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오토뉴스

상단배너

  • 검색
  • 시승기검색

지상 최고 속도 기록의 역사 2

페이지 정보

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04-07-30 17:27:00

본문

지상 최고 속도 기록의 역사 2

2차 세계대전 후의 속도기록차는 땅 위를 나는 제트기. 그 속도는 음속의 벽을 뚫었다.
타이어가 회전해 달리는 가장 빠른 탈 것, 그것은 속도기록차. 단지 일념으로 최고속도만을 추구한 것이기 때문에 F1과 르망의 레이싱 머신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도 제트 추진력을 갖추게 되면 그것은 이미 자동차라고는 할 수 없는 몬스터다. 대전 후의 기록차는 항공기와 마찬가지로 엔진이 왕복운동에서 제트로 변화되어 초속 300m 이상, 시속 1,000km로 실로 엄청난 것이다.

제 2차대전(1939-1945년)후의 기록도전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그때까지 이루어졌던(성공을 거둔) 아주 야심적인 기록도전의 시도에 관해 살펴보자.
그것은 오펠의 로케트 자동차와 포르쉐박사의 손이 간 다이믈러 벤츠 T80 속도기록차다. 1927년 어느 날, 오스트레일리아의 맥스 배리어는 오펠사에 편지를 보내 로케트 자동차에 관한 연구를 제안했다. 오펠의 사장 프릿츠 폰 오펠은 흥미를 보였고 오래된 레이싱카를 개조해 6개의 로케트를 탑재해 실험을 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오펠은 더 새로운 실험차의 개발에 들어갔다.
섀시는 아주 낮고 보디는 포탄형으로 완전히 유선화되어 차체 뒤쪽에는 24개의 로케트가 장착되어 있었다.
RAK2(독일어로 로케트는 Rakette)라고 명명되어진 이 머신의 최대의 특징은 보디 양측의 윙으로 그것은 항공기의 날개를 상하 반대로 한 형태로 다운포스를 발생하는 것이 목적으로 조종석에서 그 각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60년대 전반 F1 GP 머신의 윙의 먼 선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28년 5월 23일 RAK2는 프리츠 폰 오펠의 조종으로 베를린 교외의 아뷔스 서키트에서 시험을 해 확실히 200km/h를 넘어 수초간이지만 당시의 속도기록(레이 키치 화이트 트리플랙스 334.024km/h)을 상당히 오버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실험이 목적했던 정식 계시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진위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게 되었다.
주행 중 윙의 각이 재대로 되지 않아 차체가 뜰 기미가 보였는데 양 손으로 핸들을 잡는 것이 힘이 들어 윙의 조절 레버에 손을 대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대담하기 짝이 없는 실험이었다.

