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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해밀턴의 ‘F1 황제’ 등극 어떻게 이루어졌나

페이지 정보

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4-11-25 09: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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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레이서 루이스 해밀턴이 6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스포츠인 F1 정상에 복귀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빼어난 외모와 정교한 테크닉으로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와도 자주 비교되는 루이스의 F1 황제 등극은 결코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는 미국인들이 소위 말하는 ‘아프로 카르비안(Afro-Caribbean, 아프리카계-케리비언 혼혈)인’이다. 그의 친할아버지가 1950년대 중반 카리브에 위치한 그레나다에서 이민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는 영국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영국인이다. 루이스의 아버지 안토니는 1960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안토니는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아 영국 철도국에서 근무했으며 영국 여자와 결혼해 2명의 아들을 가졌다. 첫째가 루이스로 1985년 태어났고 미국 육상선수였던 칼 루이스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그래서일까. 루이스 해밀턴은 칼 루이스처럼 빠른 스피드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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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루이스는 걷기 시작할 때부터 몸동작과 균형이 또래 아이들보다 탁월했다. 6살 때 어린이 TV 프로그램에서 주최한 RC카 레이스에서 20살 위의 어른들과 겨뤄 그들을 이겼다. 모형 경주차부터 시작한 루이스는 좀 더 높은 레벨인 카트(KART)에 입문했다.

특히 세나의 죽음은 그의 레이싱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1994년 이몰라에서 영원한 우상이었던 아일톤 세나가 사고로 숨졌을 때 루이스는 허트포드셔의 라이 하우스에서 레이싱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그 소식을 전했을 때 해밀턴은 트레일러 뒤에 숨어서 울었으며 이때 자신의 재능을 최고로 발휘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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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루이스는 승승장구 했다. 1995년 맥라렌이 공동으로 후원했던 ‘오토스포츠 어워드’에서 우승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10살이었다. 루이스는 시상식이 있었던 저녁, 맥라렌의 대표 론 데니스에게 걸어가서 “언젠가 맥라렌을 위해서 레이스를 하고 싶다. 월드 챔피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론은 그 꼬마와의 그 순간을 기억했다. 론은 루이스에게 9년 뒤에 찾아오라고 했다. 하지만 3년 뒤 루이스는 모든 시합에서 우승을 했고 모두의 신임을 얻었다.

그 결과, 론은 루이스가 12살이던 97년에 계약을 맺었다. ‘론의 주사위’로 일컫는 이 계약은 말 그대로 ‘대박’이었으며 루이스에게는 인생이 180도 바뀌는 일이었다. 이후 론은 루이스가 분쟁에 휘말리지 않고 레이싱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최적의 레이싱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많은 드라이버들이 다음 계약에서 어떻게 하면 계약금을 더 받을까 하는 고민에 빠지지만 루이스에게는 다른 걱정이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실력을 계속 유지해가면서 더 발전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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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아버지 안토니의 역할이 컸다. 매번 시합을 끝낸 뒤 안토니는 론에게 메시지를 남겨 그때 그때의 결과를 알려줬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도 론의 반응이 없을 때도 많았다. 안토니는 그런 론을 다그치지 않았고 또 필요 이상 요구하지도 않았다. 레이싱을 하는데 필요한 예산만이 그에게 중요했을 뿐이다. 그 다음의 레이싱도 마찬가지였다.

안토니는 계속 루이스의 레이싱에 동행하기 위해 1999년 초과근무를 요청한 영국 철도국에 사표를 제출했다. 사표를 낸 그 다음 월요일. 그는 콜포라텍(투자은행을 지원하는 회사)이라는 IT회사를 설립했다. 그 뒤 가족들은 루이스의 레이싱에 좀 더 많은 신경을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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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의 전폭적인 뒷받침 덕분에 루이스는 놀랄 만큼 성공했다. 그는 2000년 포뮬러 A 카팅월드와 유로피안 챔피언십에서 라이벌 니코 로즈버그를 누르고 우승했다. 루이스는 유로피안 F3에 진출하기 전 2년간 브리티시 포뮬러 르노에서 레이스를 했으며 2003년 시즌에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2004년 맨오 레이싱팀으로 유로 F3에서 5위를 했다.

이후 루이스는 맥라렌과 계약을 맺고 다음 시즌의 유로 F3를 선택해 시즌 챔피언에 등극했다. 루이스는 2006년에 새로운 GP2 종목을 택했고 니코 로즈버그의 GP2 아트팀을 눌렀다. GP2에서 보여준 실력은 루이스가 대중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수준급 추월은 패독 사람들을 감탄시킬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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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는 마침내 2007년 시즌부터 맥라렌과 손잡고 F1에 데뷔했다. F1 사상 최초의 흑인 드라이버로 기록된 그는 걸출한 슈퍼 루키로 기록되기에 충분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여러 압박에 흔들리지 않았고 처음 접하는 서킷에서도 우승컵을 차지했다. 경험이 부족한 루키라고 보기 어려운 그의 드라이빙은 시즌 챔프 키미 라이코넨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최종 라운드 전까지 단독 1위를 달리다 브라질에서 7위에 그쳐 키미에 역전을 허용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데뷔 2년 만에 그는 팀의 중심 역할을 맡았고 이에 보답하듯 2008년 시즌에 역대 최연소 챔피언 기록(23세9개월26일)을 세우며 미하엘 슈마허 은퇴 이후 F1의 간판스타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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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루이스는 2009년에 급격한 머신 사양의 변화와 신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며 랭킹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게다가 말레이시아 그랑프리에서의 ‘라이 게이트’로 인해 그는 이름에 큰 오점을 남겼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직접 책임지지 않고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이듬해부터 2012년까지 2009년 챔프인 영국계 젠슨 버튼과 팀내 ‘최강자’ 칭호를 두고 자존심 경쟁을 벌였다. 첫 해인 2010년엔 루이스가 웃었지만 이듬엔 버튼에게 큰 점수차로 완패했다. 대결 3년차에서는 루이스가 근소한 차로 앞서며 자존심을 회복했다. 그리고 2013년 시즌부터는 메르세데스로 둥지를 옮긴 뒤 어릴 적부터 라이벌이었던 니코 로즈버그와 호흡을 맞추었다. 2년 연속 시즌 종합 4위에 그친 그는 올 시즌 종합 우승으로 실추되었던 자존심을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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