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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과 기술의 조화, 브와쟁 데미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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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0-06-16 17: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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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에 가브리엘 브와쟁(Gabriel Voisin)은 비행기에서 영감을 얻어 자동차를 만들었는데, 예술성과 효용성을 겸비한 차체작업이 매우 훌륭했다. 그는 프레드릭 란체스터(Frederick Lanchester)나 에토레 부가티(Ettore Bugatti)처럼 음악, 공학, 미술, 건축, 항공, 문학에 두루 조예가 깊은 문예부흥주의자로서 평생 여인을 쫓아다녔는가 하면 쾌락주의자이자 식도락가여서 93년에 걸친 생애 동안 재산을 모았다 탕진하기를 수 차례 반복하였다. 풍요롭고 다채로운 인생의 20년을 자동차 제작에 투자한 그는 생산에 깊이 관여하여 주로 가볍고 다용도로 사용 가능한 알루미늄 차를 만들었는데, 훗날 재생업자들에 의해 부수어진 탓에 오늘날에는 약 100대 정도만 남아있다.

1880년 태어난 브와쟁은 18세에 첫차를 만들었다. 20세 때 파리 박람회에서 초기 형태의 비행기를 보았을 때 이미 전도 유망한 건축가의 길에 들어서 있었으나, 이 박람회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역동적인 형태의 비행기를 설계했으며, 파리 교외 이씨 레 물랭노(lssy-Ies-Moulineaux)에 세계 최초의 비행기 연구소를 설립했다. 1908년 드디어 그가 만든 비행기가 이륙하여 1km를 선회한 후 사고 없이 착륙했다. 그는 1973년 죽을 때까지 라이트 형제가 아닌 자신이야말로 비행기를 발명한 인물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브와쟁은 세계 최초로 강철을 용접한 프레임에 알루미늄 덮개를 사용한 10,700대의 폭격기와 정찰기를 연합군에 팔았는데, 종전이 가까워지면서 전쟁이 끝나면 자동차 수요가 크게 증가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자동차 생산을 위해 기계를 재정비하고, 미국의 찰스 예일 나이트(Charles Yale Knight)가 특허를 가지고 있던 슬리브 밸브(sleeve valve) 엔진을 장착한 섀시 3개를 구매했다. 슬리브 밸브 엔진은 당시 많이 사용되던 양철판 엔진보다 조용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 브와쟁 차에 슬리브 밸브 엔진을 장착하였다. 배기량도 점차 커졌으며, 압축비도 증가했다. 1924년 미래에 석유가 고갈될 것이라 주장한 브와쟁은 가벼운 차체와 무게 중심을 낮추는 항공기의 원리를 자동차에 적용하여 탁월한 연비를 이루었다.

그의 차는 발명에 대한 놀라운 재주의 결과였다. 그는 발전기와 스타터를 별도로 하는 것은 비실용적이라 생각하고 둘을 합친 다이나스타트(Dynastart)라 불리는 장치를 발명했다. 제동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압축 공기를 실험한 브와쟁은 이 원리가 장차 트럭에 쓰일 것이라 예측했다. 클러치와 변속 기어를 싫어한 그는 어디서나 높은 기어만으로도 운전이 되는 차를 만들고자 했다. 또한 자신이 공들여 만든 섀시 위에 둔탁한 보디가 얹혀지는 것을 안타깝게 느낀 나머지 1925년부터는 모든 브와쟁차의 보디를 직접 설계하였다. 이 차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남들로부터 주목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어 루돌프 발렌티노(Rudolph Valentino)는 두 대의 브와쟁차를 소유했으며, 서머셋 모옴(Somerset Maugham), 아나똘 프랑스(Anatole France), 허버트 웰스(Herbert Wells) 등 유명 작가들도 브와쟁차의 애호가들이었다.

브와쟁은 1920년대 말 현대식 조립공법을 배우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으나 피부에 와 닿을 만한 것을 배우지 못했다. 그는 미국차를 "송장같이 오래된 고철 덩어리, 정어리 통조림 깡통과도 같은 존재이다. 쉽게 과열되며, 보기에 역겨워서 결코 도로에서 버티지 못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혹평했다. 그러다 유럽에서 미국 대형차에 대한 수요가 일자 그는 보다 큰 차를 만들어 경쟁을 하기에 이르렀다. 완벽주의자였던 그는 모든 부품이 기능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모양의 단순성을 강조하여 어떠한 장식도 허용하지 않았다.

데미 베를린 역시 이 시대 모델로 독특하게도 프레임이 차축 밑에 붙어 무게 중심이 낮은 4인승 차이다. 설계는 마치 입체파 화가의 작품처럼 놀랄 만큼 전위적이며, 상자 모양의 모듈마다 기능이 부여된 후 합쳐졌다. 승차 공간은 엔진과 트렁크 공간에 의해 크게 만들어졌으며 짐을 넣는 상자형 케이스가 앞 펜더 뒤에 장착되어 있다. 무게 중심이 낮은 프레임으로 인해 차의 높이가 150cm 정도밖에 안될 정도로 낮아졌으며, 이는 당시 경쟁 모델들보다 약 30cm나 낮은 것이었다. 변속기와 구동축은 뒷좌석을 이분하는 높은 터널로 덮여 있어 승객들은 프레임 레일과 구동축 터널 사이의 공간에 발을 내려놓았다. 프랑스인들은 이 공간을 "발 닦는 대야"라 불렀으며, "발 닦는 대야가 있는 차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곧 브와쟁을 소유하고 있음을 뜻하는 말이었다.

브레이크와 클러치 페달은 항공기 조종석의 조종 통제 장치를 본따 만들어졌다. 엔진 팬은 프로펠러처럼 목재였으며, 알루미늄 덮개판 밑의 목재 프레임은 얇은 나무판을 여러 겹 쌓아 만들었는데, 이는 항공기 제작에서 흔히 쓰이는 방법이다. 대형차에 걸맞는 강력한 엔진이 필요했으므로 브와쟁은 배기량 4.88 리터, 최고 시속 160km의 슬리브 밸브 V12 엔진을 개발했다. 한번 주유로 거의 500km 가까이 달릴 수 있도록 만든 두 개의 연료 탱크는 프레임 레일 사이에 세로로 장착되어 있었다. 1930년 파리모터쇼에서 발표될 당시 7,800 달러로 현재 가격으로 환산하면 약 50,000 달러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 브와쟁은 이 차가 운전자들을 위한 '너무도 과학적인 차'라고 자부했으나, 시기적으로 세계 대공황의 영향을 받게 되어 V12 모델의 생산대수는 통틀어 60대를 밑돌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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