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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챔프가 만든 그랑프리팀은 다르다?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5-10-31 10:25:06

본문

영국 출신의 존 서티스는 4륜과 2륜 두 분야를 재패한 유일한 드라이버였다. 그는 F1 그랑프리에만 묶이지 않고, 페라리팀 소속으로 스포츠카 경기에서도 활약했다. 나아가 롤라의 에릭 브로들리와 함께 작은 팀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1953년 최정상을 달리던 페라리팀에 들어가 이듬해 아슬아슬하게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따냈다. 1965년 모스포트에서 롤라 캔암 경주차를 몰던 서티스는 대형사고를 일으켰다. 서스펜션이 부러져 트랙에서 퉁겨 나간 것이다. 중상을 입었지만 다시 일어나 페라리팀에 들어갔고, 얼마 후 모데나에 있는 페라리 테스트 트랙에서 최고 랩타임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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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페라리팀 에우제니오 드라고니 감독은 서티스가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페라리의 세컨드 드라이버 로렌초 반디니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는 못미더워하는 감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란 듯이 반디니를 눌렀다. 서티스는 유력한 타이틀 후보였고, 벨기에 스파프랑코르샹 서킷에서 치러진 수중전을 우승으로 이끌어 탁월한 실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드라고니와는 끝내 사이가 좋아지지 않아 결국 쿠퍼-마세라티팀으로 옮겨갔다.


그 후 2년에 걸쳐 혼다 드라이버로 활약했고, BRM에서 1년 동안 뛰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손으로 직접 경주차를 만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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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티스가 만든 제1호 F1 머신은 1970년 브랜즈 해치의 영국 그랑프리에서 데뷔했다. 첫 경기에서 서티스는 7위를 달리다 탈락했다. 그가 F1 컨스트럭터로 첫 득점을 올린 경기는 캐나다 그랑프리로, 5위로 피니시라인을 밟았다. 경주차는 TS7이었다. 첫 우승은 우턴파크 골드컵에서 차지했다. 그러나 정식경기가 아이어서 F1 성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1971년 TS9를 발표했다. 서티스는 랄프 슈토멜렌을 영입해 함께 경주차 핸들을 잡았다. 그해 처음으로 시즌 전경기를 뛰었다. 72년에 서티스는 모터사이클 레이스의 친구인 마이크 헤일우드와 팀 셴켄을 드라이버로 맞아들이고, 자신은 팀 운영에 전념했다. 헤일우드는 이태리 그랑프리에서 2위를 차지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1972년 서티스는 F1 드라이버로서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신형 TS14가 첫선을 보인 해였다. 1973년 헤일우드가 브랜즈 해치에서 열린 레이스에 그 차를 몰고 나가 선두를 달리다 기계고장으로 큰 충돌사고를 일으켰다. 그 뒤 브라질의 유망주 카를로스 파체가 들어와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 표창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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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은 암울했다. 요헨 마스와 파체가 시즌의 막을 올렸지만, 파체는 얼마 후 팀을 떠났다. 뒤이어 데릭 벨과 장 피에르 자부이유가 후속 드라이버로 들어왔다. 당시 서티스는 운영자금의 부족으로 교전하고 있었다. 몬자에서는 경주차 두 대가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헬무트 코이니크는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TS16을 몰고 9위로 경기를 마쳤으나 왓킨스 글렌에서 치른 미국 그랑프리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1975년 존 왓슨이 서티스팀에 몸담았다가 펜스키로 넘어갔다. 그러자 서티스는 협상을 벌여 경주차의 이름을 날렸다. 듀렉스 컬러로 차체를 다시 칠한 것이다. 앨런 존스가 첫 드라이버로 등장했다. 역설적이게도 TS19는 이전의 서티스 경주차보다 훨씬 경쟁력이 있었다.  TS19는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1978년 비토리오 브람빌라가 이 차를 몰고 출전했지만 이태리 그랑프리에서 스타트 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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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 TS20을 몰고 나간 가장 유망한 드라이버는 르네 아르누였다. 다운포스 기술이 도입되자 서티스는 여기에 맞춰 TS21을 개발했다. 하지만 뒤를 밀어주는 스폰서가 나타나지 않았다. 1978년 서티스는 눈물을 머금고 자신이 만든 팀을 해체해야 했다. 8년 동안 118전에 참가한 서티스의 최고성적은 1972년의 5위였다.


한편 존 서티스는 지난 2009년에 서킷에서 아들을 잃어 팬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F2 시리즈 제8전 영국 그랑프리 결승레이스 도중 아들 헨리 서티스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2009년 신설된 F2시리즈는 F1의 전 단계의 권위있는 레이스로, 충돌하면서 튄 잭 클락의 경주차 타이어가 머리 쪽을 강타하면서 일어난 사고다. 당시 헨리 서티스의 나이는 1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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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에서는 지난 2001년 마샬의 사망 사고 이후 타이어가 떨어져 나오지 못하도록 케이블로 머신을 잇는 것이 의무화 돼 있지만 F2는 그렇지 못한 게 사망 사고의 한 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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