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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동차기술 첫 걸음에서 비상까지-7. 가지치기 모델 개발과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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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0-04-21 06:3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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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동차기술 첫 걸음에서 비상까지-7. 가지치기 모델 개발과 유럽 시장 진출

한국 최초 고유모델 포니 양산
가지치기 모델 개발과 유럽 시장 진출

포니1의 탄생은 한국의 자동차산업에서 역사적인 일로 기록되고 있지만 막상 현장에서 일하던 우리는 그런저런 저간의 의미에 대해 무디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출고된 차들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만도 벅찼는데 거기에 다음 차량의 개발이라는 과제가 또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치백 모델 한 가지를 겨우 개발한 경력밖에 없는 팀에게 가지치기 모델을 만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해치백 모델을 베이스로 왜건과 픽업을 만들어야했다. 우리는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해 보겠다고 했다는 표현이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새로운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글 / 이충구 (전 현대자동차 사장, 한국자동차공학회 전회장)
출처 / 한국자동차공학회 오토저널 2010년 4월호


주어진 대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우리는 앞뒤 가릴 것 없이 그냥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필자가 속한 소형차보디설계 1과는 포니 왜건을, 김동우과장이 속한 소형차보디설계 2과에서는 포니 픽업을 개발하도록 임무가 주어졌다. 말이 개발이지 어떤 기술적인 노하우나 선진 기술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기존 포니1의 도면을 바탕으로 뒤쪽에 루프를 연장해서 뒤쪽을 늘려 그려 넣으면 그것이 왜건이었고, 루프 뒤쪽을 반으로 적당히 잘라 짐칸 형태를 만들면 픽업이 될 것이라는 생각만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일은 이미 해외로부터 수입해 들여와 운행하고 있는 차들을 벤치마킹(?)하는 것이었다. 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 이렇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포니 도면을 기준으로 왜건과 픽업 도면을 우리가 직접 그려 나간 것이다. 쉬운 표현으로 하자면 카탈로그를 구해 와서 해치백 포니 스킨 도면에 왜건과 픽업을 그려 본 것이 스타일링의 끝이었다.

포니 해치백의 도면에 선도만 그려서 개략적인 스타일링 평가용 시작차를 만들어 보고 그 과정에서 다시 선도를 수정하는 작업을 통해 스타일링이 결정되고 개발이 시작되었다. 도면을 그리고 해머로 두드려서 시작차를 만들고,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수정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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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픽업 설계를 담당했던 김창만이라는 설계자는 왜건과 픽업의 리어 게이트를 여닫는 시험도 담당했었는데 본인이 직접 열고 닫아 보면서 내구성 시험을 하는 식이었다. 다이 캐스팅공법으로 제작된 리어게이트 랫치가 부러지고 깨져서 이를 개선하고 보강설계로 수정한 뒤에 야 해결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연(징크)재질의 다이캐스팅을 하고 나면 외형적으로는 번듯한 모양의 주물이 나오더라도 살 속에는 보이지 않는 기공의 기포가 있거나 하면 그로 인해 실제 자동차에 장착했을 때 잘 깨지는 일이 빈번했다.

어디 그뿐인가? 픽업이나 왜건만 해도 힘든 작업이었는데 1톤 트럭도 개발해서 만들어내야 했다. 당시의 상황은 자동차산업 합리화 조처라는 명목 하에 각 자동차회사별로 과당 경쟁을 막고, 생산할 수 있는 차종에 대해서 카테고리를 정해 주었었다. 기아자동차는 3톤이상의 트럭을 생산할 수 있고 현대자동차는 3톤 이하의 트럭 및 소형 승용차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당시 우리에게는 3톤 바이신과 1톤 포터 개발업무를 소형차 보디설계 1과와 2과에서 나누어 담당하도록 분장해서 프로젝트 진행한 것이었다. 트럭이라고는 포드제 D750 트럭을 CKD 형태로 수입해와서 생산해 본 경험이 전부인 우리에게 처음부터 새로운 플랫폼의 1톤 과 3톤의 트럭을 개발한다는 것은 그야 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었고,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다른 부서들은 그나마 기존 트럭을 조립 생산해 본 경험이 있어 나름대로 생산 조립능력은 축적된 상태였지만 엔진 등 플랫폼설계 개발업무는 맞춤의 짜깁기식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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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포터를 제작하는 데는 크게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기어 체인지가 부드럽게 되지 않는다던가, 1톤포터 가운데 보조석이 들어 올리고 닫는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 그 시트를 여닫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기술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원활한 작동을 위해 좋을까에 대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문제 해결을 위해 2과를 책임지고 있던 김동우과장이 오류동 한일이화에 가서 1주일간 갖가지 시험을 해 고쳐오기도 했었다. 또한편 사이드 미러를 차체에 고정시켜 주는 스테이가 약해서 자주 부러지곤 해서 보강해서 해결할 때까지 시간이 걸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렇게 실제로는 문제가 발생하면 1, 2과 구분하지 않고 얼굴 맞대고 일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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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과정 중에서 일 량이 너무 많아 넘쳐서 1977년 1월 대형차 설계부가 따로 독립해 나가면서 1톤은 소형차 설계 팀이 3톤 이상은 대형차 설계 팀이 하는 것으로 업무가 분리 되었다.

