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들라쥐는 20세기 초 레이싱 무대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프랑스의 위대한 자동차 제작자로 칭송받고 있다. 1905년 파리 교외에 작은 자동차 공장을 차린 그는 이듬해 1호차"/> 루이 들라쥐는 20세기 초 레이싱 무대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프랑스의 위대한 자동차 제작자로 칭송받고 있다. 1905년 파리 교외에 작은 자동차 공장을 차린 그는 이듬해 1호차"/> 20세기 초 서킷을 뒤흔든 프랑스 메이커 > 김병헌의 모터스포츠 강의실 | 글로벌오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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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20세기 초 서킷을 뒤흔든 프랑스 메이커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6-02-23 14:40:03

본문

루이 들라쥐는 20세기 초 레이싱 무대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프랑스의 위대한 자동차 제작자로 칭송받고 있다. 1905년 파리 교외에 작은 자동차 공장을 차린 그는 이듬해 1호차를 선보였고 1913년 르망에서 열린 그랑프리에서 메르세데스를 누르고 원투피니시를 기록했을 뿐 아니라 이듬해에는 미국 인디500을 석권했다. 1923년 등장한 V12 110마력 엔진은 25년에 수퍼차저를 더해 더욱 강력해졌고 프랑스와 스페인 그랑프리 우승컵을 안았다. 

루이는 산당한 재력가였지만 그랑프리 경주차 제작에 너무 많은 돈을 쏟아 부어 어려움에 처했다. 1926∼27년 4대의 경주차에 투입한 자금이 무려 3만6,000파운드. 당시로는 누구나 놀랄만한 엄청난 돈이었다.

1926년에 나온 15S8은 무척 정밀한 직렬 8기통 엔진을 운전석이 오른쪽으로 치우친 독특한 섀시에 얹었다. 루이 들라쥐와 사촌지간이던 프란숀은 이미 이보다 복잡한 V12 엔진을 설계해 1923년 들라쥐 경주차에 얹었었다. 2LCV라 불린 이 모델은 1925년까지 활약하며 프랑스와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랑프리 규정이 2.0리터에서 1.5리터로 바뀌고 루이와 프란숀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새 엔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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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들라쥐는 새로운 엔진 개발담당으로 알베르 로리를 영입했다. 그와 함께 이적한 로베르 브노와는 뒷날 들라쥐를 대표하는 에이스 드라이버로 성장하게 된다. 로리는 프란숀이 만든 V12 엔진의 배기량을 줄이는 것은 효율이 떨어진다고 판단해 직렬 8기통 엔진을 새로 개발했다. 그가 설계한 엔진은 철제 실린더 헤드와 블록을 경합금 크랭크 케이스 위에 고정한 형태로, 2개의 캠샤프트를 끝에 달린 스퍼기어로 움직여 16개의 밸브를 여닫았다. 

엔진 왼쪽에 달린 2개의 루츠 타입 수퍼차저는 기어와 샤프트로 구동되어 0.53kg/㎠의 압력으로 공기를 밀어주었다. 연료는 휘발유에 알코올과 벤졸, 에테르를 섞어 최고출력 165마력, 리터당 110마력의 높은 성능을 자랑했다. 회전저항을 줄이기 위해 베어링을 갖춰 최고회전수가 8,000rpm이나 되었다. 출력은 다판식 클러치를 거쳐 수동 5단 트랜스미션으로 이어졌다. 4단의 기어비가 1,000이었고 5단은 오버 드라이브.

섀시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강판 소재의 채널 프레임으로, 가볍기는 했지만 강도가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드라이브 샤프트가 중심선을 지나가기 때문에 운전석을 오른쪽 낮은 곳에 마련했고, 차체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배기관은 격벽을 사이에 두고 페달과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자리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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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구조적인 문제는 데뷔전인 유럽 그랑프리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43도에 이르는 폭염 속에 진행된 그랑프리에서 들라쥐 15S8은 높은 출력을 바탕으로 빠른 스피드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취약한 운전석은 배기관에서 나오는 복사열과 전도열로 뜨겁게 달구어져 드라이버를 괴롭혔다. 앙드레 모렐은 발에 화상을 입어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브노와의 루이 와그너도 의식을 읽고 피트에 쓰러져 동료들이 찬물로 몸을 식히느라 부산을 떨어야 했다. 반면에 거주성이 좋았던 부가티는 큰 문제없이 달릴 수 있어 경기가 지속될수록 격차가 크게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8월에 브루클랜즈에서 열린 제1회 영국 그랑프리에서 첫 우승과 함께 3위를 차지했지만 경주차의 고질적인 문제는 여전했다. 이태리 그랑프리에서 나쁜 성적을 낸 뒤 개량에 들어간 들라쥐는 우선 엔진 배기 매니폴드의 자리를 바꾸었다. 로리는 포트 위치를 반대로 바꾼 뒤 구동계를 왼쪽으로 10cm 정도 옮겨 운전석 공간을 넓혔다. 수퍼차저를 1개로 줄이는 한편 용량을 키우고 자리를 엔진 위로 바꿨다. 이렇게 하니 출력은 170마력으로 높아져 리터당 출력이 113마력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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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성이 좋아지고 출력도 높아진 신형 경주차 덕분에 들라쥐의 드라이버들은 활력을 얻었다. 특히 로베르 보와노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워크스 카가 완성된 뒤 출전한 1927년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들라쥐 팀이 1∼3위를 석권했다. 우승은 브노와, 2위는 브루리에, 3위는 모렐이었다. 

브노와만 출전한 이태리 그랑프리에서는 부가티와 탈보 등 주요 라이벌이 불참해 가볍게 우승컵을 안았다. 영국 그랑프리에서는 루이 들라쥐가 서킷을 방문해 자신이 만든 차들이 1∼3위를 휩쓰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1927년 유럽 그랑프리 챔피언십을 차지한 들라쥐는 경영문제 등을 이유로 레이스 퇴진을 결정했다. 워크스 팀에서 쓰던 15S8은 프라이비터에게 팔려 계속 서킷에서 활약했다. 속도기록 도전으로 유명한 말컴 캠벨이 한 대를 사 1928년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이듬해 루이 시롱이 인디500에서 7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캠벨의 머신은 뒤에 영국 브루클랜즈 서킷에서 이름을 날린 W.B. 스코트에게 팔렸다. 또 한 대는 프랑스인 라울 드로반에게 팔려 1929년 모나코 그랑프리에 출전했다.
 
하우경도 들라쥐를 사 레이스에서 활약한 인물 중 하나였다. 1932년 몬자에서 큰 사고를 일으켜 구동계 부품만 건진 그는 루이 시몽이 몰던 차를 더 사들여 1935년까지 레이스에 참가했다. 딕 시만에게 넘어간 이 머신은 알파로메오 엔지니어로 활동하던 줄리오 람포니의 손에 들어가 많은 부분이 개조되었다. 두랄루민 휠과 신형 라디에이터, 연료탱크, 2LCV에서 떼어낸 경량 5단 변속기를 달아 차체를 가볍게 하면서 섀시를 보강했다. 8기통 엔진은 수퍼차저 과급압을 0.84kg/㎠로 높여 185마력의 최고출력을 냈다. ‘시만-들라쥐’라 불린 이 머신은 영국 도닝턴 파크에서 열린 단거리 레이스를 시작으로 뉘르부르크링의 아이펠레넨 그리고 페스칼라와 루벤 등 다양한 무대의 1,500cc 클래스에서 우승컵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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