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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동차기술 첫 걸음에서 비상까지-8. 열사 지방에서 생긴 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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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0-07-03 05: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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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 지방에서 생긴 포니 문제

하지만 우리가 개발해서 만든 포니는 그런 열사의 나라들까지 별도로 고려해 제작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이야기하는 혹한, 혹서 테스트 등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과는 참혹했다. 영국으로부터 귀국하는 길에 바레인에 들려 상황을 파악하도록 본사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글 / 이충구 (전 현대자동차 사장, 한국자동차공학회 전회장)
출처 / 한국자동차공학회 오토저널 2010년 4월호


중동지역에 수출된 차에서 대시보드의 크래스 패드가 터지고, 시트가 변색되며, 에어컨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등의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으니 현장에서 확인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연결 비행기를 기다리는 반나절 정도에 불과했다.

현장에 도착한 나는 우선 살인적인 더위에 놀랐다. 차체는 말 그대로 불덩이처럼 달궈져 있었다. 스티어링휠은 100℃가 넘는 온도를 견디지 못하고 일그러져 있었고 실내는 손을 댈 수도 없을 정도로 달구어져 있었다. 검정색 시트는 붉게 변색되어 있었다. 자외선이 검은 색소를 날려버려 시트에는 붉은 색소만 남았던 것이다. 에어컨은 작동되지 않았지만, 제대로 작동하더라도 이 온도에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국내에는 차량용 에어컨 생산업체가 없어 일본 C사의 것이 장착되어 있었는데, 중동의 지역적 특성이 고려된 것이 아니라 성능이 턱도 없이 부족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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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다녀 온 우리는 내열성과 내자외선 성능까지 갖춘 재질을 개발해야 했다. 내열 온도는 120℃로 다시 설정되었으나, 국내 업체들이 사용하는 소재의 수준이 미달하여 문제 해결이 쉽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KIST의 박사들을 울산으로 초청하였는데, 이것이 산학협력의 시초였다. 특별히 구성된 KIST의 박사 팀은 직접 중동을 오가며 시트 천과 크래시 패드의 내열성, 내구성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중동의 더위는 이들도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업체와 직접 붙어서 해결하는 것이 빠르고 정확하다는 생각이 점차 강해져 갔다. 당시 에어컨은 일본의 C사, 시트 천은 LK사와 접촉하고 있었는데, 일본을 직접 방문하여 그 쪽의 엔지니어들과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중동지방용 에어컨은 용량을 훨씬 키웠고, 크래시패드나 시트 커버용 천은 수입품으로 대체 하면서 큰 문제를 해결한 셈이다.

개발 초기부터 부품업체와 완성차와 협력업체간 협력관계를 배우다
나는 새로운 모델을 개발함과 동시에 이미 출고된 포니의 문제점을 해결하는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 때 함께 일한 일본의 부품업체들로부터 많은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었다.

특히 이탈디자인이나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 설계도면이 아니었기에 그것을 해결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예를 들어 헤드램프의 설계도에는 외부 디자인은 있었으나 내부 도면은 없었다. 내부가 어떤 형태로 되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한국의 부품업체들은 도면 없이 내부를 설계할 능력이 없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업체들을 찾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을 방문하여 일주일 혹은 그 이상을 머무르며 문제를 해결하며, 완성차 회사와 부품회사의 협력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웠다.

일본의 업체들은 마음을 열기까지가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협조하기로 결정된 다음부터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도움을 주었다. 우리가 도면을 제시하면 자세히 살펴보고 수정해야 할 점을 알려 주기도 하였다. 일본에서 우리는 모델 개발 초기부터 부품업체와 동시에 작업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여기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함께 개발하는 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었다. 문제가 발생하면 완성차 업체와 부품업체가 함께 머리를 맞대어 해결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일본의 방식과 기준에 맞게 개발하다 보니 지불해야 하는 비용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미국 포드의 경우에는 완성한 도면과 텔렉스만 보내면 그만이었다. 결과물만을 던져버리는 미국과는 달리 일본업체들은 보다 책임감 있게 설명하고 우리가 해결을 찾을 수 있도록 친절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우리가 처음에 접촉했던 업체들은 대부분 미쓰비시와 관련된 회사들이었다. 각 업체들과 협력과정을 겪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것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부품을 개발하는데 있어 가장 빠른 것이 미쓰비시와 같은 일본 회사나 유럽회사들과 직접 접촉하는 것이었다. 그들과 함께 설계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에겐 배움의 터였고 작업의 현장이었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그들과 함께 해야만 최종 해결책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한국 업체들에게 아웃소싱 할 때도 경험 있는 외국회사들과 기술제휴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조건을 달기도 했다. 이런 방식을 통해 현대자동차는 물론 한국의 부품업체들도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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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리에게 필요한 부품 제조 및 품질 개선을 위한 신규 기술 도입은 일본을 주축으로 해서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시트 제조, 내장 부품 개선, 제품 성능향상, 공해 규제 통과 등을 위해, 자동차 부품 설계 및 제조 기술들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 자동차도 부품업체 기술 향상을 위해 선진 업체들과 기술 제휴 및 합작을 주선하고 이에 대한 자금지원을 활발하게 시작했다.