유럽시장 진출을 위한 포니 충돌테스트
한편 포니 양산을 시작한 것이 1976년 2월이었는데 바로 1년도 채 안된 1977년 초 나는 영국 버밍햄으로 3개월 출장을 가게 됐다. 포니의 충돌테스트를 포함한 EEC(유럽경제공동체)의 안전규정 테스트 통과를 위해서였다.

고유모델 개발은 양산을 시작해서 국내에서 꽁지 빠진 닭이라는 별명과 함께 잘 팔려가고 있었고, 에쿠아도르를 시작으로 수출도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정세영사장은 자동차의 격전장인 유럽과 미국으로의 수출을 검토하도록 지시했고, 기획실의 수출 팀은 전세계로의 수출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형차 설계부에서는 미국연방 안전기준 FMVSS(Federal Motor Vehicle Safety Standard)를 공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42개 항목의 안전시험과 배기가스규제치, 소음기준치 등을 보강해야 했고, 영어로 된 테스트 방법이나 규제치의 내용 자체부터 이해 할 수가 없었다. 95 퍼센타일 마니킨부터 이해 하는데만도 한참 걸렸었고, 42개의 법규를 밤 세워 가면서 2~3개월 걸려서 우리 식으로 정리해서 브리핑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따라서 미국시장 보다는 훨씬 덜 까다롭다고 판단한 유럽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EEC(유럽경제공동체)의 안전규정 테스트 기관인 MIRA (Motor Industry Research Association)에 포니를 보내 테스트 하기로 결정이 된 것이다. MIRA에서 각종 테스트에 통과하면 다른 유럽국가들의 안전규정 통과도 약간의 보완만으로 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가 영국 포드에서 자동차를 들여와 생산도 하고 있었고, 턴블 부 사장을 포함한 고문단도 영국 출신으로 구성되는 등 영국과 친숙하다는 것도 영국 시험기관을 택한 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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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우리나라도 화성자동차성능시험연구소와 같은 국가차원의 형식승인 테스트 기관이 있지만 당시에는 해외 시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고유 모델을 처음으로 겨우 개발해 본 우리의 입장에서는 충돌테스트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막상현장에 가서 보면서 시속 48km/h의 속도로 차체 앞 부분의 충돌시키는 시험을 포함해서 다양한 시험이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충돌 시험 후에 보닛(엔진룸 덮개)은“ㄱ”자나“ㄷ”자 모양으로 꺾여야 하고, 네 문짝 중 적어도 하나는 열려야 하며, 스티어링 휠은 정해진 거리 이상 뒤로 밀려 나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만족해야 했다. 충돌시험 동안에 운전석에 앉힌 마니킨의 가슴부분에 받는 충격 값이 규정치보다 커서도 안 된다는 까다로운 시험이었다. 운전자와 탑승자의 가슴에 미치는 충격과 머리 부분의 충격치를 정량적으로 측정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부터 우리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당시 시험기간 동안 포니 충돌 시험 끝날 때까지 모든 EEC 시험항목을 진행하려다 보니 많은 규정에 맞는 부품을 새롭게 준비 한 것도 많았다. 시간도 오래 걸렸었다. 다행히 이미 1년 전부터 부품단위의 시험을 진행을 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현지에서 테스트를 해 문제가 발생하면 다시 제작하거나 수정하여 재시험 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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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 중에는 시트벨트의 강도 시험을 비롯해 램프류, 계기판, 시트 강도시험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성적은 기대 이상이었다. 전면 충돌테스트에서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합격선에 든 것이다. 충돌 후 연료가 누출되면 안 된다는 규정에도 통과했고 충돌 후 도어도 제대로 열렸다. 또한 차 유리가 1평방인치에 몇 개 이상의 조각으로 깨져야 한다는 규정도 통과했다. 문제는 MIRA의 시험이 완료된 것은 1977년 4월 3일이었고 유럽 진출을 위해서 같은 해 3월 11일부터 16일까지 열린 제네바 모터쇼에 양산된 포니1을 출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영국에서 모든 시험이 종료되지 않은 상태로 출품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합격된 부품을 현장으로 직접 가지고 가서 교환 작업을 하기도 했었다.

열사의 지방에서 생긴 포니 문제
하지만 우리는 그런 기쁨을 느낄 시간도 없이 새로운 과제에 부딪혔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열대지방으로 수출한 차량에 심각한 결함이 발생해 그것을 확인하고 해결해야 했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1976년에 사우디아라비아에 113대를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매년 중동시장에 2,000~3,000대씩 내보냈다. 판매 지역도 바레인과 요르단, 예멘, 아랍 에미레이트 등으로 다각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개발해서 만든 포니는 그런 열사의 나라들까지 별도로 고려해 제작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이야기하는 혹한, 혹서 테스트 등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과는 참혹했다. 영국으로부터 귀국하는 길에 바레인에 들려 상황을 파악하도록 본사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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