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오토뉴스

상단배너

  • 검색
  • 시승기검색

포뮬러 원(F1)히스토리(6)

페이지 정보

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06-03-11 15:01:32

본문

포뮬러 원(F1)히스토리(6)


1970년대가 되어서도 그랑프리 레이스 세계의 기본적인 골격은 변화는 없었으나 재키 스튜어드가 켄 티렐의 이름을 붙인 최초의 F1 머신을 타고 이 세계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 올랐다. 70년대 초기에는 또 일찍이 없었던 스폰서와의 관계가 강해진 시대로도 되었다. 대기업이 자동차 레이스를 선전하는 장으로서 이용하게 되고 그것도 자동차관련산업 뿐 아니라 레이스를 효과적인 선전의 수단으로 생각한 담배와 화장품 등 자동차와는 무관한 업종들까지도 참여했다. 자동차레이스는 그때까지도 관객을 모으는 스포츠였는데 이 즈음에는 TV에 있어서도 인기가 높은 스포츠로 되고 이 것이 잠재적인 스폰서의 관계를 이끌게 되었다.

이 붐은 1968년에 로터스가 머신을 스폰서 관계인 죤 플레이어사의 담배 브랜드 골드리프의 컬러로 도장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영국은 그린, 독일은 실버, 이탈리아는 레드, 프랑스는 블루라고 하는 전통적인 내쇼날 컬러의 시대는 이미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지금의 문제는 F1에는 스폰서가 필요하다고 인식이 되어 그 대신에 스폰서는 출자액에 어울리는 이익을 얻는 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머신에 그려지는 광고, 그 자체가 그들을 홍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었다.

로터스의 행위는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그러나 코마샤리즘과 스폰서십이 그랑프리 레이스의 세계에 도입되고 그리고 F1 레이스가 말하자면 도구로서 필요성이 높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영국의 레이스 잡지 “오토스포츠”의 1968년 어느 호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만약 흥미를 가진 기업이 이러한 방법으로 제품을 선전하고 싶고 원한다면 아마 자동차 레이스에도 얻어지는 이익은 다른 어떤 반론도 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로터스는 1971년에도 F1최초의 가스 터빈 엔진을 탑재한 머신, 타입56B를 데뷔시킨 것으로 또다시 새로운 영역의 개척자가 되었다.

1973년 시즌에는 아쉽게도 그 이래 죽 F1의 발전을 저해해 온 많은 논쟁 중의 하나가 생겨났다. 그것은 서키트의 오너들에 의해 새로이 결성된 그랑프리 인터내셔널(GPI)와 포뮬러1 컨스트럭터스 어소시에이션(FOCA) 사이에서 있었던 것이었다. 의견이 다른 차이점의 핵심은 레이스의 상금에 관한 것이었다. FOCA는 상금의 대폭적인 증액을 바랐던데 반해 GPI는 12.5%의 인상을 시사했던 것이다. 결국 양자간에 합의한 것은 극히 일부에 관해서였으나 최종적으로 FOCA는 개개 레이스의 주최자와 합의에 달해 이에 따라 레이스 캘린더중 몇 개의 레이스(또는 전 레이스)가 중지되는 사태는 회피할 수 있었다.

FOCA는 또 CSI와도 머신에의 연료적재량의 저감을 목적으로 한 2히트제의 도입에 관해 대립했는데 이것은 시즌 개막까지 몇번인가 합의에 달했다. 하지만 시즌에 들어서도 논쟁은 계속됐다. 그랑프리 드라이버스 어소시에이션(GPDA)이 벨기에 GP개최지로서 졸더를 사용하는데 대해 불만의 뜻을 표명했다. 이것은 코스의 부적격성이 문제가 되었었기 때문에 벨기에GP는 일시 개최가 불투명했으나 어쨌든 어렵사리 결론에 도달했다.
1970년대의 중반에는 머신의 디자인은 현재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곳으로 되었다. 낮은 섀시와 리어에 부착된 윙은 대부분의 머신에 극히 보통으로 되고 또 그 후의 머신도 모두 이런 디자인을 이어 받았다.

