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트레비소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베네통이 자동차경주 팀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자동차경주의 최정상 클래스인 F1 그랑프리에서 말이다. 지금부터 그 이"/> 이탈리아 트레비소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베네통이 자동차경주 팀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자동차경주의 최정상 클래스인 F1 그랑프리에서 말이다. 지금부터 그 이"/> ‘화려한 외출’, 패션 브랜드의 F1팀 > 김병헌의 모터스포츠 강의실 | 글로벌오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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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화려한 외출’, 패션 브랜드의 F1팀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6-04-29 10:40:33

본문

이탈리아 트레비소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베네통이 자동차경주 팀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자동차경주의 최정상 클래스인 F1 그랑프리에서 말이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본다. 
 
1986년 시작된 베네통 팀의 역사는 2001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2002년부터 르노가 F1 그랑프리 전면에 나서면서 베네통 깃발을 내린 것이다. 16년 동안 베네통이 거둔 최고성적은 1회 컨스트럭터즈 챔피언(1995년)과 27승, 520경기에 출전해 861점을 얻고, F1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었다. 경쟁 팀들에 비해 훌륭한 전적을 쌓지는 못했지만 1994∼95년 M. 슈마허를 드라이버즈 챔피언에 올리면서 명성을 드높였다. 

베네통 팀은 이태리 북부 트레비조에 본거지를 둔 패션업체 ‘베네통’이 창설했다. 창업자 루치아노 베네통은 화려한 색상의 니트 제품으로 1980년대 패션계를 제패하며 거대한 의상제국을 세웠다. 죽은 크로아티아 병사의 피에 젖은 군복을 비롯한 파격적인 광고를 내는 등 특유의 추진력으로 화제를 몰고 다녔다. 유럽을 비롯한 세계로 체인점을 늘인 루치아노는 F1 그랑프리를 제품홍보에 이상적인 수단으로 판단하고, 80년대 초 티렐, 톨레만, 알파로메오 팀을 지원했다. 그 뒤 86년 톨레만 팀을 사들이면서 베네통으로 이름을 바꿔 F1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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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 터보 엔진을 얹은 베네통은 막강한 파워를 자랑했다. 베네통의 첫 승리는 풀 시즌 첫 해인 86년 F1 제15전 멕시코 그랑프리. 에이스 드라이버 게르하르트 베르거가 A. 프로스트와 A. 세나, N. 피케 등을 따돌리고 첫 우승컵을 따냈다. 

80년대 말 베네통은 더욱 강력한 라인업 구축에 나섰다. 89년 이태리계 알레산드로 나니니를 에이스로 맞아들였고, 팀 감독 피터 콜린스는 F3000 드라이버 조니 허버트를 불러 들여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플라비오 브리아토레가 베네통 팀의 지휘관으로 들어오면서 사태가 돌변해 콜린스와 허버트는 일선에서 밀려났다. 

브리아토레는 허버트를 몰아낸 뒤 에마누엘레 피로를 영입했다. 썩 잘했다고 할 수 없는 팀 재편이었지만 그 해 나니니는 아이르톤 세나가 실격 당한 뒤 말썽 많은 일본 그랑프리를 제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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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베네통은 세계 챔피언 넬슨 피케(3회)를 스카우트했다. 피케는 F1 생활의 황혼기에 접어들었음에도 몇 차례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A. 세나와 A. 프로스트가 충돌했던 일본 그랑프리에서 베네통은 다시 행운의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창단 5년을 넘긴 베네통의 91년은 일대 전환기였다. 당시 22살의 젊은 미하엘 슈마허가 F1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독일 F3 챔피언에 마카오 그랑프리 우승자였던 슈마허는 벤츠 스포츠카 주니어 팀의 일원이었다. 원래 슈마허는 스파프랑코샹에서 조단 드라이버로 F1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가 예선에서 7위룰 하자 쟁쟁한 F1 드라이버들이 깜짝 놀랐다.

