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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페라리 맨이 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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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4-04-26 08:24:06

본문

페라리는 전 세계에 가장 잘 알려진 팀이다. BMW와 메르세데스-벤츠의 고향인 독일뿐 아니라 세계 모든 레이스 트랙에서 페라리는 어느 팀보다도 많은 깃발을 자랑한다. 관중석은 빨간색과 노란색의 바다를 이룬다. 따라서 페라리가 F1을 그만둔다면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우상을 잃게 되고, 더는 레이스를 보지 않을 것이다.

붉은색 머신의 카리스마는 엔초 페라리와 페라리 팀의 역사로부터 뿜어져 나온다. 엔초 페라리에게 로드카는 뒤늦게 시작한 사업이었다. 그는 1929년 알파로메오를 대표해 레이싱에 출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설립했다. 자동차 생산은 1940년대 후반에 자신의 팀을 만들었을 때 레이싱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 같은 레이싱 역사가 오늘날 페라리가 지닌 신비함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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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는 월드 챔피언십이 시작된 1950년부터 F1에서 레이스를 시작해왔고, 맥라렌과 윌리엄즈 팀의 수장인 브루스 맥라렌과 프랭크 윌리엄즈가 아직 유년기를 벗어나지 못했던 1952년에 이미 알베르토 아스카리와 함께 첫 월드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팀은 1950년부터 지금까지 F1에서 16회 컨스트럭터즈 타이틀과 15회 드라이버즈 타이틀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2009년 시즌부터 레드불 팀에 의해 2인자로 밀렸지만 늘 우승후보로 꼽히고 있다.

F1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드라이버로 꼽히는 사람 중 A. 아스카리, J.M. 판지오, N. 라우다, J. 빌르너브, A. 프로스트, N. 만셀, M. 슈마허 등 많은 이들이 페라리의 프랜싱 호스 심볼을 달고 레이스를 했고, 이들은 모두 페라리 팀의 카리스마와 열정에 이끌렸다. 이 때문에 페라리 출신 드라이버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아르헨티나 출신 호세 프로일란 곤잘레스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페라리에서의 첫 경기는 1951년 랭스에서 열린 프랑스 그랑프리였다. 하지만 당시엔 계약을 체결하기 전이어서 A. 아스카리에게 머신을 넘겨야 했다. 이후 영국 실버스톤 레이스를 2주 앞두고 계약을 맺었다. 1951년 영국 그랑프리는 페라리와 곤잘레스 모두에게 중요한 경주였다. 바로 알파로메오라는 무시무시한 적수를 제치고 페라리의 F1 역사에서 위대한 첫 승리를 거둔 대회이기 때문이다. 이후 마세라티, 반월 등을 오가며 활동했지만 1960년 은퇴 시즌엔 붉은 머신과 함께 할 정도로 곤잘레스의 페라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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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맹활약한 재키 아이크스도 엔초 페라리를 위해 일한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그는 5년 동안 페라리에서 지냈다. 당시에 페라리는 기복이 심했고, 경주차 성능도 일정하지 않아 지금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크스는 페라리에서 일한 것에 만족했다. 결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벨기에 출신 아이크스는 인간관계를 중요시 했는데 페라리 드라이버 시절에 이태리인들과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이태리인들은 정이 많았으며 감정이 풍부했고 아주 유쾌한 사람들이었다”고 회고했다.

1996년부터 2006년까지 활동한 ‘F1 황제’ 미하엘 슈마허도 페라리에서 많은 친구를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독일 출신 슈마허는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열어주었고 그들과 감정을 공유하며 아주 특별한 임무를 완수해나갔다”고 말했다.

페라리에서의 경험이 인생에 있어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드라이버도 있다. 1985∼86년 페라리 맨으로 활동한 스웨덴 출신 스테판 요한슨이 대표적인 드라이버다. 사실 요한슨은 페라리에서 뛸 준비가 되지 않았다. F1에서 한 시즌도 채 경험하지 못한 상태여서 최강 팀 페라리의 러브콜은 너무 과분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입단 후 그가 보인 레이스 우승에 대한 집념은 대단해 몇몇 대회에서 우승할 수도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특히 요한슨은 1985년 시즌 이몰라에서 펼쳐진 산마리노 그랑프리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가 선두를 달리고 있을 때 관중은 흥분했고, 그들의 큰 함성으로 인해 머신의 엔진소리조차 들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3랩을 남겨두고 연료가 바닥나버려 요한슨은 끝내 고개를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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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에 몸담는 일은 소속팀 드라이버들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이태리 현지 언론은 물론 전세계 미디어가 지켜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론과 순조롭지 못하다면 삶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처럼 페라리 소속이라면 끊임없이 검증을 받게 된다.
아울러 미스터 페라리와의 협상도 상당히 힘들어 했다. 1970년대에 활동한 니키 라우다의 일화는 유명하다. 라우다는 1974년에 페라리로 가면서 받은 연봉은 약 3만 달러였다. 당시 로니 피터슨이 가장 많은 연봉을 받았는데 10만 달러였다. 그래서 라우다는 페라리가 1975년 희망 연봉을 물어왔을 때 피터슨과 같은 금액을 원한다고 답했다. 페라리는 라우다에게 뻔뻔하다고 소리치며 결코 그렇게 해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페라리는 결국 그만큼의 연봉을 지불했고, 그 같은 싸움은 계속되었다. 1977년 시즌 중반, 페라리는 라우다에게 이듬해 연봉에 대해 다시 물었다. 라우다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한 뒤 페라리에서 나와 버니 에클레스톤의 브라밤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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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탐베이도 엔초 페라리의 제안을 거절해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는 1977년 말에 페라리로 갔어야 했다. 당시 페라리의 영입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탐베이는 맥라렌을 선택했다. 1982년, 질 빌르너브 죽음 이후 두 번째 기회가 왔다. 설상가상으로 일어난 피로니의 사고는 팀의 사기를 크게 떨어트렸다. 그러나 모든 팀원이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페라리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으로 뭉쳐 움직였다. 가족을 잃은 듯한 슬픔과 쓸쓸함, 그리움이 계속되었지만 레이스에 전념하면서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해 컨스트럭터즈 타이틀을 따냈다.

물론 F1 내에서는 페라리에 대한 의견이 극명하게 갈린다. 포뮬러 원 매니지먼트(FOM) 수장인 버니 에클레스톤은 페라리 팀의 전 세계적인 인기를 인정하는데, 결과적으로 이러한 인기가 F1이 벌어들이는 수익 중 큰 몫을 좌우한다. 그 점이 다른 드라이버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들에게 페라리는 그저 또 하나의 라이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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