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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기술전쟁 일으킨 750kg 포뮬러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6-04-28 01:31:35

본문

메르세데스의 모터스포츠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모델이 W125이다. 1936년 시즌을 형편없는 성적으로 마감했던 벤츠는 1937년 재기에 성공했다. 그것도 750kg 포뮬러의 마지막 시즌이 되었던 37년에 전설적인 타입 W125로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슈투트가르트의 벤츠 엔지니어들은 W125를 기술과 디자인 두 방면에서 가장 진보된 경주차로 완성했다. 8기통 5,660cc 슈퍼차저 엔진으로 646마력을 자랑한 W125는 리터당 114마력과 톤당 850마력을 내는 매우 인상적인 엔진성능을 보였다.

벤츠의 디자이너들은 수십 년간 W125를 능가하는 차가 없을 만큼 뛰어난 경주차를 만들어냈다. 1965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보비운스가 몰았던 8기통 2,800cc(775마력)의 노비퍼구슨이 나오기 전까지 세계 최고의 성능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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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125의 제작에 참가했던 루돌프 울렌하우트는 1955년까지 그랑프리에 출전했던 경주차 제작에 몸담은 베테랑이다. 그는 직접 시험차를 모는 것도 주저하지 않은 열성파이기도 했다.

벤츠 W125는 강철로 만든 타원형 디자인으로 이전모델과 비슷했다. 4단 수동 트랜스미션과 ZF 리미티드 슬립 디퍼렌셜을 달아 1단에서 시속 120km, 2단 185km, 3단 215km 그리고 4단에서 270km를 달렸다. 특별히 세팅된 기어비로 달리면 300km까지 가능했다. 공기역학적인 유선형 디자인으로 아부스에서 속도갱신도 가능한 시속 400km를 냈다. 

독립식 서스펜션의 앞 더블 위시본과 뒤 드디옹 액슬을 썼다. 구동력은 더블 유니버설 조인트를 통해 뒷바퀴에 전달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벤츠는 1937년 독일, 스위스, 이태리, 체코 그랑프리에서 우승해 다시 한번 이목을 집중시켰다. 벤츠는 그랑프리에 출전해 몇 종류의 세계 최고기록을 세웠다. 아우토우니온도 신기록을 놀랍게 변신한 벤츠의 아성을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6년 시즌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아우토우니온의 C타입 16기통은 최고출력을 조금 높였을 뿐 성능이 개선되지 않아 영국의 밴더빌트컵에서 우승하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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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로메오 타입C도 몇몇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신형 12기통 모델이 늦게 발표되어 참가횟수는 그만큼 줄어들었다. 4,495cc의 배기량에 430마력의 12C/37은 타입 8C보다 작고 낮게 설계되었다. 신형 12C 알파는 1937년 8월 15일 페스카라 대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서 9월 12일 이태리 대회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몬자 레이스에서는 드라이버인 구도티가 많은 실수를 해 레이스를 포기했다.

기술진들은 공장으로 돌아온 경주차를 손보는 과정에서 섀시의 강도가 설계보다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각 부서간의 책임전가 등으로 갈등을 빚다가 디자인 책임자인 비토리오 야노가 사표를 내고 란치아로 옮기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12C의 섀시 강성이 개선되었고 1938년에 등장한 신형 3,000cc 모델의 기본이 되었다.

마세라티는 37년 시즌을 별 소득없이 보냈다. 새차는 강성이 지나치게 높았고 회사도 재정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부가티의 몰락은 37년에도 계속되었다. 부가티는 아주 가끔 경기에 참가했고 성적도 저조했다. 부가티는 경주차 현대화 노력을 게을리한 결과를 톡톡히 맛보며 경쟁력 상실을 가슴 아파했지만 재기는 이미 늦었다. 

시즌의 백미는 독일의 아부스 트랙레이스였다. 힡틀러의 제안에 따라 굴곡코스를 변경해 열린 경기에는 벤츠와 아우토우니온의 새 유선형 경주차들이 모습을 들어낸 대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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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길이가 19.6km에서 19.363km로 줄어들었지만 자전거 경기장처럼 벨로드롬으로 만들어 평균시속이 높아지는 등 박진감을 더했다. 독일 관중들이 환호를 올리는 가운데 벤츠의 헤르만 랑은 아우토우니온의 에른스트 델리우스를 1.6초차로 따돌리고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로제마이어는 그 당시로는 깨기 힘든 시속 276.4km로 코스를 일주하는 기록을 세웠다.

750kg 포뮬러는 1937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이 기간 동안 모터스포츠는 엄청난 기술발전을 이루었다. 무게제한으로 작은 엔진을 얹어야 해서 출력이 줄었지만 이에 대응해 강력한 엔진을 개발해낸 각 메이커들의 노력은 높이 살만하다. 750kg 포뮬러는 디자인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무게제한에 따른 경량화는 디자인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고 서스펜션과 섀시의 진보도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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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간 동안 초경량 프레임, 독립식 서스펜션, 리미티드 슬립 디퍼렌셜, 코일 스프링, 토션바, 앞뒤 크기가 다른 타이어, 고압 쿨런트 등이 개발되었지만 엄청난 연료소비로 실용화하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벤츠 경주차는 특수연료로 100km를 가려면 160리터의 연료가 필요했다, 

이 기간에 개발된 고성능 경주차는 고속에 맞는 브레이크와 타이어 개발이라는 과제를 안겨주었다. 빠른 속도를 제어하고 코너링에서 효율적인 그립을 얻기 위해서는 이에 맞는 브레이크와 타이어가 필요했다. 따라서 750kg 포뮬러의 승자는 레이서들이라기보다는 가장 효율적인 성능을 끌어내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브레이크와 타이어 개발에 힘을 다했던 엔지니어들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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