이미 포니 국내 생산을 시작한 1976년에 사우디 현대건설에 포니 세단 15대, 포니 픽업 98대 총 113대의 수출을 시작으로 해서 중동의 바레인, 남미의 에쿠아도르, 엘살바도르,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등지에 1,019대를 수출해서 257만 달러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출을 위한 내부조직 확립 및 강화정책 수립 하에 해외 대리점도 13개가 이미 확보 되어 있었다.

이듬해인 1977년에는 포니 세단 5,320대 포니픽업 2,904대 합계 7,224대를 수출 할 정도로 수출에 올인하고 있었고, 국내 시장에서도 모자라서 못 팔 정도로 포니는 잘 팔려 나가고 있었다.

주요 부품의 품질 향상과 원가 절감을 하지 않고는 본격적으로 진출한 수출 시장에서 살아 남을 수 없다는 절대절명의 기본 방침이 수립된 것이다. 포니의 유럽시장 진출 후에 이렇게 포니가 완성된 후에 일은 더욱 많아졌다. 아니, 그 때부터가 본격적인 자동차 설계 및 개발, 생산에 대한 우리만의 노하우를 쌓는 시작이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1977년 당시 나의 업무 노트에는 연초에 해야 할 일들이 5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우선 수출용 포니의 우핸들 컨버전 개발 일정을 확정짓고, EEC 테스트용 차량을 조립 선적하고 서류를 준비하는 것, 그리고 포니 쿠페의 샘플카를 선정하여 품의하는 일, HD1000의 어셈블리, 인스톨레이션 도면을 완성하는 일 등이 그것이고, 마지막으로 포니의 현안 문제점들의 해결과 도면 전체의 업데이트가 계획되어 있었다.

전체 일정은 다시 월별로 계획을 정해서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1977년 1월의 업무 계획표 중에서 몇 가지 만을 발췌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월 31일부터 2월 15일까지 포니 EEC 관련 문서, 스페어 파트, 테스트 부품을 유럽으로 보낸다.
2. 2월 말까지 포니 쿠페 수출에 대비하여 FMVSS, EEC 규정을 파악하고 숙지해 정리한다.
3. 포니 쿠페 프리젠테이션 모델이 이태리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도착 후를 대비해서 준비해야 할 항목들을 점검한다. 포니 쿠페 개발을 위한 패키지 도면 제작과 함께 사전 검토 항목에 대해서 미리 프리스터디 한다.
4. 현재 진행중인 포니 와이퍼 링키지 설계개선 업무를 2월 5일까지 완료한다.
5. 포니 왜건 차체 부품(BIW)은 1월 31일, 의장부품은 2월 15일, 인스톨레이션 도면은 4월 15일까지 완료한다.
6. 포니 픽업 뒷부분의 설계를 일부 변경한다.
2월 들어서는 팀과 조직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소형바디설계과는 바디설계1과와 2과로 나뉘었고, 승용차와 상용차를 구분하는 형태로 확대 변경되었다. 사실 나는 당시 그저 눈앞에 벌어진 일을 처리하느라 지금도 당시의 조직 상황에 대해 뚜렷한 기억이 없다. 다만 내가 기록해 놓은 자료를 통해‘그랬었구나’하고 확인하는 수준이다.

