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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간 방대한 문헌과 사진자료를 토대로 자동차문화 전반에 관한 조사/연구/분석/저술/방송/강의를 통해 우리나라 자동차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전영선소장의 자동차 이야기 코너입니다.

미국의 자동차 역사 (7)

페이지 정보

글 : 전영선(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5-02-02 15:24:53

본문

● 듀리 자동차 개발은 시행착오의 연속 

 

1892년 3월 찰스 듀리는 동생 프랭크 듀리를 설득해 자동차 개발에 전념하기로 했다. 처음에 프랭크는 그 일이 떨떠름했다. 그러나 곧 일에 말려들어 혼심의 노력을 기울였다. 듀리 자동차 1호의 개발과정은 그야말로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우선 엔진이 아무리 시동을 걸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찰스가 카뷰레터?점화장치?머플러?스타터를 설계에 넣지 않았다는 것이 말썽이었다. 다음으로 1기통 2중 피스턴의 엔진설계가 문제였다. 스파그 플러그 역할을 하는 핫 튜브 점화장치 가열에 일반 알콜 램프를 사용했지만 고집 센 엔진은 재치기도 하지 않았다. 

 

돈이 모자라는 데다 거듭된 실패에 풀이 죽은 찰스는 다 팽개치고 1892년 9월 스프링필드를 떠나 일리노이주 피오리아로 갔다. 거기서 다시 자전거 개발에 손을 댔다. 그러나 동생 프랭크는 스프링필드 은행가인 어윈 마크햄의 자금 지원을 받아 자동아 개발을 계속했다. 찰스가 두고 간 마차에 엔진을 달아 보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찰스가 피오리아로 떠나버려 자동차를 만드는 일은 전적으로 마크햄의 돈과 프랭크의 기술과 집념에 달려 있었다. 

 

1892년 10월 초 안전 자전거 개발도 돈이 없어 계속할 수 없게 되자 프랭크는 다시 스프링 필드로 돌왔다. 동생이 매달려 애를 쓰던 듀리 1호차 제작에 다시 뛰어들었다. 

 

  

 

● 1893년 드디어 듀리1호 시운전에 성공

 

 오랫동안 속을 썩이던 엔진이 마침내 소리도 요란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1893년 2월초 1차 실내 시운전 준비가 끝났다. 프랭크는 천천히 움직이는 자동차 옆을 따라갔다. 아직 보디를 얹지 않은 상태라 조금 가다가 차를 세우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를 써도 구동벨트가 중립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미친 듯 기어를 작동시켜도 말을 듣지 않았다. 벽이 바로 앞에 다가왔고 금방이라도 충돌할 기세였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잡이를 놓고 리어 액슬을 잡아 올리자 엔진 속도가 늦어지면서 앞바퀴가 벽에 살짝 부딪치는 순간, 엔진이 멈췄다.’

 

프랭크는 새 엔진을 만들기로 했다. 

 

컨트롤 시스템 ?조향 장치?러닝 기어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다기 설계?제작해야 했다. 크랭크 핸들로 시동하기 위해 스타팅 기어를 설계했다. 새로운 향수병 카브레터 만들고 엔진을 식힐 워터 재킷을 덧붙였다. 엔진 스피드를 조절할 거버너를 손질했고 능률이 떨어지는 핫 튜브식 점화장치 대신 자신이 고안한 전기 점화장치를 설치했다. 그리고 사일렌서(머플러)를 새로 설계해서 달았다. 

 

보디에 사용할 섀시가 준비되었고, 클립으로 액슬과 결합했다. 시트 밑에 배터리와 스파크 코일을 넣을 박스를 달고 배터리와 엔진을 전선으로 이었다. 자동차는 시운전 준비를 마쳤다. 시운전 날은 1893년 9월 1일이었다. 프랭크가 가장 애 먹은 것이 캬부레터, 즉 연료 분사 장치였다. 구형 펌프식 분사기는 공기압의 수명이 짧아 운행 도중 자주자주 펌프질을 해야 하는 번거러움 뿐만 아니라 연료 과소비로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인 카뷰레터를 발명할까 고심하던 어느 날 아침 아내가 외출하기 위해 얼마 전 파리에 갔다가 선물로 사다 준 프랑스제 향수병을 들고 얼굴에다 분무하는 것을 보고 오늘날 공기분무식 카뷰레터를 듀리가 세계 최초로 발명하여 특허까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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