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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자신이 만든 경주차로 F1 우승한 남자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5-12-26 09:45:02

본문

잭 브라밤의 별명은 ‘블랙 잭’. 예리하고 냉정하며 통찰력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도박판과는 상관이 없다. 그의 화려한 경력은 머신에 대한 본능적인 이해와 드라이버로서의 자질, 여기에 과감성이 더해져 이루어진 것이다. 12살 때 아버지의 차로 운전을 시작한 그는 기계에 대한 커다란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20살 때 정비소를 차려 운영하면서 미제트(프레임 보디의 1인승 오픈 휠 경주차)로 레이스 세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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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출신의 브라밤은 1948년 호주 뉴사우스웨일즈주 미제트 챔피언에 올라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다. 훗날 브라밤팀을 창설해 ‘BT' 경주차를 함께 만든 킬론 토러낵과도 이때 인연을 맺는다. 당시 토러낵과도 이때 인연을 맺는다. 당시 토러낵은 힐 클라이밍 경기에 관여하고 있었다. 1952년 브라밤도 참가해 이듬해 호주 힐 클라이밍 챔피언이 되었다.


호주에서 경주차 광고가 금지되자 브라밤은 뉴질랜드로 눈을 돌렸고, 54년 열린 뉴질랜드 그랑프리를 구경하고 나서 F1에 매혹되었다. 그는 곧바로 영국으로 날아가 존 쿠퍼를 만났다. 실력을 인정받은 브라밤은 쿠퍼 팀의 F2 드라이버로 들어갔고, 이듬해 영국 그랑프리에 첫 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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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년 그는 2.5리터 클라이맥스 엔진을 쓴 쿠퍼 경주차로 F1을 평정하며 최고의 드라이버로 올라섰다. 같은 해 브라밤을 비롯해 S. 모스, M. 트랑티냥, B. 맥라렌, M. 그레고리 등 쟁쟁한 드라이버들이 쿠퍼 경주차로 타이틀 사냥에 나섰다.


잭은 경쟁자 중 제일 빠르지는 않았지만 안정적이었다. S. 모스가 개인적인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폴포지션에 섰으나 우승컵은 브라밤이 가져갔다. 그는 영국에서 한 번 승리를 거뒀고 네덜란드에서는 J. 보니어에 이어 2위를 거두었다. 프랑스와 이태리 그랑프리에서는 3위로 경기를 마쳤다. 59년 미국 세브링 서킷에서 마지막 바퀴를 돌던 중 연료가 바닥났지만 4위로 피니시라인을 통과해 챔피언을 확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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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브라밤의 승리를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듬해 F1 제4전 네덜란드부터 벨기에,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 그랑프리까지 5연승을 거두어 의구심을 잠재웠다.


경주차 제작에 관심이 많았던 브라밤은 토러낵과 손잡고 62년 ‘모터 레이싱 디벨롭먼츠'(MRD)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얼마 후 브라밤이라는 이름의 경주차가 첫선을 보였다. 브라밤은 미국 와킨스 글렌 서킷에서 F1 사상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경주차로 출전해 포인트를 얻는데 성공했다. 얼마 후 댄 거니를 세컨드 드라이버로 영입한 브라밤 팀은 64년 프랑스에서 첫승을 거두었다. 브라밤이 자신의 이름을 딴 경주차로 출전해 우승컵을 안은 것은 2년 후인 66년 프랑스 그랑프리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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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그랑프리에 상업주의가 침투하면서 65년 브라밤은 핸들을 놓아야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저앉을 브라밤이 아니었다. D. 흄을 팀 동료로 하고 66년 풀시트 드라이버로 복귀해 세 번째 타이틀을 확정지었다. 67년에는 세컨드 드라이버 흄에게 영광을 물려주고, 자신은 종합 2위에 만족해야 했다.


68년 흄이 맥라렌 팀으로 옮겨가고 그의 자리는 F2 출신의 J. 린트가 메꾸게 되었다. 린트는 내구성이 떨어지는 새 레프코 엔진 때문에 곤란을 겪다가 로터스 팀으로 이적해 버렸다. 브라밤 팀은 J. 로이크스라는 벨기에 출신의 젊은 드라이버를 새로 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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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년 브라밤은 발목 부상으로 시즌을 포기했다. 그런 와중에서 팀 동료인 로이크스가 페라리의 추격을 간신히 물리치고 종합 2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로이크스의 활약과 달리 브라밤은 레이스에 염증을 느껴 은퇴를 고려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44세가 되던 70년 시즌을 끝으로 F1 경력에 마침표를 찍기로 마음먹었다. 레이스를 시작한 지 23년, 서킷을 휘젓기에는 기력이 달린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끝까지최선을 다한다는 각오로 개막전인 남아프리카 그랑프리에서 투혼을 불사른 결과 69년 챔피언 스튜어트를 꺾고 표창대 정상에 섰다. 그해 브라밤의 종합성적은 5위, 월드 챔피언 타이틀은 이태리 그랑프리에서 사망한 린트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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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밤은 린트와의 경쟁에서 유난히 약한 모습을 보였다. 70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브라밤은 찰거머리 같이 바짝 달라붙은 린트에게 마지막 헤어핀 코너에서 추월당해 우승컵을 빼앗겼다. 영국 그랑프리에서는 앞서 달리던 브라밤 경주차의 연료가 바닥나 서킷에 멈춰 버려 또다시 린트에게 우승을 양보했다. 그는 70년 멕시코 그랑프리 후에 팀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경주차의 핸들도 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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젝 브라밤은 70년을 끝으로 서킷에서 사라졌지만 그가 만든 브라밤 팀은 92년까지 활동했다. F1 사상 가장 아름다운 경주차로 꼽히는 BT 44를 비롯해 수많은 경주차를 탄생시켰고 넬슨 피케처럼 실력있는 드라이버를 배출했다. 셋째 아들인 데이비드 브라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90년 F1에 데뷔했으나 1승도 건지지 못하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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