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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호주 그랑프리의 추억은 계속 된다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5-03-16 10:52:34

본문

많은 F1 드라이버들은 호주 그랑프리를 시즌 중 최고의 대회로 꼽는다. 훌륭한 기상조건과 최적의 위치, 흥미진진한 서킷, 여유로운 분위기의 우수한 운영기관, 그리고 맛있는 음식과 와인까지 갖춘 데다 F1을 좋아하는 열광적이고 활기찬 관중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호주에서는 사람들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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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호주 그랑프리가 열린 때는 1985년으로, 당시의 열광적인 분위기는 실로 대단했다. 대회 무대는 도시와 인접한 애들레이드 서킷.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고, 아름다운 공원과 친근하고 사교적인 사람들로 둘러싸인 최상의 장소였다. 첫 해에는 현역 드라이버 니코 로즈버그(메르세데스)의 아버지인 케케 로즈버그(윌리엄즈)가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흥미진진한 레이스와 잊혀지지 않는 장면들이 애들레이드에서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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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윌리엄즈에 타고 있던 N. 만셀이 타이어 펑크 때문에 월드 타이틀을 비참하게 놓쳤던 일이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1989년 일본 그랑프리에서 팀동료인 A. 프로스트와의 충돌로 실격당한 A. 세나가 호주 그랑프리 기자회견에서 국제자동차연맹(FIA)을 맹렬히 공격했던 사건들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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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호주 레이스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엔 엄청난 먹구름이 서킷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납빛의 하늘에서 퍼붓는 호우 때문에 트랙은 거의 침수되고 말았다. 반복된 출발 지연 후에 시작된 레이스는 결국 머신들이 잇따라 절망적인 상태로 정지하면서 14랩 만에 중지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세나의 맥라렌만은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고, 이것은 그가 호주에서 거둔 첫 우승이었다.


슬프게도 세나가 41개의 우승 기록 중 마지막 우승을 차지한 곳 또한 1993년의 호주 그랑프리였다. 맥라렌 소속으로 출전한 그는 가장 무서운 라이벌이자 월드 챔피언인 프로스트의 강력한 윌리엄즈 머신을 굴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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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의 호주 그랑프리에서는 미국 레이싱에 진출했다 F1으로 돌아온 만셀이 윌리엄즈 소속으로 자신의 마지막 F1 우승을 거머쥐었다. 당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세나를 대신해 D. 쿨사드가 트랙에 나섰지만, 한 시즌 동안 네 번이나 만셀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하지만 그 해에는 너무나도 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탓에 만셀의 우승은 빛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1994년 월드 챔피언십에서 발생한 M. 슈마허의 D. 힐의 충돌이었다. 고의적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슈마허는 이로 인해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그래도 타이틀을 그가 가져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1996년에는 애들레이드에 최종전이 열리는 대신, 멜버른에서 오프닝 그랑프리가 열리자 약간의 우려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교회의 도시’라고 불리는 애들레이드와 비교했을 때, 멜버른이 조금 다르고 덜 친숙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모든 것이 애들레이드만큼이나 훌륭한 도시였고, 특히 앨버트 파크는 ‘레이스를 위한 최고의 장소’라는 고유의 슬로건을 내세울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은 거물 기업가이자 전직 사장이었던 론 워커의 통솔력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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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극적인 사건들은 계속되었다. 처음에 앨버트 파크 보존 캠페인을 벌이던 소수의 시위대가 레이스를 반대했는데, 현재까지도 열광적인 몇몇 사람들을 주축으로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잘은 몰라도 앨버트 파크가 그랑프리를 위해 철저하게 개조된 것을 보면, 시위의 정체성은 이미 퇴색된 듯하다.


첫 경기는 레이스의 끝부분에 D. 힐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던 새로운 팀동료 J. 빌르너브에게서 우승컵을 가로채고, 통상 그의 두 번째 호주 그랑프리 우승을 기록하면서 멋지게 시작되었다. 그것은 1998년에 맥라렌 소속으로 출전한 쿨사드가 겨우 2랩이 남은 시점에서 팀동료인 M. 하키넨에게 우승을 양보했던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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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의 세나가 수많은 헤드라인을 장식했듯이 슈마허 또한 마찬가지였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5년 동안 슈마허는 네 번의 우승을 차지했지만, 2002년에는 멜버른의 기업가 폴 스토다트의 미나르디 소속으로 출전한 호주의 영웅, M. 웨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선전하며, 5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냄으로써 슈마허의 우승은 완전히 묻혀버렸다. 호주의 반응은 굉장했다. 물론 2008년에 멋지게 우승을 거머쥔 L. 해밀턴이 2007년 첫 그랑프리에서 맥라렌에게 3위를 선물했던 때에도 그런 행복감을 목격할 수 있었다.


2009년 2010년, 2012년 호주 그랑프리에선 J. 버튼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2010년부터 2년간 월드 랠리 챔피언십(WRC), 나스카 등에서 활약하다 2012년 F1에 돌아온 K. 라이코넨이 이듬해 호주전에서 우승컵을 안았다. 지난해엔 N. 로즈버그가 메르세데스 머신의 기술력을 입증했다. 이로써 메르세데스-벤츠 F1 엔진은 1954년 J.M. 판지오의 우승 이후 100번째 우승을 기록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1894년 세계 최초의 자동차경주에 참가한 이후 120년 동안 모터스포츠에서 다양한 활동 및 성공으로 자동차 역사에 한 획을 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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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올해로 F1에서 31주년을 맞이한 호주 그랑프리는 개최지가 애들레이드가 됐든, 멜버른이 됐든, 한 경기도 빠짐없이 모든 레이스가 인상적이었으며 수많은 슈퍼스타의 탄생을 지켜본 셈이다.

 

글 / 김병헌 (모터스포츠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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