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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아일톤 세나 사망 20주년을 맞이하며

페이지 정보

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4-04-29 18:07:46

본문

5월 1일은 아직도 전세계 팬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레이싱의 신화인 아일톤 세나가 사망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세나의 본명은 아일톤 세나 다 실바다. 세나는 1983년 5월 영국 실버스톤 F3 레이스를 앞두고 영국 기자 몇 명을 모아 놓고 “오늘부터 나를 어머니의 성을 따라 아일톤 세나라 불러 달라”고 주문했다. 명사인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겠다는 독립선언이었다.

아일톤은 1960년 3월 21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부유한 기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밀톤 다 실바는 아들을 브라질 최고의 명문중고교 리오 프랑코에 입학시켜 인텔리 기업가로 키우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4살 때 선사한 카트가 세나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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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는 준수한 외모의 과묵성실하고 성적도 뛰어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여가만 있으면 카트를 몰고 차체를 샅샅이 뜯어 조립하는 자동차광이었다. 1973년 13세 때 공식 카트 레이스에 첫 출전해 당당히 우승했다. 무대는 브라질 F1 그랑프리의 현장 인테르라고스 서킷.

그 뒤 포뮬러 포드1600(1981년)을 기점으로 고속 레이스에 뛰어들었고 F3(1982년)를 거쳐 84년 모터스포츠의 정상 F1에 진입했다. 처녀출전 이후 승승장구하던 세나는 88년 마침내 맥라렌팀 드라이버로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이어 90, 91년 정상에 오름으로써 34세에 이미 챔피언 등록 역대 3위의 위업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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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는 92년 윌리엄즈팀의 N. 만셀에게 왕좌를 빼앗긴 뒤 93년에는 4승을 거두면서 경쟁자인 윌리엄즈팀 A. 프로스트에 우승을 넘겨주었다. 프로스트가 은퇴를 선언하자 맥라렌팀을 떠나 윌리엄즈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성능 좋은 르노 경주차가 마음에 들어 이적했다는 후문이다.

이 때문에 세나에게는 94년이 92, 93년의 슬럼프에서 탈출하는 재기의 한해였다. 그러나 조국 브라질의 인테르라고스에서 열린 개막전에서 그는 52주째 스핀으로 리타이어 했고 제2전 일본 그랑프리에서는 8초 만에 M. 하키넨의 추돌로 경기를 포기했다. 전 세계 모터스포츠 전문가와 팬들은 프로스트가 은퇴한 F1이 세나의 독무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당시 신예였던 베네톤팀의 미하엘 슈마허가 잇따라 우승하고 세나는 시즌 1, 2전에서 모두 리타이어 했다. 따라서 세나 팬들은 어느 때보다도 3전인 산마리노 그랑프리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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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운명의 결선일인 5월 1일이 왔다. 산마리노 이몰라 서킷에서 65회째 폴포지션에 선 세나는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다. 7주째 홈 직선로를 질주한 세나의 윌리엄즈 FW16 경주차는 탐브렐로 커브에 들어섰다. 그 순간 서킷을 흔든 충돌의 굉음과 전세계 5억 관중의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코너에서 시속 300km로 직진한 FW16 경주차는 콘크리트 장벽을 들이받고 빌르너브 커브를 향해 몇 번 뒹굴다가 파편을 흩날리며 멈춰 섰다.

급히 달려간 구급대원들은 세나를 경주차에서 끌어내 레이싱복을 벗긴 다음 들 것에 실었고 헬기가 그를 볼로냐 마조레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그날 오후 6시45분경 F1의 영웅 세나는 34살로 짧은 생애의 막을 내렸다. 프랑코 브라질 대통령은 유해 운반에 전용기를 제공했고, 그의 부모에게 조의를 표했다. 세나의 유해는 브라질 공군기의 영접을 받으며 상파울루공항에 도착해 수십만 군중의 호위를 받으며 의사당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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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5월 5일, 국장의 성대한 의식을 마치고 브라질 국민의 애도 속에 세나의 유해는 상파울루 모른비 묘지에 묻혔다. 프로스트를 비롯한 레이서의 운구대열에 최후의 라이벌이었던 슈마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일톤 세나 다 실바 1960년 3월 21일∼1994년 5월 1일, 하느님의 사랑이 영원히 이 몸에 내릴지어다’라고 묘비명은 적고 있다. 브라질 국민과 팬들의 애도 속에 장례식이 치러졌던 그날 상파울루 교외에 사는 16세 소녀는 세나 곁에 묻어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자살 했다.

그럼 이몰라 비극의 원인은 무엇인가? 사고 3일 뒤 영국의 BBC 라디오는 충격적인 뉴스를 전파에 실었다. 그것은 윌리엄즈 르노팀의 기술감독 패트릭 헤드의 논평이었다. “경주차의 자료를 분석해 보았지만 그 순간 아무 이상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세나의 운전실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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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즈의 해명은 더욱 불길한 의혹을 부채질했다. 바로 자살설이다. 레이스를 목격한 어느 평론가는 “세나의 스타트 전 모습은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인간의 자태였다”고 자살설에 한몫 거들었다. 또한 결승 전날 밤 포르투갈에 있던 연인 아드리아나와의 전화통화 내용도 이를 뒷받침한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 3전에 출전하기 싫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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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의 규칙변경에서 비극의 원인을 찾는 전문가들도 있다. 역사적으로 경기규칙이 크게 바뀔 때마다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세계자동차연맹(FIA)은 1993년 액티브 서스펜션, AIBS, AT, 전자액셀 사용을 금지했다. 전반적으로 경주차의 하이테크화를 막고 팀간의 격차를 줄여 레이스에 재미를 더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레이스는 윌리엄즈와 베네톤팀의 대결로 압축되었고 구식으로 퇴화한 경주차는 조종하기 어려운 괴물이 되었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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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50년 F1이 처음 시작된 이래 지금껏 경기도중 목숨을 잃은 드라이버는 자그마치 69명에 이른다. F1 첫 희생자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오노프레 마리몬이었다. 1954년 제6전인 독일 그랑프리에서 경주차 트러블로 코스아웃한 그는 충돌로 밀려들어온 스티어링 휠에 가슴을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사고는 계속되어 50년에만 21명, 60년대 27명, 70년대 12명 등이 희생되었다. 1980년대 들어와 안전규정이 강화되고 첨단기술이 도입되면서 처음 한자리 수인 7명으로 사망자가 줄었고, 90년대 들어서는 사망사고가 전혀 없다가 1994년 FIA가 하이테크놀러지를 금지한 후 세나를 포함한 2명이 사망했다. 전세계인에게 안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 것만으로도 세나의 사망은 너무나 값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F1에서의 세나가 마지막 희생자이기를 빌어본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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