시즌 개막 전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74년도 전년과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석유위기에 의해 모든 종류의 레이스가 일시정지 상태에 들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랑프리레이스의 프로그램은 그대로 진행되어 남아프리카GP가 거의 중지될 뻔 했었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되자 벌써 CSI는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출장한 머신을 레이스에 적당한 대수로 줄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당시 많은 새로운 얼굴의 컨스트럭터가 그랑프리 레이스에 참가해왔다. 그러나 엔트리한 머신 전부를 레이스에 출장시키는 것은 어려웠다. 거기에서 CSI와 FOCA는 각각 레이스마다 코스에 적합한 출장대수 제한을 설정해 일련의 예선으로 주회타임에 의해 결승 레이스에 출장하는 머신을 결정하는 것으로 합의에 달했다.

1974년과 75년에는 머신의 기본적인 디자인에 관해서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우승의 향방에 관해서는 변화가 있어 페라리가 횡치 기어박스를 채용한 312T로 우승전선에 부활한 것으로 포드 코스워스의 황금시대가 끝나게 되었다.

1976년에는 FOCA가 CSI에 윙의 사용과 휠의 림폭만큼 타이어 트레드폭을 규제하는 규정의 변경을 받아 들이게 해 FOCA의 발언력이 아주 강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건에서는 확실히 증명되었던 것처럼 그랑프리 레이스를 운영관리하는 힘은 서서히 CSI의 손을 떠나고 있었다.

1976년 시즌의 머신에 있어서 최대의 문제는 티렐의 6륜차, 프로젝트 34가 등장한 것이었다. 이것은 처음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켄 티렐은 아주 진지했다. 그리고 안델스톱에서 개최된 스웨덴 GP에서 죠디 섹터가 이 머신으로 우승해 버리자 레이스계는 비로소 이것을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1977년 경에는 시즌오프의 최대의 화제는 현재처럼 드라이버의 동향이 중심이었다. 즉, 최종전의 골 씬의 한참 전부터 ‘내년은 누가 어느팀으로 출장할까?’라고 하는 것이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한편 메커니즘 면에서는 다른 6륜차가 등장했다. 이번에는 ‘마치’였는데 전년의 티렐과는 달리 타이어가 4개인 것은 후륜쪽이었다.

1977년의 큰 기술적인 진보는 다운포스를 증가시킨 새로운 시스템을 갖춘 죤 플레이어 로터스 78이 등장한 것이었다. 머신 아래쪽의 공기의 흐름을 빠르게 함으로써 압력을 낮추는 이 시스템을 채용한 머신은 그 후 ‘윙 카’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컨스트럭터들은 안전기준을 만족시키면서도 속도와 접지력의 향상에 노력한 결과 머신은 끊임없이 변해갔다.

1978년 영국 GP에는 이 레이스부터 그랑프리에 컴백한 프랑스 자동차 메이커, 르노의 자태가 보였다. 이번에는 F1 최초의 터보차저를 장착한 1492cc의 V6엔진을 탑재하고 참가했다. 그러나 이전 수퍼차저와 마찬가지로 터보는 처참할 정도로 성능을 내지 못해 그렇지 않아도 이 방식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축배를 들게 하는 구실을 제공하는 결과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로부터 겨우 2년 사이에 엔진에는 대폭적인 개량이 가해져 1979년 프랑스GP에서는 쟌피엘 자비유가 우승해 터보 엔진으로서는 첫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이렇게해서 포뮬러1의 다음 10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실현했다. 터보 엔진은 지금이야 그랑프리 레이스의 긴 기술혁신의 흐름의 최선단에 있고 컨스트럭터들은 앞을 다투어 터보 엔진으로 바꾸어 갔다. 그 후는 물론 터보 엔진이 포뮬러1의 세계를 완전히 지배하게 되어 넬슨 피케, 니키 라우다, 알랭 프로스트 등의 드라이버들이 터보 엔진을 탑재한 머신으로 월드 챔피언이 되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하단배너
우측배너(위)
우측배너(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