1967년에도 계속되었는데 1968년은 로터스의 해로 되었다. 에이스인 짐 클라크는 호켄하임의 F2레이스에서 사고사했는데 로터스는 이해 컨스트럭터 타이틀을 획득했고 또 클라크 대신 에이스로 된 그레이엄 힐이 드라이버 챔피언 타이틀까지 차지했다. 로터스의 성공은 포드 에스코트제의 V8 엔진, “DFV”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고 이해에는 로터스뿐 아니라 맥라렌과, 켄 티렐이 매니지먼트를 담당한 새로운 팀, 마트라에도 DFV가 공급되었다.

DFV는 다음해인 1969년 전 그랑프리 레이스를 재패했는데 1970년의 후반에는 페라리가 수평대향 12기통 엔진과 소구경강관에 의한 개량형 세미 모노코크를 가진 스마트한 스타일링의 312B에 의해 표창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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