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오토뉴스

상단배너

  • 검색
  • 시승기검색
ä ۷ιλƮ  ͼ  ī 󱳼 ڵδ ʱ ڵ 躴 ͽ ǽ ȣٱ Ÿ̾ Auto Journal  Productive Product
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윌리엄즈가 F1에 존재하는 이유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5-04-28 02:26:55

본문

D. 쿨사드가 매 시즌마다 ‘자신의 해가 될 것’이라고 말하던 순간을 기억하는가? 윌리엄즈를 바라보면 늘 그런 시각을 갖게 된다. 매년 겨울마다 이들은 올 시즌에는 나아진다고 주장하며 지난날의 영광을 흉내라도 내기 위해서 한 발짝 나아가고 말겠다는 무한한 희망을 내비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매번 실망스럽다. 윌리엄즈가 여전히 F1에서 가장 사랑받는 팀들 중 하나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언젠가 지금보다 나아지기는 할까?


고인이 된 클레이 레가조니와 함께 1979년 영국 실버스톤에서 팀에 첫 성공을 안겨다 준 FW07부터 P. 말도나도가 2012년 스페인 그랑프리를 우승하는데 사용한 FW34까지 27대의 윌리엄즈 F1 머신이 월드 챔피언십 그랑프리에서 우승했다.

 

6af77041b6f06b32b0bad57ebaf5d123_1430155

윌리엄즈는 레이스를 하고 F1에서 우승하는 것 외에는 다른 존재의 이유가 없는, 철저한 레이싱팀이다. 특히 프랭크 윌리엄즈는 처음으로 F1에 진출한 1969년 시즌에 개인 소유였던 브라밤 BT26A에 피어스 커리지를 앉혀 출전시켰던 때와 마찬가지로 F1과 레이싱 드라이버들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


이 팀은 가끔 기술적으로 잘못된 길로 빠지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항상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윌리엄즈는 그랑프리 역사를 이어온 대부분의 시간 동안 최정상급 드라이버들을 보유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데, 이는 자연히 팀에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자신감을 불어넣는 요인이 되었다. 프랭크 윌리엄즈는 또한 때를 잘 맞추는 능력도 지녔다.

 

6af77041b6f06b32b0bad57ebaf5d123_1430155

1978년에 팀이 사우디아라비아인의 지원으로 부활했을 때, 패트릭 헤드는 그 훌륭한 윌리엄즈 FW06을 설계했다. 앨런 존스는 바로 그 시기에, 그 머신을 다루는데 더없이 적합한 인물이었다. 터프한 2세대, 호주 출신 레이서 존스는 서티스와 섀도우에서 어설픈 성적을 낸 뒤 진정한 도전자로서 입지를 다지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존스와 헤드는 재빨리 서로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쌓았다.


둘의 관계에 전환점이 된 대회는 1978년 왓킨스 글렌에서 열린 미국 그랑프리다. 연습주행 도중 FW06의 바퀴축이 고장나자 패트릭은 존스에게 팀원들이 밤새 결함을 고치고 나면 괜찮아질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그라고 패트릭은 존스에게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안심시켰고, 존스는 패트릭의 능력을 진정으로 절대 신뢰했다.”
1979년 초반, 선두 자리를 노리는 팀이라면 모두 콜린 채프먼을 본받아 지면효과 공기역학을 연구해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즉 윈드터널 연구에 착수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1979년 팀에 첫 우승을 안겨준 FW07을 만드는 열쇠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6af77041b6f06b32b0bad57ebaf5d123_1430155

사실 FW07의 공기역학적 디자인은 전체적으로 임페리얼 컬리지 윈드터널에서 일주일 동안 작업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패트릭에게는 평생 첫 윈드터널 직업이었다. 사실 영국 실버스톤에서 팀에 첫 그랑프리 우승을 안겨줄 드라이버는 마땅히 존스일 것처럼 보였지만, 머신의 워터펌프 캐스팅 파손으로 자욱한 연기와 수증기 속에서 피트로 리타이어하자 레가조니의 FW07이 선두 자리를 물려받았다.


