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오토뉴스

상단배너

  • 검색
  • 시승기검색
ä ۷ιλƮ  ͼ  ī 󱳼 ڵδ ʱ ڵ 躴 ͽ ǽ ȣٱ Ÿ̾ Auto Journal  Productive Product
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차와 영광과 죽음을 함께 한 드라이버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6-03-24 07:14:05

본문

F1 그랑프리는 1950년 영국 실버스톤에서 첫 번째 대회를 치렀다. 개막 경기의 주인공이자 월드 챔피언 리스트의 맨 첫 자리에 이름을 올린 인물은 주제나 파리나였다. 팔을 쭉 뻗고 머리를 뒤로 젖힌 독특한 레이스 스타일은 부드럽고 정확한 운전이 가능해 F1 레이서를 비롯해 스포츠 드라이빙의 교과서가 되었다. 파리나는 레이싱카를 환상적으로 몰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사고가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그는 사고 후유증으로 F1 무대를 떠났으며, 환갑을 얼마 안남기고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니노’(Nino)라는 애칭으로 불린 그는 자신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해 항상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칭찬이나 격려의 말에 몹시 인색한 차가운 성격이었다. F1 첫 해의 영광과 달리 1951년 이후에는 J.M. 판지오와 A. 아스카리에 가려 오랫동안 빛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알파로메오와 페라리에서 보낸 6년의 길지 않은 기간 동안 20회 표창대에 올랐다. 우승 다섯 번에 1회 월드 챔피언을 차지했다. 

286409db052ff334d68ed5cd6a5d6c51_1458771

주제페 파리나는 1906년 이태리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파리나의 아버지 지오반니는 ‘스타빌리멘티 파리나’라는 자동차공장을 설립했고, 삼촌인 바티스타 파리나는 이태리 최고의 카로체리아 ‘피닌파리나’의 설립자다. 차를 가까이하기에 아주 좋은 배경을 갖고 있어 레이스 진출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시작은 빠르지 않았다. 

주제페 파리나는 어릴 때부터 스포츠를 좋아해 승마, 스카, 육상, 축구, 사이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두뇌 또한 명석해 정치학 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파리나가 처음 레이스를 접한 것은 26세 때인 1932년. 알파로메오 1500을 몰고 힐클라임 경기에 출전한 것이 시작이다. 데뷔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어깨뼈가 부러지고 얼굴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은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겪게 될 수많은 사고 중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파리나는 레이스를 그만두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일을 집어치우고 레이스에 집중했다. 

1933년 다시 레이스 무대로 돌아온 그는 34년말 마세라티 4CM을 타고 이태리 ‘비엘라 서킷 레이스’에서 3위를 차지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어 그랑프리에 도전했다. 당시 독일 메이커들이 그랑프리를 점령하자 이태리팀들은 1.5리터의 부아트르트 클래스를 만들어 돌파구를 찾았다. 파리나는 체코 그랑프리에서 이 클래스에 출전해 당당히 표창대 중간 자리에 섰다. 메이저 경기에서의 첫승이었다.

286409db052ff334d68ed5cd6a5d6c51_1458771

1936년 스쿠데리아 페라리에 들어가기 전까지 마세라티와 알파로메오를 타면서 팀에 소속되거나 개인 출전을 계속했다 그러다 페라리팀에 입단, 전설의 드라이버 T. 누보랄리를 만나 정식으로 레이싱을 배웠다. 곧 파리나의 실력은 몰라볼 정도로 발전했다. 그는 1937년 나폴리 그랑프리를 우승으로 이끌고, 38년 알파로메오의 주전 드라이버로 들어가 1937∼39년까지 이태리 챔피언을 차지했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트리폴리에서의 우승을 마지막으로 레이스를 중단했다. 

전후 다시 알파로메오와 함께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1946년 그랑프리 드 나시온(제네바)에서 트윈 슈퍼차저가 달린 158/4B 경주차를 몰고 또다시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성격이 부드럽지 못한 파리나는 팀 지도부와 불화를 일으켜 다음 해에 팀을 떠났다. 1948년 후반 페라리로 다시 들어간 그는 페라리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한 12기통 경주차 125를 타고 출전한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페라리에 첫승을 선사했다. 

1950년 당시 유럽 각국에서 개별적으로 열리던 그랑프리 레이스를 같은 규정으로 묶어 F1 그랑프리가 탄생했다. 파리나는 팀 리더로 알파로메오에 복귀해 158을 타고 영국 그랑프리를 폴투피니시로 장식했다. 이어서 스위스, 이태리 우승까지 휩쓸어 F1 사상 첫 번째 월드 챔피언에 올랐다. 그의 나이 44세 때였다.
 
286409db052ff334d68ed5cd6a5d6c51_1458771

파리나는 팀 메이트 J.M. 판지오, R. 파지올리와 함께 그랑프리를 주름잡았다. 세 명의 강자는 그랑프리 세계에서 ‘3F’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다른 레이서들을 떨게 만들었다. 그러나 1951년 이후 젊은 A. 아스카리와 J.M. 판지오에 가려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된다. 알파로메오가 1957년 F1에서 철수하자 다시 페라리의 문을 두드렸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팀 리더가 아니라 아스카리에 이은 두 번째 자리였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파리나는 1953년 그의 경력에 우승을 한 번 더 추가하고 1955년 F1 은퇴를 결정했다. 밀레 밀리아에서 입은 화상 때문에 진통제로 고통을 달래며 세 번 표창대에 올랐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1956∼57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인디500의 문을 두드렸으나 예선탈락이라는 굴욕적인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 이를 계기로 그는 완전히 레이스를 떠났다. 그 후 파리나는 이태리에서 재규어와 알파로메오의 에이전트 일을 했다. 그리고 삼촌이 운영하던 피닌파리나와도 손을 잡았다.

1966년 그는 프랑스 그랑프리를 보기 위해 로터스 코티나를 몰고 가던 도중 전봇대에 부딪치는 사고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환갑이 몇 달 남지 않은 때였다. 첫 경기에서 사고를 당했고,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으니 자동차와 모진 인연이 아닐 수 없다.

 

286409db052ff334d68ed5cd6a5d6c51_1458771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하단배너
우측배너(위)
우측배너(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