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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 교수는 기아자동차 디자인실에서 크레도스 책임디자이너를 역임했으며 기아자동차 북미디자인연구소 선임디자이너를 지내기도 한 자동차디자인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자동차 전문 디자이너입니다. 현재는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구상교수의 자동차 디자인 이야기는 독자여러분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것입니다.

역사 속에 가려진 메이커 타트라의 디자인 변화

페이지 정보

글 : 구상(koosang@hongik.ac.kr)
승인 2016-11-28 07:13:35

본문

‘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이다’ 라는 말이 있다. 5000 년 인류 역사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것들이 역사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사건들 중 상당수(?)는 기록자의 판단에 따라 아주 간략하게 기록되거나, 전혀 기록되지 않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지 기록자의 잘못이 아니라,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체가 되지 못해서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경우도 많다. 그리고 자동차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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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역사에서는 제대로 발전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걸작이 될 뻔했던’ 비운의 차들이 적지 않다. 그 차들은 독특한 철학과 기술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무대의 전면에 서지 못했던 것이다. 21세기에서 벌써 13년이나 지난 지금, 세계는 첨단 디지털 기술로 5000년의 역사 전체보다도 큰 변화를 맞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자동차가 처음 발명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도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 시기의 지구촌은 봉건주의 체계에서 자본주의 경제원리로의 변화가 일어나는 몸살을 앓고 있던 때 였다. 오늘날을 움직이는 경제원리는 자본주의(資本主義)이지만, 19세기에서 20세기로 이어지던 이 시기에 자본주의 대신 공산주의(共産主義)의 길을 택한 국가들이 있었고, 그들 중 하나가 바로 체코슬로바키아이었다. 물론 체코슬로바키아도 1993년 1월 1일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개의 공화국으로 분리, 독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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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잠시 다른 데로 갔지만, 오늘 필자는 체코의 자동차 메이커였던 타트라(Tatra)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은 타트라(Tatra) 역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회사이다. 타트라를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사람이 바로 오스트리아 출신 엔지니어 한스 레드빈카(Hans Ledwinka; 1878~1967)이다. 그는 초기에는 타트라의 전신(前身)인 마차 제작사 네셀도르프 바겐바우(Nesselsdorf Wagenbau)에서 일하며, 1897년에 개발된 네셀도르프 최초의 자동차 프라지던트(Prasident)의 개발에도 참여한다. 그런데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오스트리아의 무기 메이커인 스티어(Steyr)에서 설계자로 일을 하게 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네셀도르프의 수석디자이너로 복귀하게 된다. 이어 1923년에 네셀도르프는 회사이름 을 자동차의 브레이크 성능을 시험하던 슬로바키아 지역의 산 이름 타트라(Tatra Mountains)를 써서 「타트라」로 바꾸고 자동차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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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에 나온 소형차 T11(일명 타트라 플란;Tatra Plan)을 비롯하여 12, 17 등의 모델을 거쳐 T57과 T80을 거쳐, 1935년에는 한스 레드빈카가 설계자로써의 독창성을 발휘하기 시작한 T77을 내놓고, 1939년에는 T87을 내놓는다. T77은 V형 8기통 3,400cc의 공냉식 엔진을 차체 뒤에 설치했는데, 이로 인해 이 시기의 차량들의 대표적 특징이었던 전면의 커다란 라디에이터 그릴이 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레드빈카는 부피가 큰 엔진을 뒤로 보내 객실과 완전히 격리시키는 것이 실내를 더욱 조용히 하는 것은 물론, 엔진 작동시의 기름냄새가 승객들에게까지 오지 못하도록 하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차체의 앞부분 형태를 둥글게 만들 수 있게 되어, 유선형 디자인에도 장점으로 작용했으며, 앞쪽에 있는 엔진과 변속기에서 뒷바퀴에 동력을 전달하는 추진축(propeller shaft)이 없어짐에 따라 바닥도 평평하게 되어 실내공간도 넓어졌고, 차체 아랫부분 역시 평평하게 만들어져 공기저항계수를 낮추 역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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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체의 뒷부분에는 엔진 냉각을 위한 공기 흡입구와 상어 지느러미를 연상시키는 핀(fin)이 달린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T77이나 87은 이 시기의 다른 ‘유선형’ 차들이 겉모양만 유선형이었던 것과는 달리, 공기역학적 측면에서의 실질적인 장점이 있었다. 그런데 T77의 유리창은 모두 평면유리들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 시기에는 아직 유리를 구부려 성형하는 기술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자동차들이 곡면유리를 장착하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인 1950년대 중․후반부터이다. 평면유리창과 유선형 차체의 형태가 조화되지 않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T87까지도 앞 유리는 여러 장으로 나누어져 조립되어 있다. 1951년에 타트라 플란은 슈코다(Skoda)로 옮겨져 생산되었다. 이후 변형된 모델의 생산이 이루어졌으나, 사회주의 국가 체제에서 타트라는 점점 시대에 뒤진 차로 전락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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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 들어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 공산당 지도부를 위한 고급승용차를 만들기 위해 T613 이라고 명명된 새 차가 이탈리아의 카로체리아에 디자인을 맡겨 개발되었다. 613 모델은 1973년부터 생산이 시작되었고, 이후 613-2, 613-3 등의 변형 모델을 추가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타트라의 연간 생산량이 1,000~1,500 대에 이르는 등 613 모델은 전성기를 맞았으나, 체코의 민주화 이후 생산량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타트라는 1996년에 V형 8기통 3,495cc의 배기량의 엔진에 완전한 주문생산 체제에 의한 고급화 된 T700을 선보였지만, 1998년까지 고작 일곱 대가 팔렸고, 이후 공장은 문을 닫는다. 역사의 주류에 서지 못해서, 한스 레드빈카와 같은 천재적인 엔지니어에 의한 독특한 구조와 스타일의 차를 만들었지만 쇠락과 번영의 길을 바꾸어 걷다가 마침내 문을 닫고 만 타트라는, 우리에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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