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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이태리 세력에 대항한 영국 팀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6-01-29 07:09:06

본문

F1 브리티시 레이싱 모터스(British Racing Motors, BRM) 팀의 뿌리는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모터스포츠 강국인 이태리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BRM의 전신 ‘영국 모터 레이싱 연구 트러스트’가 태어났다.

BMRRT를 앞서서 이끈 레이먼드 메이스는 모터스포츠에 처음으로 영리적 후원자를 끌어들인 인물이다. 여러 기업과 손을 잡은 그는 1920년대에 영국 레이싱 오토모빌즈(ERA)를 지원했고, 30년대 들어서는 브리티시 레이싱 모터스와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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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ERM 팀은 공동출자로 세워졌다. ERM의 첫 작품은 수퍼차저 엔진을 얹은 600마력 엔진. 그러나 ERM의 레이스 데뷔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랑프리가 아닌 영국 실버스톤 인터내셔널 트로피에 참가했지만 드라이버 레이먼드 소머가 참담한 성적을 남겼다. 예선 꼴찌에다 결승 때는 경주차의 구동축이 부러지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운이 없는 BRM 팀이 경기장을 빠져나가자 관중들은 동전을 던지며 야유를 보냈다.

그래도 연구 트러스트는 1925년까지 서킷에 남아 있었다. 이후 영국의 알프레드 오웬경이 ERM을 인수해 전환점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렇다할 성적 없이 명맥을 유지한 ERM은 1960년대 들어 쿠퍼와 로터스의 손에 넘어갔다. 국제 모터스포츠계에서 영국을 정상에 올려놓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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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M은 단 1회의 그랑프리 우승기록을 안고 1962년을 맞았다. 1959년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조보니어가 거둔 우승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웬은 세계 타이틀을 따지 못하면 팀을 해체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내렸다. 

이 때문에 BRM의 창립 멤버였던 피터버손이 떠나고 대신 토니 러드가 들어왔다. 롤스로이스의 견습공 시절에 멀린 엔진 제작에 가담한 경험이 있는 그는 BRM의 기술총책과 팀 감독을 맡고 신형 BRM V8 엔진 개발에 단단히 한몫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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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년 BRM 팀의 에이스 드라이버는 그레이엄 힐이었다. 그는 신형 BRM 머신을 몰고 브뤼셀 그랑프리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브뤼셀에서 ERM은 좋은 기록을 내 신형 머신의 잠재력을 확인했다. 그 뒤 실버스톤의 인터내셔널 트로피에서 짐 클라크의 로터스를 간발의 차로 물리쳤다. 

뒤이어 BRM은 네덜란드 잔드부르트에서 열린 62년 F1 그랑프리 개막전에서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이후 G. 힐은 독일 그랑프리에서 다시 표창대 정상을 밟았고, 이어진 이태리 몬자 레이스에서는 팀 동료 리치 긴더와 함께 BRM에 원투승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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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부터 J. 클라크의 로터스와 G. 힐의 타이틀전에 불이 붙었다. 팽팽히 맞선 두 라이벌이 대결을 벌인 남아프리카 그랑프리 초반, 클라크가 기선을 잡고 힐이 뒤따랐다. 그러나 엔진 고장으로 클라크가 탈락하자 타입 578을 몰고 나간 힐이 우승했다. 결국 62년 F1 그랑프리는 4승을 거둔 힐이 월드 챔피언에 올랐고 소속팀 BRM도 컨스트럭터즈 정상을 차지했다. 

이듬해 클라크는 그랑프리 서킷을 휩쓸면서 62년 패배를 설욕했다. BRM이 최초의 모노코크 경주차 P261을 앞세워 반격에 들어갔지만 힐이 거둔 2승으로 클라크에 제동을 걸 수는 없었다. 클라크가 1963∼64년 연속 세계 챔피언이 된 반면 힐의 BRM은 우승권과 멀어졌다. 타이틀 2연패를 꿈꾸던 BRM은 63년 최종전에서 반디나에게 뼈아픈 일격을 맞았다. 서티스의 젊은 페라리 동료 로렌즈 반디니의 공세에 걸려 3위에 그친 것이다. 그 뒤 힐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반디나에게 ‘운전법’ 교습서를 보냈다는 소문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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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신형 3리터 포뮬러가 등장하자 BRM의 기술총책 토니 러드는 H16 엔진을 개발했다. V8 엔진 2개를 아래 위로 겹치고 실린더 뱅크를 수평으로 놓은 H16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68년 BRM은 할 수 없이 재래식 V12 엔진으로 그랑프리에 나갔다.

이즈음 BRM의 섀시는 시대에 조금 뒤쳐졌다. 이 때문에 유능한 청년 디자이너 토니 사우스게이트를 불러들여 P153과 P160 섀시를 맡겼다. 이를 바탕으로 BRM은 다시 선두그룹에 돌아왔다. 1970년 스파프랑코르샹의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페드로 로드리게스가 크리스 에이먼과 접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1973년 젊은 유망주 니키 라우다가 BRM에서 데뷔해 몇 차례 좋은 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이듬해 말 오웬 임원회가 지원을 중단하자 BRM의 파국이 다가오고 있었다. 루이스 스탠리가 팀을 끌어가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77년 마침내 두 손을 들었다.

신형 P207이 제때 나오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새차가 나왔을 때 코니 앤더슨과 테디 필리트는 예선마저 통과하지 못했다. 마침내 스폰서였던 로터리 워치즈가 지원을 철회해 BRM의 그랑프리 활동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BRM의 고별무대는 래리 퍼킨스를 앞세운 77년 남아프리카 그랑프리였다. 

BRM의 F1 그랑프리 출전기간은 27년. 이 기간 드라이버 54명이 BRM을 거쳐갔다. 1951∼77년까지 활약하면서 498경기를 뛰었고, G. 힐이 우승한 1962년 컨스트럭터즈 챔피언에 오른 것이 최고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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