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자동차 메이커 푸조는 원래 15세기부터 대대로 피치(나무 진의 일종)를 채집, 판매해 오다 1810년 철물사업에 손대면서 갑작스럽게 규"/> 프랑스의 자동차 메이커 푸조는 원래 15세기부터 대대로 피치(나무 진의 일종)를 채집, 판매해 오다 1810년 철물사업에 손대면서 갑작스럽게 규"/> 세계 최초 레이스의 주역 메이커는? > 김병헌의 모터스포츠 강의실 | 글로벌오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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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세계 최초 레이스의 주역 메이커는?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6-02-29 09:24:41

본문

프랑스의 자동차 메이커 푸조는 원래 15세기부터 대대로 피치(나무 진의 일종)를 채집, 판매해 오다 1810년 철물사업에 손대면서 갑작스럽게 규모가 커진 가족기업이다. 19세기에는 남프랑스의 발렌티네에서 각종 공구와 태엽, 패티코트용 강철심 등을 만들었다. 


푸조가(家)의 일원이었던 아르망 푸조는 영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자전거 시장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보고 가족들을 설득해 1885년부터 다양한 자전거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또 모터레이션의 유행을 예측하고 증기 엔진을 얹은 3륜 자동차를 만들어 1889년 파리대 박람회에 전시했다. 그곳에서 다임러 엔진을 보고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힌 아르망은 1891년 휘발유 엔진을 얹은 푸조 다임러 1호차를 선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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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푸조는 메이커들을 설득해 최초의 레이스라 할 수 있는 파리-루앙 트라이얼을 개최했다. 이 경주에서 드디옹 백작의 증기차가 우승하고 2대의 푸조가 2, 3위를 차지했지만 드디옹이 미캐닉의 지속적인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후보에서 탈락, 결국 우승컵이 푸조에게 돌아갔다. 같은 해 드디옹 백작은 자동차 제조업자 19명을 초빙해 프랑스 자동차 클럽(ACF)을 조직하고 이후 다양한 레이스를 열게 된다.

1910년 부아뜨르트(그랑프리보다 소형 엔진을 사용) 레이스에서 이스파노 스이자와 경쟁을 벌였던 푸조는 참패를 맛보았다. 하지만 이스파노 스이자가 곧 레이스 무대에서 퇴진하면서 푸조에게 새로운 시회가 다가왔다. 푸조팀 드라이버였던 조르부 보와로와 줄 구는 이스파노 스이자의 엔지니어 겸 레이서로 활동하던 주카렐리를 끌어들이면서 경주차 개발을 위한 별도 조직을 만들었다. 보와로와 구, 주카렐리가 주축을 이루고 스위스인 엔지니어 에르네스트 앙리가 힘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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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이집트와 모로코를 나눠 갖기로 하지만 독일이 끼어들면서 국제분쟁(모로코 사건)으로 이어졌고 그 영향으로 무역활동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 이 때문에 ACF는 1908년 그랑프리를 취소했다가 1912년에 부활시킨다. 프랑스 디에프에서 열린 1912년 그랑프리는 부아뜨르트 레이스와 동시에 개최되었다. 앙리와 주카렐리는 양쪽에 모두 출전하기 위해 두 가지 엔진을 얹을 수 있는 신형 경주차를 설계했다.