수출시장에서 경쟁력 제고를 위해 해외의 자동차들을 많이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1977년 1월 샘플카 수입을 위한 품의를 올렸다. 우선 닛산의 닷선 서니(Datsun Sunny)를 첫번째 모델로 하여, 혼다 어코드, 미쓰비시 랜서를 구입하였다. 현대자동차가 샘플카 티어 다운 (Tear Down)을 통한 벤치마킹을 처음 시작했던 것이다. 샘플카의 구입비용이 매우 비쌌기 때문에, 처음에는 궁금한 부분을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여 원상복귀 시켰다. 한참 후에야 재 조립이 불가능한 용접포인트 수준까지 분리하기 시작했다. 각 단위 부품을 분해하여 무게까지 달아 비교,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후였다. 티어 다운이 시작되면서 우리는 차량 중량 문제 등 차량 개발 전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

포니, 유럽시장을 위한 디젤엔진 탑재 검토
포니의 유럽 수출을 추진하면서 우리는 디젤 엔진 탑재도 검토하였다. 당시 이미 디젤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던 유럽 시장에 수출하기 위해서는 디젤을 얹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 되었다.

디젤엔진 개발을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퍼킨스 엔지니어와 검토하여 노이즈 실드 부착문제와 스태빌라이저 바를 추가해야 한다는 등 의 기술적인 자문을 받았다. 결국 디젤 포니 프로젝트는 취소되었지만, 덕분에 우리는 디젤엔진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었고, 이후 일본 메이커들보다 더 빨리 디젤 라인업을 갖출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외에도 수출을 하는 데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여러 군데 도사리고 있었다. 시험과정 중 헤드레스트의 높이가 규정에 어긋나는 것을 지적 받고 전문가의 도움으로 유권해석을 받기도 하였으며, EEC 시트 관련 시험 H-point를 맞추는데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트 쿠션과 시트 백 등 관련 시험을 하거나 자동차의 기준을 잡을 때 실내는 H포인트를 중심으로 한다. 그 범위에 더미를 앉혔을 때 문제가 생기면 안된다.) EEC규정에 합격이 되면 각 나라의 시험기관도 추가하고 승인넘버도 부여 받아 표시해야 했으며, EEC에 가입하지 않은 벨기에, 덴마크 그리고 노르웨이와 같은 몇몇 나라는 국가별로 다른 타입의 형식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받은 EEC 승인 마크와 넘버는 윈드실드 글래스와 포그램프와 같이 지정된 부품의 금형에 각인해서 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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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포니의 양산과 국내 출시 2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세계 4대 모터쇼 중 하나인 48회 제네바 국제 모터쇼 출품이 계획되었다. 스위스는 자동차회사는 없었지만, 제네바 모터쇼는 유럽의 모든 자동차 회사들이 그 해의 신차를 출품해서 겨루는 각축장이었다. 따라서 후발업체로서 제네바 모터쇼에 차량을 출품한다는 것은 매우 비중이 크면서도 위험도 따르는 일이었다. 우리는 상당한 긴장감으로 시트 컬러와 재질부터 출품 차량에 대한 사양을 하나하나 결정해야 했다. 출품할 차는 최종적으로 4대로 결정되었고, 색상은 블랙, 레드 각각 한대와 실버 두 대로 하기로 수출부서와 협의하여 결정하였다.

포니쿠페와 3도어 개발 (1977)
포니쿠페 미국 수출을 위한 규정을 숙지하다

포니쿠페의설계를자체적으로착수한것도1977년 4월이었다. 쿠페는 한국이나 유럽 보다는 미국시장을 노리고 진행한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초기에는 우리가 직접 설계하는 것으로 진행하였지만, 곧 설계를 위해 미국에서 전문가 3명을 영입하기로 결정하고 5월에 차례로 입국하였다. 이들과 함께 FMVSS 규정을 숙지하는 등 소위 US 수출 패키지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소요장비부터 시작하여 인원 및 교육방법, 시장성,교육, 예산, 규정의 개요 등을 파악하는 전반적인 업무가 시작된 것이다. 미국은 유럽은 물론 일본과도 법규가 달랐다. 그 중에서도 윈드실드 존 규정의 차이가 가장 컸는데, 스웨덴이 라미네이트를 사용하고, 오스트리아 등은 경화유리를 사용해야 했는데, 미국의 규정은 또 달랐던 것이다.

