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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화제의 영국인 F1 드라이버는?

페이지 정보

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4-12-31 14:20:28

본문

올 F1 그랑프리에서는 루이스 해밀턴이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19라운드의 레이스가 진행되는 내내 영국의 각 언론매체들은 자국 슈퍼스타 드라이버가 벌인 치열한 경쟁을 쉴 틈 없이 보도했다. 영국 매체들이 이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바로, 2009년 젠슨 버튼 이후 처음 영국인 드라이버가 월드 챔피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전 해인 2008년 시즌엔 루이스 해밀턴이 타이틀을 거머쥔바 있어 2년 연속 영국 출신 챔피언이 탄생했었다.

연이은 영국인 월드 챔피언의 탄생이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전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해밀턴과 버튼 이전에도 1962년부터 1964년까지 G. 힐, J. 클라크, J. 서티즈가 연달아 챔피언이 된 기록이 있고, 1968, 1969년의 G. 힐과 J. 스튜어트가 있었다. 영국 팬들은 그 순간 마음껏 즐겼다.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 J. 왓슨이 5번의 우승을 거둔 것 외에는 영국 팬들의 열광할 만한 소식이 너무나도 적었기 때문이다. 북아일랜드 출신으로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왓슨은 간발의 차이로 니코 로즈버그의 아버지인 케케 로즈버그에게 1962년 드라이버즈 월드 챔피언십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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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 보이’라고 불리던 데릭 워웍이 빼놓을 수 없는 영국 출신 드라이버다. 그는 1981년에 톨레만-하트 터보로 F1 데뷔전을 치렀고, 1984년에 르노로 이적하기 전까지 위트니 기반의 이 팀에서 3년간 활동했다. 워웍은 1984년 시즌 리오 경기에서 선두로 달리던 중, 앞 서스펜션에 이상이 생겨 아깝게 우승을 놓쳤다. 이후에 졸더와 브랜즈 해치에서 2위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상황은 더 이상 나아지지 않았다.

1986년에는 A. 세나의 팀동료로 로터스에 영입될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세나는 로터스가 경주차 2대 모두를 경쟁력 있게 준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워웍이 자신에게 집중된 관심을 가로채갈 것을 염려한 세나는 그의 영입을 반대했고, 팀동료 자리는 워웍 대신 경험이 부족한 조니 덤프리즈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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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말에 있었던 세나 사건으로 인해 그의 드라이버 경력은 완전히 끝나버렸다. 그는 열악한 브라밤으로 출전할 수밖에 없었고, 그 후 3년간은 애로우즈와 함께했다. 지금까지도 그는 당시 로터스에 영입되었다면 능력에 합당한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1987년까지 애로우즈에 잔류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팀에서 얼마든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로터스는 1986년에 세나의 팀동료가 될 선수로 워웍 대신 조니 덤프리즈를 영입했다. 이후 순수 귀족 혈통의 조니는 모터스포츠를 향한 열정을 묻어두고 1993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뷰트 지역의 후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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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당시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영원히 지원 역할만 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것처럼 보이는 영국 드라이버가 몇 명 있었는데, 그 이유는 재능이 부족하거나 경주차가 열악하거나, 혹은 레이싱에 전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세 가지 이유를 모두 안고 있는 드라이버도 있었다.