주카렐리가 엔진회전수를 높이는데 주력해 흡배기 계통을 손보는 한편 앙리는 항공기 엔진 설계 경험을 살려 OHC 헤드와 4밸브, 반구형 연소실 등을 개발함으로써 효율 좋은 고회전 엔진을 만들어냈다. 헤드와 밸브 기어 레이아웃이 획기적인 이 엔진은 1910년 선보였던 푸조 리온 V4 부아뜨르트와 같은 110×200mm의 보어, 스트로크를 가지고 있었다. 배기량은 현재의 4기통 엔진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7.6리터. 2,200rpm에서 130마력의 최고출력을 자랑했다. 당시에는 좀 더 높은 출력을 얻기 위해 배기량을 무작정 늘리는 일이 성행해 1908년 메르세데스가 12.6리터로 135마력, 피아트가 S74가 14.1리터로 190마력을 냈다. 그에 비하면 푸조 엔진의 효율이 얼마큼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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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조는 L76 엔진을 U자형의 서브 프레임에, 변속기를 섀시 중앙에 얹었다. 브레이크는 당시 유행에 따라 페달 브레이크를 구동 샤프트에, 핸드 브레이크를 뒷바퀴 드럼 브레이크에 연결했다. 

이틀에 걸쳐 진행된 1912년 그랑프리에서는 애초 큰 배기량을 자랑하던 피아트가 우승후보를 꼽혔다. 그러나 보와로가 몬 푸조가 고장에 시달리면서도 이틀간의 레이스에서 1,539km를 평균시속 110.16km로 달려 우승컵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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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미국으로 진출해 인디500에 참가한 푸조는 규정에 맞추어 엔진 배기량을 7.4리터로 줄였다. 주카렐리는 리타이어 했지만 구가 이 차를 몰고 낯선 타원형 코스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인디500이 열리기 얼마 전 구는 L76 싱글시트 버전을 몰고 브룩랜즈 서킷에서 세계기록인 시속 177km를 내기도 했다. 당시 비행기의 최고기록이 시속 167.8km였으니 푸조의 기록은 엄청난 뉴스거리였다. 

푸조는 또 1913년 시즌을 위해 새로운 엔진 L56 개발에 열을 올렸다. 연료소비량(L76은 3.57km/ℓ나 되었다)을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드라이섬프식 윤활 시스템을 선택했는데, 가속이나 코너링 때 원활한 윤활작용은 물론 엔진 높이를 낮출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DOHC 구동은 샤프트+베벨기어 대신 기어를 썼고 보어와 스트로크도 바꿔 배기량을 5,654cc로 줄이면서 115마력의 최고출력을 냈다. 리터당 출력은 17.1마력에서 20.4마력으로 올랐다. 한편 부아뜨르트용 3리터 엔진은 90마력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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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7월 아미앙에서 열린 그랑프리에서 경쟁차 들라쥐는 푸조보다 빠른 속도로 달렸다. 하지만 종합적인 면에서 푸조가 뛰어나 보와로가 구가 원투 피니시를 기록했다. ACF 그랑프리를 2연패함으로서 푸조의 이름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아미앙에서 몰았던 L56과 함께 인디500에 다시 출전한 구는 이번에는 보와로가 타이어 때문에 고생하는 사이 들라쥐가 우승컵을 안고 말았다. 2위에 오른 것은 프라이비트 자격으로 푸조 부아뜨리트를 몰고 출전한 아서 듀레이였다. 

1차대전 직전 열린 1914년 프랑스 그랑프리에서는 신형 L45를 몬 보와로가 메르세데스와 맹렬한 선두경쟁을 벌였다. 푸조는 네 바퀴 브레이크를 썼지만 길게 튀어나온 뒷부분에 스페어 타이어 2개를 달았기 때문에 접지력과 핸들링에서 문제를 드러냈다. 타이어 선택까지 잘못한 상황에서 보와로는 초인적인 드라이빙 테크닉을 선보이며 선두를 달렸지만 경주차 리어 액슬이 마지막 1랩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결국 메르세데스가 1∼3위를 차지했다.

한편 푸조는 인디500에 꾸준히 출전해 1916년 다리오 레스타가 우승했고 1차대전 후 재개된 1919년 경기에서는 인디애나폴리스 스피드웨이 팀의 하우디 윌콕스가 푸조를 몰아 1위를 했다. 현대적인 고회전형 엔진의 기초를 다졌다고 평가되는 푸조는 유럽은 물론 미국의 초창기 레이싱카 기술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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