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의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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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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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12-08 02:1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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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고유모델이었던 포니의 차체 디자인은 이탈리아의 이탈디자인(ITAL DESIGN)에서 1974년 2월에 완료되었고, 우리나라에서 판매되기 시작한 것은 1976년 2월부터이다. 조형적인 측면에서 포니는 그 당시 국제적인 자동차 디자인의 흐름에서도 한 획을 긋는 조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차체 전체적으로 간결한 기하학적인 조형요소로써 높은 통일성을 가지면서도 장식적인 요소가 배제된 추상성(抽象性)이 높은 디자인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포니의 개발에 앞서서 이탈디자인은 포니의 차체 디자인을 주제로 한 컨셉트 카 포니 쿠페를 이탈리아에서 열린 토리노 모터쇼에 발표한다. 이 차량은 포니의 기하학적인 디자인조형을 더욱 강조한 모델로써, 비록 시판되지는 않았지만, 포니의 디자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포니의 차체 디자인은 전문적인 용어로 이야기하면 패스트 백(fast back)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뒤 트렁크 부분이 뒤 유리창과 동일한 경사로 만들어져 있어서 빠르게(fast) 흐르는 선을 가진 뒷부분(back)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트렁크 뚜껑은 뒷 유리창과 분리된 구조로 되어 있어서 별도로 열리는 구조이다. 즉 뒤쪽이 크게 경사진 패스트 백(fast back) 형태이고, 네 개의 문을 가지고 있으며, 승객실과 트렁크 공간이 분리된 3박스(box) 구조, 즉 세단(sedan)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대부분의 패스트 백 형태의 차들은 객실과 트렁크가 연결된 2박스(box) 구조에, 커다란 테일 게이트(tail gate)가 있는 해치 백(hatch back)구조인데, 포니는 그러한 유형이 아닌 매우 특이한 구조와 형태였던 것이다. 물론 포니는 이후에 스테이션 웨곤(station wagon)과 픽업(pick-up), 그리고 1980년 4월에는 3도어 해치백모델도 개발되었다. 그리고 1982년에 페이스 리프트(face lift), 즉 차체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크게 바꾸고 개선한 모델로 나온 포니2는 트렁크 뚜껑과 뒤 유리가 일체로 되어 있어서 전체가 하나로 열리는 구조의 해치백(hatch back) 구조가 되었다. 포니는 1982년에 포니2가 나오기까지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거의 동일한 형태로 생산되었다. 그 당시의 포니는 단지 소형 승용차가 아니라, ‘자가용’으로써의 의미가 절대적이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운전기사를 따로 두고 타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며, 차체의 장식품도 보수적인 이미지로 마무리한 경우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차체의 지붕 부분을 검은색 인조 가죽(비닐 레자 라고 불렸다)으로 씌우고 클래식한 이미지의 휠 커버를 씌우는 등의 부가적인 치장으로 포니는 소형 승용차가 아닌, 마치 미국의 캐딜락(Cadillac) 류의 고급 승용차와 비슷한 클래식한 이미지를 가지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차체 지붕을 이와 같이 인조가죽을 씌우는 것은 과거에는 고급 승용차들이 대부분 개폐식 지붕을 가진 무개차(無蓋車)였기 때문에, 고급 승용차처럼 보이기 위해 마치 무개차인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내는 장식기법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우리나라에서 인조가죽을 지붕에 씌워 장식을 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 처럼 성행하기도 했다. 본래의 포니의 이미지는 깔끔하고 단순한 조형요소에 의해 마무리된 모던한 감각의 차량이지만, 이렇게 지붕에 가죽을 덧대는 작업을 통해서 품위(?)있는 고급 승용차와 같은 이미지도 풍기게 되었던 것이다. 포니는 한국 사회에서 단순한 소형 승용차가 아니었다.이제 포니 이후 36년이 흘렀고,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세계 5위에 올라 있다. 우리의 독자적인 디자인과 기술로 차량을 개발해 세계 시장에 수출하고 있으며, 1,000cc 배기량의 경승용차에서부터 5,000cc의 대형 고급 리무진 승용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국산 승용차들이 국내외 시장에서 팔리고 있고, 수입차의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이처럼 괄목상대(刮目相對)의 발전을 이룬 것은 바로 고유모델 ‘포니’, 아니 자가용 ‘포니’에 대한 열정을 가졌던 수많은 한국인들의 ‘로망’이 바탕에 있었던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