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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깨지지 않은 연승행진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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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5-09-22 10:37:06

본문

지난 1950년 이후 F1 드라이버즈 챔피언 우승컵을 거머쥔 드라이버는 모두 32명. 이 가운데 M. 슈마허가 최다 7회 월드 챔피언을 차지했고, 1950년대 명 드라이버 J.M. 판지오가 그의 뒤를 이어 최다 타이틀 부문 2위에 올라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좀처럼 도달하기 어려운 세계 타이틀 고지를 다섯 차례 이상 밟았다는 것.


그러나 슈마허와 판지오도 넘보지 못하는 기록 가운데 하나가 최다 연승이다. F1 역사에 길이 남을 최다 연승 드라이버는 1950년대 명 드라이버 알베르토 아스카리와 2010년대 주역 세바스찬 베텔이다. 아스카리는 월드 챔피언에 오른 1952∼53년에 역대 최다 9연승 대기록을 작성했으며 베텔은 지난 2013년에야 9연승을 기록하며 아스카리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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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 연승 2위는 ‘F1 황제’ M. 슈마허다. 2004년에 유럽에서 헝가리까지 7경기 연속 우승컵을 낚았다. 그 뒤로는 J. 브라밤(60년), J. 클라크(65년), N. 만셀(92년)이 함께 올라있다. 이들은 각각 연승 기록을 작성한 해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다. 올 시즌 종합 1위 루이스 해밀턴은 지난해 작성한 5연승이 최고기록이다.


그럼 지금부터 역대 최다 연승의 주인공 아스카리의 레이싱 스토리를 공개한다. 당시 페라리 드라이버로 뛴 아스카리는 지난 1918년 이태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우승에 항상 우연과 행운이 따라 ‘신비한 드라이버’로 불린 아스카리는 아버지 안토니오의 뒤를 이어 모터스포츠에 뛰어들었다. 안토니오는 아스카리가 7살 때 프랑스 파리 근교 레이스 트랙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아들은 아버지의 대를 이을 결심을 하고 모터사이클 경주에 출전했다. 데이먼 힐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랑프리 무대에서 2세가 아버지의 성적을 뛰어넘은 경우는 1929년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사망한 안토니오 아들, 알베르토 아스카리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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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부터 자동차경주에 참가한 알베르토 아스카리는 47년 그랑프리에 페라리팀 드라이버로 데뷔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는 겉모습이 드라이버 같지 않았다. 고향 사람들은 그를 뚱뚱하다는 뜻의 ‘치치오(Ciccieo)’라고 불렀다. 하지만 외모와 달리 사물을 냉정하게 판단하는 사람이었고, 침착하게 경기를 펼쳐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 갔다.


그는 1948년 산레모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모터스포츠계에 인상을 남겼고, 예전에 아버지가 활동했던 알파로메오로 자리를 옮겼다. 얼마 후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다시 3위를 차지했다.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고 팀동료였던 엔초 페라리는 알베르토의 성공을 관심있게 지켜보다가 1949년 빌로레지와 함께 드라이버로 기용했다. 그해 아스카리는 다섯 번의 승리를 거두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치러진 페론 그랑프리까지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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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인 F1이 출범한 1950년 드라이버즈 5위에 오른 아스카리는 이듬해 2승을 거두어 J.M. 판지오에 이어 시리즈 종합 2위를 차지했다. F1 엔진규정이 1.5ℓ에서 2.0ℓ로 바뀐 52년 F1에는 페라리팀을 능가할 라이벌이 없었다. 시즌 개막전에서 P. 타루피(페라리)가 승리했지만 2전부터 6경기 연속 아스카리가 우승해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따냈다. 이듬해에도 1∼3전 표창대 정상을 밟아 F1 역사에 길이 남을 최다 9연승 이정표를 세웠다.


그는 1953년 말 페라리를 떠났다. 혁신적인 그랑프리 머신을 제작한다는 란치아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경주차 개발작업이 더디게 진행되는 바람에 아스카리는 초조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마침내 적갈색 페인트가 채 마르지 않은 두 대의 란치아가 1954년 10월 24일 스페인 페드라베스 서킷에 모습을 나타냈다. 아스카리는 강한 인상을 남기며 스타트했고, 8랩에서 큰 차이를 벌리면서 선두로 나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9랩에서 클러치 이상으로 경주차가 멈춰 버렸고 아스카리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콕핏에서 내려왔다. 그해 월드 챔피언은 벤츠의 핸들을 잡은 판지오가 가져갔다. 란치아 D50의 때늦은 출발이 벤츠에 행운을 가져다 준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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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초반 그랑프리계를 평정한 아스카리는 55년 5월 26일 운명을 달리했다. 모나코 그랑프리의 사고로 입원한 지 4일 밖에 안 되어 아스카리는 연습을 위해 이태리 몬자 서킷에 모습을 나타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아내와 함께 집으로 가기 전, 그는 친구 카스텔로티의 페라리로 서킷을 몇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평범한 셔츠와 바지 차림에 친구가 벗어놓은 헬멧을 섰다. 3랩째, 급코너에서 빠져 나오는 순간 알 수 없는 이유로 차가 미끄러져 두 번이나 굴렀다. 트랙으로 던져진 아스카리는 큰 상처를 입고 신음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아버지 안토니오가 세상을 등진 날, 37세의 나이로 서킷을 떠났다.


아스카리의 죽음은 국가적 손실로 여겨졌고 각국에서 위문 전보가 쏟아져 왔다. 산카를로 알코르소 교회의 기둥 앞에는 검은색 휘장과 ‘마지막 피니시라인, 주여 알베르토의 영혼을 맞으소서’라는 비문이 내걸렸다. 그의 장례식이 치러진 밀라노의 중심가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평소에는 몹시 시끄러운 지역이지만 그날만큼은 고요함이 넘쳤고, 대답 없는 전화 벨 소리만이 집안에서 울렸다.


장례식이 있은 지 3일 후 란치아는 공식적으로 모터스포츠 활동을 중지했고, 6월 6대의 란치아 60D 머신을 비롯해 엔진, 설계도, 예비부품 등 모든 것을 페라리에 넘겼다. 50∼55년 그랑프리에서 활동한 알베르토 아스카리는 6년 동안 32경기에 출전해 13승, 14회 폴포지션, 챔피언십 포인트 139점의 뛰어난 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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