미국은 유럽과 안전 기준도 다르지만, 그 기준을 적용하는 방법 또한 달랐다. 유럽의 경우 수출하기 전에 모든 실험을 통해 그 기준에 맞출 경우 판매가 가능하지만, 미국은 그런 기준 없이 판매할 수가 있었다. 다만 사후 무작위 추출에 의해 기준에 적합하지 않으면 제재를 가한다. 그런 내용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 해 6월 우리는 이제 막 미국의 법규를 공부하기 시작한 시작단계에 불과 했는데 경영진은 벌써 미국 진출에 착수하는 엄청난 일이 시작된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결국 일을 하는 것은 우리였고 해결도 우리가 직접 나서서 해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부에서 영입한 전문가들은 한 두 가지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하였지만, 전체적인 문제의 파악 및 해결방법은 우리가 해야만 했으며, 그렇게 하면서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포니 쿠페에 대해 많은 부분을 수정하며 우리는 결국 이태리로 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탈디자인과 공문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1977년 9월 22일 저녁 우리는 다시 김포에서 이태리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이탈디자인과 포니의 개발을 함께 하기 위한 것이란 것엔 변함이 없었지만, 첫 방문과 다른 점도 있었다. 이번 일은 내가 팀장이 되어 포니의 가지치기 모델 쿠페와 3도어 모델의 개발을 위해 떠난 것이었다. 6개월 동안 유종철, 오광준, 홍동희과장, 박세봉대리와 함께 포니쿠페와 포니 3도어의 설계 도면을 만들어 나갔다. 포니 3도어는 포니 개발 당시 친분을 쌓아왔던 발테리에게 용역을 주었다. 그 당시 그는 이탈디자인으로부터 독립해 별도의 엔지니어링 회사를 설립하였고, 독일과 프랑스 업체들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용역을 맡겼으나, 이 일이 나중에 자그마한 문제의 소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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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디자인의 주지아로가 서울에 와서 자신 이외의곳에 용역을 왜 맡겼냐고 항의를 한 것이다. 이 일은 신사 협정을 어긴 실수를 인정한 정세영 사장 덕분에 부드럽게 마무리가 되었지만, 이후부터는 이탈리아 회사와 하는 모든 일들에 이탈디자인을 통하게 되었다. 약간의 삐걱거림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일로 인해 이탈디자인으로부터 빨리 독립하게 되고 이탈디자인과 현대자동차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해온 일본인 M씨와의 거북한 관계도 해결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이탈디자인에게 맡긴 엔지니어링 설계 용역은 두 번으로 끝나고 이후부터 이탈디자인은 스타일링 만을 맡게 되었다. 사실 이탈디자인은 현대자동차의 포니 프로젝트를 맡기 전까지는 뛰어난 엔지니어링부문의 역량을 갖고 있지 못했다. 포니 프로젝트를 맡으며 위상이 급격히 높아졌고, 많은 우수한 엔지니어들을 영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젝트가 끝나 외부 엔지니어들이 회사를 떠나자 회사의 역량은 다시금 축소되어 우리가 의뢰한 쿠페는 다시 외부 업체에 아웃소싱하는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1978년 3월 우리는 쿠페와 포니 3도어의 설계도면을 들고 귀국했다. 이탈리아에서 만든 프로토 타입과 바디인 화이트 (BIW)까지도 있었기에, 당장이라도 새로운 모델을 개발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무모하기 그지 없는 행동이었으나, 무에서 출발하여 맨 손으로 포니도 만들고 왜건과 픽업의 가지치기 모델까지 만들어 낸 우리들은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본사에서는 쿠페의 시장성에 대해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지나치게 진보한 스타일링이 시장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내수 시장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수출을 시작한 현대자동차의 입장에서는 수출시장에서의 시장성마저 불투명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결국 포니 3도어 모델만 1년 여의 개발 기간을 거쳐 1979년 출시되고,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금액인 81억 원을 투자한 포니 쿠페 작품은 역사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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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의 현대자동차의 경쟁력을 생각한다면 포니 쿠페를 추가로 개발해서 판매한다는 것 자체가 그야 말로 겁 없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무엇이든 필요하면 개발해야 했고, 또 그것이 가능하다는 분위기가 현대자동차 내에 가득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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