실질적으로 FW07과 더불어 그 후계자로 1982년 K. 로즈버그에게 타이틀 왕관을 씌워준 ‘Mk2’ 버전의 FW08은 1980년대 중반의 성공가도를 예고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시기는 혼다의 파트너십, 그리고 N. 만셀과 N. 피케라는 드라이버 라인업으로 빛난 1.5리터 터보 시대의 최고 전성기였다. 매끈한 탄소섬유 합성 재질의 FW10과 FW11/11b는 윌리엄즈 엔지니어링의 탁월한 기준을 한층 더 높이 올려주었고, 두 드라이버 모두가 계속 발전을 거듭해가는 혼다 V6 터보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6af77041b6f06b32b0bad57ebaf5d123_1430155

하지만 이 대단한 협력관계는 팀의 소유주와 충돌을 빚을 만한 의견을 내는 외부 사람들을 모두 막아버리는 윌리엄즈의 고질적인 반항적 성격으로 인해 무너져버렸다. 1987년 말 혼다는 A. 세나와 계약을 맺은 맥라렌으로 옮겼다.


프랭크와 패트릭이 사토루 나카지마를 N. 만셀의 팀동료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더라면 윌리엄즈가 여전히 로터스 대신 두 번째 혼다 엔진 사용 팀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윌리엄즈는 이를 거절했다. 역설적이게도 20년 뒤 이들은 토요타와의 엔진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사토루의 아들 카즈키와 계약을 맺었다.
만약 그들이 이를 악물고 사토루 나카지마를 받아들였다면 팀의 전체적인 성적을 위해 더 나은 결정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윌리엄즈의 방식이 아니었다.

 

6af77041b6f06b32b0bad57ebaf5d123_1430155

1989년 3.5리터 자연흡기 엔진으로 바꾸어 탄 것은 결과적으로 팀에 참담한 결과를 안기면서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프랭크는 혼다에 그 일에 대한 죄를 추궁하는 데 있어 거침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뒤돌아보면 혼다에 대해 더 강력한 법적조치를 취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윌리엄즈는 레이스에서 꾸준하게 성공적인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주요 자동차 제조업체가 엔진을 공급해주는 섀시 파트너가 되는 방식이 가장 유리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6af77041b6f06b32b0bad57ebaf5d123_1430155

이는 윌리엄즈와 혼다의 협력으로 여실히 드러났고, 후에 르노와의 제휴로 1989년부터 1997년까지의 그랑프리에서 여러 차례 우승하며 N. 만셀(1992년), A. 프로스트(1993년), D. 힐(1996년), 그리고 J. 빌르너브(1997년)를 월드 챔피언으로 만들어줌으로써 성공적으로 증명되었다.


그러나 프랭크는 드라이버 계약에 있어서는 항상 굳건하고 독립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이를 두고 변덕스럽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른 이들은 그저 사지가 마비되어 그동안 거의 매일 같이 고통에 빠져 살아온 이가 신경질적인데다 너무 높은 급료를 받는 드라이버들의 성미를 맞춰주기 싫어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만셀은 1992년 말 윌리엄즈에서 이듬해 프로스트가 그의 팀 동료가 된다는 공식 발표가 나온 뒤 팀을 떠났다. 힐 역시 월드 챔피언에 오른 다음 팀과 작별했는데, 그의 후임으로 H.H. 프렌첸과 계약을 맺은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6af77041b6f06b32b0bad57ebaf5d123_1430155

이후 지금까지 윌리엄즈는 몇 차례 시행착오를 거치며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 2012년 스페인 그랑프리 이후 우승컵을 거머쥔 적은 없지만 윌리엄즈는 종합 3위를 기록한 지난해부터 발전을 나타내는 분명한 징후들이 엿보였다. ‘컨트롤’ 메르세데스 엔진에 균형 잡힌 드라이버 라인업과 지난 몇 년간의 기술적 발전이 곧 빛을 발하게 되리라는 기술감독의 낙관적인 견해에 힘입어, 프랭크와 그의 팀원들이 올 시즌에도 놀라움을 선사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하단배너
우측배너(위)
우측배너(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