백만장자인 찰리 펄리의 아들, 데이빗 펄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낙하산부대 장교 출신으로, 1960년대에 중동의 분쟁지역인 아덴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고,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데이빗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인생 설계에 대한 측면에서는 다소 무계획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늠름하고 모든 스포츠에 능했던 데이빗은 잔부트에서 열린 1973년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보여준 영웅적인 모습으로 인해 조지 메달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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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는 전복되어 불타오르던 마치 경주차에서 로저 윌리엄슨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비극적이게도 구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펄리는 아버지의 이니셜을 섀시번호로 사용해, Lec CRP1이라는 자신만의 경주차를 직접 개발했다. 그러나 그 경주차로 출전한 1977년 영국 그랑프리 연습주행에서 심각한 다리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그에 앞서 벨기에 그랑프리에서는 경기 중 내린 비로 팀들이 앞다투어 이른 타이어 교체 피트스톱을 감행하여 혼란이 이는 동안 펄리의 머신이 1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날 2위를 차지한 N. 라우다는 앞을 가로막았다는 이유로 펄리를 엄하게 꾸짖었다. 펄리는 이후, 불행이도 자신이 조종하던 비행기가 서섹스 해안의 바다로 추락하면서 1985년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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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플레이보이로서 명성을 쌓으며, F1 머신에서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루퍼트 키건이 있었다. 에섹스 출신의 루퍼트는 항공사 사장이자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마이크 키건의 아들로, 마이크는 종전 후 과거 자신이 베를린 공수작전에서 사용했던 퇴역 영국공군기 다코타로 사업을 시작해 재벌이 되었다.

루퍼트는 1976년에 쉐브론 소속으로 영국 F3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거두었고, 이듬해에 헤스키스 308E를 타고 F1에 입성했다. 하지만 그가 네덜란드에 도작하고도 시계를 다시 맞춰놓지 않아 독일 그랑프리 연습주행에 한 시간이나 지각했을 때는, 과연 그가 정말 진지하게 경기에 임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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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회사인 ‘브리티시 유나이티드 에어 파리’가 후원하는 로터스와의 협상이 진행된 적도 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만약 그 협상이 이뤄졌다면 경쟁력을 갖춘 경주차로 루퍼트가 얼마나 더 잘할 수 있는지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F3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으면서도 1979년에 엔사인 F1팀 소속으로 출전하는 데 필요한 FIA 슈퍼 라이선스를 얻지 못했다. 1980년에는 마침내 그랑프리에 출전할 수 있었는데 완주하지는 못했다. 또한 티프는 모나코 예선을 통과하지는 못했지만 그로 인해 대담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F1 스타로서의 잠재력을 지녔던 영국 드라이버들 중 가장 불운했던 인물은 단연 스테픈 사우스였다. 런던 북부 출신으로 겸손한 매력을 지녔던 그는 1977년 마치 소속으로 영국 F3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1980년에는 톨레만 F2 팀에서 활동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지만 그 기회를 포기하고 대신 롱비치에서 열린 미국 그랑프리 웨스트 레이스에 부상 당한 알랭 프로스트의 대체 선수로 참가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슬프게도 살패로 끝나고 말았다. 사우스는 예선 통과에 실패했고, 같은 해 캔암 스포츠카 경주에서 발생한 끔찍한 사고의 여파로 다리를 절단해 그의 선수 생활은 갑자기 끝나버렸다. 한편 브라이언 헨튼과 데릭 워웍을 영입한 톨레만 팀은 그해의 F2 시즌에서 지배적인 활약상을 보여줬다.

헨튼은 개인 참가자 자격으로 1977년에 마치 F1 경주차를 타고 출전했고, 이후 티렐 소속으로 출전한 1982년 영국 그랑프리에서 패스티스트랩을 기록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이와 같은 업적을 이뤄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 것이다.

그는 강인하고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로, 개러지가 부족했던 77년에 버니 에클스톤이 피트레인 끈 잔디 위에 그의 팀을 준비시키려 했을 때는 그에게 분명하게 주의를 주기도 했다.

그는 1981년 워웍과 함께 톨레만-하츠 팀 소속으로 F1에 복귀했지만, 1982년에 스폰서십을 의식한 팀이 테오 파비의 기용을 고려함에 따라, 데릭보다는 8살 많은 헨튼이 방출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매우 사교적이고 인기도 많았던 헨튼이었지만, 상상을 초월한 만큼 높은 F1의 기준에서는 스피드가 떨어지는 드라이버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펄리와 워웍이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영국 드라이버들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준 선수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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