꿈의 속도기록차 T80

1933년 1월 30일에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때 그 기본정책은 군비의 확충(1935년 3월 재군비 선언), 아우토반 건설, VW계획을 필두로 한 자동차정책 등 세 기둥를 네 세웠다.
그 즈음 아우토 유니온의 발군의 레이싱 드라비어, 한스 슈트웍은 속도기록에의 도전을 계획하고 포르쉐박사와 아우토 유니온사에 그 이야기를 타진했다. 포르쉐는 크게 고취되어 설계료 등에 관계 없이 승낙했다.
이러저러한 일을 겪은 후 속도기록차 T80의 개발은 착착 진행되었다. 포르쉐와 아우토우니온사와의 계약은 37년 끝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디의 개발은 에벨란 폰 에벨홀스트 교수가 담당하도록 되었다. 이 사람은 전후 아스톤 마틴사에서 스포츠 레이싱카 DB3S의 개발을 해 머지않아 르망에서의 우승을 이끌어낸(1959년) 뛰어난 자동차 기술자였다.
그 보디는 전혀 새로운 것으로 측면을 휠 아치의 위쪽까지 높이고 휠의 앞쪽, 그 중간, 그리고 뒤쪽에 정류판을 설계했다. 이런 정류판은 노면에 닿을 정도의 높이로 보디 아래쪽을 흐르는 공기는 휠의 사이에서 바깥으로 나오지 않고 뒤쪽으로 배출된다. 이 때문에 보디 하면에는 진공상태가 되어 차체를 노면에 붙이는 것 같은 효과를 냈다. 이런 방식은 대전 후의 GP머신(로터스) 등에 채용되었는데 T80이 그 선구자였다.
또 오펠의 RAK2와 같이 보디 양측에는 다운포스를 발생시키기 위한 윙도 설치되었고 그것은 실험 후에 날개형, 누름각이 결정되었다.
엔진은 다이믈러 벤츠사체의 항공기 엔진 DB603형(44.5리터, 거꾸로 선 V12형)으로 결정되고 포르쉐의 지도로 300마력이 발생하도록 되었다. 목표는 600km/h였는데 이론적으로는 400마일(645km/h)을 쉽게 넘을 수 있는 것이었다.
포르쉐는 미국의 보네빌에서 도전할 것을 주장했는데 히틀러는 기록은 독일의 국도에서 수립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데사우 근처의 전장 14.5km/h의 직선코스를 건설토록했다. 여기에서의 주행은 40년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39년 9월, 독일군은 포틀란드를 침공해 야심적인 T80계획은 그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꿈의 600km/h의 벽이 깨진 것은 전후인 47년 9월 16일, 존 코브 레일튼 스페셜에 의해서였다. 이것은 전전 마지막 기록을 수립했던 것과 똑 같은 멤버들이었다. 도달 속도는 633.803km/h.
제 1차 세계대전 후의 기록도전의 원동기의 주류가 항공 엔진으로 옮겨갔다는 것인 이미 이야기했다. 그리고 제 2차 대전 후의 항공기가 왕복운동에서 제트로 전환한 것처럼 기록도전도 코브 이후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가스터빈이 주력을 차지하게 되었다.
말콤 캠벨의 손자 도날드는 아이아호수(호주)에서 캠벨 노리스 블루버드 프로테우스 CN7에 타고 64년 7월 17일 634.920km/h로 코브를 근소한 차로 앞서는 기록을 수립했다.
전전은 영국이 대부분 독점하던 기록도전이었지만 무제한 클래스(차륜을 구동하지 않는)는 전후는 미국의 독무대가 되었다. 우선 등장한 것이 노만 크랙 브리드러브로 스피리트 오브 아메리카(제너럴 일렉트로닉 J47GE15 제트 추력 5,200파운드)로 657.114km/h의 기록을 세웠다. (63년 8월 5일 보네빌)
이어서 톰 그린은 더 윙포트 익스프레스(웨스틴 하우스 J46WE8 제트 추력 6,200파운드)로 668.027km/h를 마크했다.(64년 10월 5일)
그 다음으로 아더 유진 아폰스는 그린 몬스터(제너럴 일렉트릭 J79GE3A 추력 15,000파운드)로 699.029km/h로 700km/h의 벽에 육박했다.
이후 한동안 브리들라우와 아폰스의 두 사람은 번갈아 도전을 했는데 64년 10월 27일 아폰스는 그린 몬스터로 875.699km/h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65년에도 이 두사람은 두 번식 도전했는데 이 때 두 차의 원동기는 똑같은 제너럴 일렉트릭제혔다. 브리들라우는 그해 11월 15일 966.962km/h의 속도로 1,000km/h에 육박하는 기록을 수립해 두 사람의 경쟁은 끝이 보였다.
그리고 70년 10월 23일 게일리 가베리치는 RD 더 블루 프레임(RDHP LNG22,000V 로케트로(추력 13,000파운드) 1014.513km/h로 드디어 1,000km/h의 벽을 넘어섰다.
이미 이야기했던 것처럼 기록은 마하를 . 넘어섰는데 속도기록도전에는 남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호쾌한 매력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끝)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하단배너
우측배너(위)
우측배너(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