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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팬들을 웃기고 울린, 모터스포츠 악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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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4-09-25 10:40:08

본문

시속 320km, 굉음을 뿜어내는 스피드에 짜릿한 코너링을 구사한 뒤 피니시 체커기를 받는 드라이버 모두 스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모터스포츠 팬들을 환호하게 만드는 요소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미숙한 언행은 물론 우발적인 행동을 선보이는 스타들도 관중들의 재미를 끌어 올린다. 이른바 악동 스타들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스코틀랜드 출신의 아네스 아일랜드다. 수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아일랜드는 술을 정말 많이 마셨고. 넘치는 사교성 탓에 정작 드라이버로서의 천부적 재능을 발휘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1960년에 그는 논챔피언십 F1 경주에서 S. 모스를 2번이나 이겨 언론의 주목을 한 몸에 받기도 했지만 이미 모스가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성기의 아일랜드는 틀림없는 일류 드라이버였다.
그는 1961년 미국에서 자신의 로터스21로 화려한 드라이빙을 선보이며 팀의 첫 그랑프리 우승을 기록했고. 같은 해에 독일 슈투트가르트 근교의 까다로운 솔리튜드 서킷에서도 우승했다. 그러나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은 그가 경주차에서 내린 후에 벌어졌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우승한 뒤. 너무나도 심하게 취한 나머지 호텔 지붕으로 올라갔고. 허공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고 한다. 게다가 영업이 끝난 바에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듯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2주 후에 열릴 예정이었던 독일 그랑프리 주최 측은 아일랜드를 실격처리하려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다. 아일랜드의 로터스는 레이스 도중 불길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는 살아남았다. 그해 5월에는 모나코 터널을 빠져나오다가 변속 실수로 트랙에 내던져지기도 했지만 그때도 운 좋게 목숨을 건졌다. 아일랜드는 영국 런던의 세인트 토머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병실에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빈 술병과 넘치는 재떨이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1976년 중반부터 18개월에 걸쳐 전성기를 누린 J. 헌트도 숱한 화제를 뿌리며 F1 정상을 밟았다. 헌트는 헤스케스 경 소유의 헤스케스 레이싱팀과 함께 F1에 발을 들였다. 1970년대 초반에 몇 시즌을 치르는 동안 헌트는 영국의 떠오르는 별이었다.

충동적이고 본능적이었던 그는 F3에 갓 입문한 시절부터 언론에 오르곤 했다. 크리스털 팰리스에서 그의 로터스가 D. 모건의 마치와 충돌했던 1971년 여름에 헌트는 경주차에서 뛰어내려 라이벌에게 달려들었다. 6년 후. F1 캐나다 그랑프리에선 다른 경주차를 추월하다가 스핀하며 코스를 벗어나자 자신을 도우려고 다가온 트랙사이드 마샬에게 주먹질을 하기도 했다.

1976년. 맥라렌과 함께 F1의 선두 대열로 들어섰을 때 헌트는 타이틀 스폰서 말보로에게 ‘공식행사장에 정장 재킷을 입고 참석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통보한 뒤 맨발과 티셔츠로 행사장에 나타났다. 이 때문에 말보로 스폰서십 보스였던 존 호건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헌트가 의식적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1976년 프랑스 그랑프리가 열리기 직전인 금요일에 그는 푸아그라를 배부를 정도로 먹고 주말 내내 소화불량으로 시달렸다. 포디엄에서는 구토를 겨우 참았을 정도다.

그러나 헌트는 맥라렌의 경쟁력 저하에는 대응하지 못 했다. 1978년 여름에 그는 영국 그랑프리가 열린 브랜즈 해치 서킷 보텀 스트레이트에서 민망할 정도로 일찍 스핀을 하고 말았다. 경주차에 다시 오르기 전에 구토를 했고 10분 뒤에 완전히 망가진 모습으로 콕핏에서 나왔다. 이를 지켜본 수많은 사람들은 헌트가 약물에 취해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후 헌트는 서서히 파멸의 끝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1년 만에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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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피케도 빼놓을 수 없다. 대표적인 사건은 B. 에클레스톤의 브라밤팀에 소속되어 있던 1982년 독일 그랑프리에서 일어났다. 칠레 출신 E. 살라자르의 ATS를 추월하기 위해 따라붙던 피케는 자신보다 훨씬 느린 그를 앞질렀지만, 추월이 깔끔하지 못했던 탓에 둘은 충돌한 채 서킷 한가운데 멈춰 서고 말았다.

두 드라이버 모두 다친 곳은 없었지만, 피케는 차에서 내려 킥복싱을 하듯 위협적으로 달려들었고, 그러는 동안 살라자르는 헬멧을 벗지 않았다. 피케의 다혈질인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다소 지나친 행동을 하고 말았다.

마이크에게도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72년 가을에 마이크는 브라질 상파울루의 인터라고스 서킷에서 3회 연속으로 레이스를 치르는 F2 토네이오 시리즈에 참가했다가 사슴 같은 눈을 가진 한 여성과 눈이 맞아 3~4일간 어디론가 사라졌다. 며칠 후 마이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며 레이스가 시작되기 1시간 전에 서킷으로 돌아왔고 멋지게 우승했다. 그리고는 피트월 끝에서 말 그대로 알코올에 찌든 오버롤을 쥐어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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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에 A. 프로스트를 제치고 A. 세나의 세컨드 드라이버로 맥라렌-혼다에서 활동함 G. 베르거도 빼놓을 수 없는 드라이버다. 베르거는 서킷 밖에서 사교적인 드라이버로 명성을 날렸지만 그가 저지른 말썽의 대부분은 맥라렌 시절 세나를 향한 것이었다. 서킷에서는 세나가 우세했을지 모르지만 오스트리아 출신의 베르거는 세나에게 끊임없이 무자비한 장난을 쳤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아르헨티나를 방문하기 위해 세관에 도착한 세나가 여권을 넘겼을 때 자신의 여권사진이 벌거벗은 엉덩이사진으로 바뀐 것을 발견했던 일이다.

베르거는 그 후로도 짖궂은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이태리 몬자 서킷의 패독에서 함께 출발하며 그는 세나의 가방을 문 밖으로 던졌다. 강풍이 불던 벨기에 스파프랑코르샹 서킷에서 베르거는 세나의 스케줄 노트의 스프링을 풀어 내지들을 모두 바람에 날려 보내기도 했다. 세나는 베르거의 호텔방 열쇠를 받아 목욕탕을 물로 채운 뒤 그의 옷을 모두 적시는 방법으로 복수했다. 다음날 아침 세나는 그의 팀동료가 짜증부릴 것을 기대했지만 베르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이 일로 오히려 세나는 불같이 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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