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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간 방대한 문헌과 사진자료를 토대로 자동차문화 전반에 관한 조사/연구/분석/저술/방송/강의를 통해 우리나라 자동차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전영선소장의 자동차 이야기 코너입니다.

6.25 한국전쟁과 지프

페이지 정보

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07-06-04 16:48:55

본문

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공산군이 전면 무력남침을 감행하자 이를 예기치 못했던 국군의 저지선은 일거에 무너졌다. 병력 및 각종 장비 및 병기의 열세로 순식간에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다. 당시 우리나라의 차량이 총 1만6천여 대. 그나마 대다수였던 트럭들은 전선으로 향했고 사람들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긴 고난의 피난길을 이고 지고 걸어가야 했다.

전세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우리의 생명이 풍전등화처럼 한 시간 앞을 가릴 수 없자 UN총회에서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 미국을 중심으로 16개 자유국가들로 구성된 UN군을 한국으로 급파했다. 맥아더장군을 선봉으로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은 전세를 곧 역전시켰다.

이때 맥아더장군을 태우고 인천으로 상륙한 2차대전 때의 MB형 지프가 속속 대량 투입, 북진작전은 물론 아군의 후방지원, 북한군의 퇴로 차단 등 처음부터 그 기민하고 막강한 기동력을 발휘 전세 만회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지프의 역할은 2차대전의 그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북으로 진격할수록 험준한 산악지형이 많아 지프의 효율을 둔화시켰다. 북한의 지형에서 지프는 직접적인 전투 개입보다는 전선과 후방의 연락 및 전선에 각종 기초군수품을 보급하는 수송과 통신수단으로 많이 이용됐다. 반면 후방에서는 교통수단 역할을 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 승리를 목전에 둔 1950년 말 수많은 중공군들이 소련제무기로 무장, 인해전술로 한만국경을 넘어 대거 침공해 왔다. 흥남철수와 51년 초의 1월 4일 후퇴는 다시 피난민의 대열이 꼬리를 이었다. 이때 지프는 유엔군과 피난민들을 철수시키는 작전에 투입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전선은 다시 남하해 38선 부근에서 1953년 6월 27일 휴전이 될 때까지 일진일퇴의 처참한 전투가 계속됐다. 북한의 깊숙한 산악지대를 벗어나 38선 전장은 지프의 활동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군수품보급은 물론 직접 전투에 참가 2차대전 이후 최대의 활약을 했다.

특히 통신방비를 갖춘 지프는 포병 및 아군의 전투기들이 북한군의 요새들을 정확히 포격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유도했다. 피난민 대열에 섞여 남하하거나 후방에 침투한 적의 간첩들을 재빨리 색출하고 소탕하는데 기민한 기동장비로서도 한몫을 했다. 산악전투에서 부상당한 장병들을 후방까지 신속히 수송하는 작은 앰뷸런스의 역할로 초를 다투는 생명의 구세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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