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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누가 미드십 경주차 혁명을 불러왔나?

페이지 정보

글 : desk(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5-08-28 06:00:54

본문

호주인 잭 브라밤이 1959∼60년 세계 타이틀을 따내던 당시 그가 몰았던 쿠퍼 클라이맥스 그랑프리 경주차는 레이스 세계에 ‘미드십’ 혁명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미드십 경주차는 쿠퍼가 처음이 아니었다. 1938∼39년 활동했던 아우토우니온 타입D만 보아도 거대한 16기통 엔진을 운전석 뒤에 얹은 전형적인 미드십 구성이다. 그러나 당시 미드십은 운전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통념을 깨어버린 것이 바로 쿠퍼. 1959∼60년 2년 연속 세계 챔피언에 오르면서 F1에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영국 서비튼에 살던 찰스 쿠퍼는 1·2차 세계대전 사이에 레이싱 미캐닉으로 활동하면서 작은 정비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1946년 자동차 마니아이던 아들 존 쿠퍼는 친구 에릭 브런든과 함께 500cc 모터사이클 엔진을 얹은 소형 포뮬러 머신을 제작했다. 서비튼 하이필드에 있는 아버지의 정비공장을 작업실로 사용하며 피아트 토폴리노 섀시를 베이스로 한 미드십 머신 ‘쿠퍼 마크1’을 완성했다. 이 머신이 큰 성공을 거둬 1947년 12월 19일, 아버지와 함께 쿠퍼사를 설립했고 출전하는 클래스마다 우승컵을 휩쓸며 1950년대에 이르러 세계 최대 규모의 레이싱 컨스트럭터가 되었다.


쿠퍼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코벤틀리 클라이맥스 FWA 엔진을 빼놓을 수 없다. 컴팩트한 알루미늄 4기통 SOHC로 가볍고 출력도 높아 당시 1,100cc 스포츠카 클래스 최고의 인기 엔진이었다. 존 쿠퍼는 500cc 클래스에서 실적이 높은 멀티 튜브 프레임에 이 엔진을 얹고 시트로엥 트락숑아방의 앞바퀴굴림 구동계를 거꾸로 달아 미드십 레이아웃을 만들었다. 여기에 뒷부분이 짧은 컴팩트한 유선형 보디를 얹은 타입39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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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머신은 1955∼56년에 걸쳐 클래스를 휩쓸었고 56년에는 엔진 배기량을 키운 1,500㏄의 FWA 엔진을 얹었다. 당시 국제 모터스포츠를 총괄하던 CSI에서는 57년부터의 F1 규정을 시판 휘발유를 사용하는 1,500㏄로 바꾸었고, 쿠퍼는 여기에 맞추어 타입41을 선보였다. 출력은 높지 않았지만 가벼운 차체에 경쾌한 조종성능까지 갖추고 있었다. 57년 그 개량형인 F2 머신 타입42(마크Ⅱ)도 생산하기 시작했다.


드라이버 로이 살바도리는 이 섀시와 신형 렐 엔진(1.5L DOHC)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배기량을 2.0L로 키운다면 모나코 같은 테크니컬 코스에서 더욱 위력적일 것이라 판단했다. 이렇게 등장한 신형 머신은 배기량을 1,960㏄로 키워 출력이 180마력으로 높아졌지만 차체 무게는 360㎏에 불과했다.


한편 살바도리가 BRM을 타고 모나코 그랑프리에 출전하기로 계약함으로서 쿠퍼의 넘버2 드라이버는 호주인 잭 브라밤에게로 돌아갔다. 잭 브라밤은 고장으로 고전하면 서도 6위에 올랐다. 이듬해 프라이비터 로브 워커팀이 1,960㏄ 쿠퍼 클라이맥스를 아르헨티나 그랑프리(부에노스아이레스)에 출전시켜 스털링 모스가 1위에 올랐다. 모리스 트랑티냥은 배기량을 2,014㏄로 키운 신형 경주차를 몰고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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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5㏄의 신형 엔진이 1959년 봄부터 워크스 쿠퍼와 로브 워커에 공급되었다. 커진 배기량에 DOHC 헤드를 얹은 클라이맥스 FPF엔진이 가볍고 조종성이 뛰어난 쿠퍼 섀시에 얹혀지며 더욱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게 되었다.


