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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초창기 세계 모터스포츠계 명가는?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6-01-26 16:58:57

본문

그랑프리는 핸들을 잡은 부자들의 경기로 시작되었다. 실제로 초기 도로경기에서는 부유한 신사들이 운전기사에게 핸들을 맡기고 출전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레이스는 경쟁의 열기를 더했고, 경주차는 치열한 성능대결을 벌였다.

 

1920년대에 접어들어 자동차 메이커가 부유층들을 몰아내고 경기에 뛰어들었다. 1909년 태어난 알파로메오는 초창기 자동차경주의 표창대를 거의 휩쓸었고, 아우토 우니온과 메르세데스-벤츠가 뒤를 이었다. 

1950년대 말에 이르자 페라리, 마세라티와 벤츠가 선두를 다투었다. 그때부터 오너와 엔지니어의 실력이 경기성적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후 영국의 두뇌들이 F1 기술을 놀라운 속도로 발전시켰고, 1960년부터 전문 레이싱팀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로터스와 브라밤, 맥라렌이 당시 자동차경주의 선두를 달리던 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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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수많은 팀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오너의 재정사정이 팀의 운명을 좌우한 것이다.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페라리에 영국의 맥라렌과 윌리엄즈, 베네톤이 합세했다. 4강의 각축전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밖의 군소 팀은 뒤에서 순위를 다투었다.

알파로메오는 1920∼30년대를 주름잡은 모터스포츠 명문이다. 2차 세계대전의 공백을 뛰어넘어 전쟁 직후에도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1951년 그랑프리에서 우승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알파로메오가 그랑프리에 데뷔한 것은 1924년.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 비토리오 자노를 23년 영입한 알파로메오는 이후 2년 동안 서킷을 호령한 ‘P2'를 만들어냈다. 모터스포츠 초기에 가장 성공한 메이커로 꼽히는 피아트에서 12년 동안 활약한 자노의 P2는 명성에 걸맞게 데뷔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드라이버 안토니오 아스카리가 크레모나 레이스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1925년 스파프랑코르샹에서 열린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P2의 성능은 압도적이었다. 이에 고무된 자노는 피트에서 미캐닉이 차를 손질하는 동안 팀 드라이버들을 불러들여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그 뒤로도 알파로메오는 이런 잔치를 계속했다. 그러나 몽트렐리의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알파로메의 운명은 바뀌었다. 에이스 아스카리가 목숨을 잃어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놓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매뉴팩처러즈 타이틀은 여전히 알파로메오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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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노의 또 다른 작품은 ‘알파 티포 B’였다. 1932년 데뷔한 뒤 34년까지 출전한 그랑프리를 모조리 휘어잡은 걸작이었다. 소속 드라이버로는 루돌프 카라치올라와 많은 전문가들이 사상 최고의 드라이버로 꼽는 타지오 누보랄리를 들 수 있다. 1933년 알파로메오는 국유화되어 모터스포츠에서 정식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페라리는 준워크스 팀으로 계속 출전했다.

알파로메오가 잠시 사라진 뒤 메르세데스와 아우토 우니온 등 독일세력이 서킷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에 맞서 누보랄리는 티포 B를 몰고 뛰어난 성적을 올렸다. 1935년 독일 그랑프리의 승리는 그의 드라이버 활동 중 절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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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알파로메오는 다시 모터스포츠 출전권을 장악했지만 2차대전이 터졌다. 1930년대 말 독일계가 그랑프리를 휩쓸자 지아오키노 콜롬보가 알파로메오 ‘티포 158’을 설계했다. 39년 소형 봐트레트급에 출전할 경주차였다. 2차대전의 독일 점령 기간 중 티포 158은 어느 치즈공장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전후의 새 규정에 따라 이 차는 그랑프리에 출전해 40년대 후반을 석권했다. 26연승이라는 찬란한 전과를 거둔 명작이었다.

알파 158은 태어난 지 13년이 되는 1951년 수퍼차저를 단 ‘159’로 탈바꿈했다. 159는 시즌 최종전 스페인 그랑프리에 나가 후안 마누엘 판지오에게 첫 번째 세계 타이틀을 안겨주었다. 라이벌은 페라리의 알베르토 아스카리와 프로일란 곤살레스, 피에로 타루피였다. 그러나 이것이 159의 최종전이었고, 이후 알파로메오는 스포츠카 레이스로 방향을 돌렸다. 

1970년대 중반 직렬 12기통 스포츠카 엔진이 F1 팀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때 페라리의 독주를 지켜보던 다른 팀들은 그와 비슷한 구조의 엔진을 찾고 있었다. 전직 페라리 엔지니어 카를로 키티가 알파로메오의 엔진 개발 책임자였다. 그는 버니 에클레스턴과 협상을 벌여 브라밤 팀에 엔진을 공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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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토델타가 키티의 업체 겸 알파 레이스 운영조직이었다. 브라밤-알파는 좋은 성적을 올리기 시작했다. 부자들의 스포츠에 반기를 드는 노조운동이 벌어졌지만, 알파로메오는 스포츠 사업의 이득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1979년 브루노 자코멜리가 못생긴 ‘티포 177’을 졸더에서 열린 벨기에 그랑프리에 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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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밤이 포드 엔진으로 돌아섰을 때, 신형 ‘티포 179’ 섀시에는 신형 알파 V12rk 얹혔다. 자코멜리가 파트릭 드파예와 합세해 전망은 밝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드파예가 호켄하임에서 테스트 도중 목숨을 잃었다. 자코멜리는 워트킨스 클렌에서 열린 미국 그랑프리에서 선두를 달리다가 경주차가 주저앉아 탈락했다. 이후 알파로메오는 전성기의 성공을 재현할 수 없었다. 1982년 안드레아 데 체자리스가 스파프랑코르샹의 벨기에 그랑프리를 잡았지만 그 뒤 알파로메오는 85년 F1 그랑프리를 떠날 때까지 단 1승도 추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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