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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간 방대한 문헌과 사진자료를 토대로 자동차문화 전반에 관한 조사/연구/분석/저술/방송/강의를 통해 우리나라 자동차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전영선소장의 자동차 이야기 코너입니다.

미국 자동차 역사 - 포드 자동차 (2)

페이지 정보

글 : 전영선(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6-02-10 15:58:51

본문

헨리 포드의 혼성주주식 합자회사 운영은 자본가, 회계사, 기계 기술자, 공장 소유자, 제조기계 시설 소유자, 은행가, 법률가 등 각 전문분야별 무형 유형 자산가들을 주주로 영입하여 갖고 있는 각자의 가치에 따라 주를 분배해 주고 그에 대한 이윤을 회사의 영업실적에 따라 나누어주는 방법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합자식 기업경영의 기초인 셈이다.
 
한 예로 포드회사 설립 때 현금 2천500달러를 투자한 어느 상원의원은 그로부터 19년 후 3천만 달러의 거액을 주식배당으로 받았다. 또 미국의 유명한 다지(Dodge)자동차를 창업한 다지 형제는 포드차의 엔진을 만들어 주는 대가로 포드사 이익의 10%를 받기로 한 조건에 따라 1919년에는 자그만치 2천500만달러의 이익을 배당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헨리는 거대한 자본을 들여 공장을 짓거나 시설을 하지 않고 처음에는 남의 기술과 돈 그리고 공장과 기계시설들을 이용해 2실린더 8마력 엔진의 첫차 모델A와 모델B, 모델K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포드자동차의 출범은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포드는 듯밖에도 ‘특허자동차제조업자협회(A.L.A.M)'로부터 특허권 침해라는 소송을 당했다. 1877년 뉴욕 로체스터의 특허 사기꾼인 변호사 죠지 셀든(George B Selden)은 다른 사람이 발명한 엔진을 도용하여 내연기관으로 달리는 차에 관한 특허권을 가지고 있었다. 셀든은 실제로 자동차 제작자는 아니었으나 그의 허락이 없이는 누구도 자동차를 만들 수 없다고 주장했다. 헨리 포드도 셀든의 특허에 걸려들었으나 특허 사용료 지불을 거부했다.
소송을 당한 것은 포드뿐만 아니라 여러 회사가 있었다. 1909년 9월 뉴욕 남부 연방재판소는 셀든의 특허에 승소 판결을 내렸다. 헨리 포드는 합중국 최고재판소에 까지 가서 싸우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1911년 1월 최고재판소는 ‘셀든의 특허는 인정되나 포드사를 비롯한 각 자동차 제조업자의 제조 자동차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라는 판결로 포드 등 피소 업체들의 승소로 끝났다. 그 이유는 셀든의 특허권에는 2행정 엔진인데 포드의 엔진은 4행정이기 때문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미 포드보다 먼저 생겨난 올즈모빌, 맥스웰, 윈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창업한 뷰익, 캐딜락들을 포함 50여개의 크고 작은 작은 자동차회사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동차는 부자나 귀족들의 놀이 감이나 신분과시용으로 애용되어 왔기 때문에 자동차값이 매우 비싸서 대중화 되지 못했다. 경쟁자를 이기는 길은 자동차를 서민들이 생활에 이용할 수 잇도록 값이 싸고 실용적인 차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헨리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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