찰스 쿠퍼는 앞뒤 서스펜션 모두 가로배치 리프 스프링을 계속 사용하길 원했지만 존 쿠퍼와 잭 브라밤은 좀 더 진보적인 위시본 타입 프론트 서스펜션으로 눈을 돌렸다. 결국 1958년의 마크Ⅲ는 앞에 코일&위시본 방식의 독립 서스펜션을 달았고 59년의 마크Ⅳ(타입 51)역시 이 구조를 사용했다.


이들 머신의 약점은 시트로엥의 트랜스액슬이었다. 이 때문에 1958년 잭 브라밤이 파리의 ERSA 공장에 들러 3단 변속기를 4단으로 개량했다. 한편 그는 호주인 기술자 론 트라나크를 불러들여 경주차 개량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들었다. 트라나크는 리어 서스펜션 위쪽에 위시본을 추가하고 최종감속기어에 드롭기어를 더해 기어비 세팅을 간편하게 만들었다.


한편 반월이 레이스에서 퇴진함으로서 스털링 모스가 쿠퍼로 자리를 옮겨 왔다. 그는 로브 워커의 프라이비터팀에서 트랑티냥과 팀을 이루었다. 쿠퍼 워크스팀은 미국인 마스텐 그레고리와 브루스 맥라렌(맥라렌팀 창업자)이라는 20세의 뉴질랜드 청년을 새롭게 맞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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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3개의 F1 시리즈 중 쿠퍼 경주차가 8개의 우승을 따냈다. 영국 굿우드에서 데뷔전을 치른 2.5L 쿠퍼는 모스가 우승, 잭 브라밤이 2위에 올랐고 이어 실버스톤 서킷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트로피에서 우승(잭 브라밤)하는 등 데뷔 초부터 돌풍을 일으켰다. 챔피언십 점수가 걸린 모나코 그랑프리와 영국 그랑프리에서 브라밤이, 포르투갈과 이태리에서는 모스가 1위에 올랐다.


워커스팀은 쿠퍼 섀시를 사용했지만 변속기와 디퍼렌셜은 발레리오 코로티가 제작한 트랜스액슬을 썼다. 코로티의 트랜스액슬은 성능이 뛰어났지만 낮은 정밀도 때문에 자주 고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잭 브라밤이 이태리에서 3위에 올라 쿠퍼는 어렵지 않게 F1 컨스트럭터즈 챔피언에 올랐다.


한편 드라이버즈 챔피언 결정은 12월 12일 플로리다주 세브링에서 열린 최초의 미국 그랑프리까지 가는 혼전이었다. 모스가 탔던 워커 쿠퍼는 리어 서스펜션을 코일 스프링+스트럿 타입으로 개량했지만 변속기가 말썽을 부렸다. 잭 브라밤은 선두를 달리다가 막바지 연료 부족으로 팀의 젊은 드라이버 브루스 맥라렌(타입 51)에게 우승을 넘겼다. 잭 브라밤은 멈춰선 경주차를 직접 밀어 간신히 4위로 골인함으로써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이듬해 1960년의 쿠퍼 타입 51은 시즌 개막전 아르헨티나 그랑프리에서 멋지게 브루스 맥라렌과 함께 우승했다. 이때부터 ‘로우라인 쿠퍼’로 불리는 타입 53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잭 브라밤은 그랑프리 5연승으로 2년 연속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이와 함께 짧은 노즈에 운전석이 앞으로 당겨진 타입 51의 미드십 구성은 모터스포츠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있다. 1960년 이후 등장한 거의 경주차는 쿠파의 영향을 받아 미드십 구성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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