한 동안 뚜렷한 전과를 올리지 못한 베네통은 이태리 몬자 서킷에서 졸전을 벌인 뒤 조단의 슈마허를 빼내어 장기계약을 맺었다. 기술감독 톰 워킨쇼는 재규어 스포츠카 팀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슈마허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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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의 미하엘 슈마허는 처음부터 위력을 발휘했다. 팀에 합류하자마자 넬슨 피케를 앞질렀고 자주 득점권에 들었다. 베네통은 슈마허가 챔피언이 될 재목이라고 굳게 믿었다. 브리아토레는 새로운 기술센터를 만들면서 베네통 팀 지원을 강화하자고 제의했다.

하지만 92년 슈마허는 드라이버즈 타이틀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액티브 서스펜션을 먼저 완성한 윌리엄즈 팀의 나이젤 만셀과 레카르도 파트레제가 타이틀전에서 원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악조건 속에서 슈마허는 92년 F1 제12전 스파프랑코샹 그랑프리를 승리로 이끌어 팀의 신뢰를 더욱 굳건히 다졌다.

93년 베네통은 세미 오토 기어박스와 액티브 서스펜션을 도입해 큰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우승을 거둔 모나코 그랑프리 이전까지 트랙션 컨트롤을 얹지 못해 윌리엄즈의 선두주자 알랭 프로스트를 막을 수 없었다.

94년 시즌의 막이 오르면서 베네통 B194는 ‘빅4’로서 처음 각광을 받았다. 포드 제텍-R V8 엔진으로 무장한 베네통의 슈마허는 초반 1∼4전을 가볍게 휩쓸었다. 서킷의 황제 세나가 이몰라에서 숨지자 슈마허는 맞수가 없는 F1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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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F1 정상 드라이버를 노리는 슈마허는 이후 영국 그랑프리에서 흑기를 무시해 2경기 출장정지 페널티를 받았다. 뒤이어 스파프랑코샹에서는 경주차의 기술적인 문제로 탈락했다. 슈마허는 라이벌 데이먼 힐을 1점차로 누른 채 최종전 애들레이드의 호주 그랑프리를 맞았다. 두 라이벌은 경기 도중 충돌로 동반 탈락. 고의 충돌이라는 일각의 눈총을 받으며 베네통 M. 슈마허는 개인통산 첫 드라이버즈 챔피언 트로피를 안았다. 

95년 베네통은 그토록 기다리던 첫 컨스트럭터즈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해 슈마허는 9승으로 세계 타이틀 2연패를 기록했고, 팀 동료 조니 허버트는 2승을 거두었다. 

이듬해 96년 장 알레지와 게르하르트 베르거가 슈마허와 허버트의 뒤를 이어 베네통에 들어왔다. 하지만 듀오는 베네통의 세계 타이틀을 이어가는 데 실패했다. 알레지가 시즌 최종전에서 충돌사고를 일으켜 페라리에게 컨스트럭터즈 부문 2위를 빼앗기자 브리아토레의 실망은 극에 달했다.

97년 베르거는 시즌 1승을 독일 그랑프리에서 거두었다. 그러나 노장 베르거는 98년 베네통에서 밀려나고 잔카를로 피지켈라와 알렉스 부르츠가 뒤를 이었다. 랠리 팀 감독 데이비드 리처즈가 사령탑에 올랐지만 시즌 말에 물러나고 오너의 아들 로코 베네통이 등장했다.

98년 이후 베네통은 깊은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강팀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F1 그랑프리에서 단 1승도 더하지 못했다. 피지켈라와 젠슨 버튼을 내세운 2001년, 베네통-르노는 겨우 10점을 얻는 데 그쳤다. 페라리-맥라렌-윌리엄즈가 막강 트리오에 눌려 정상권 도약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베네통 팀의 고별무대는 2001년 F1 제17전 일본 그랑프리였다. 이제 16년의 F1 활동을 접은 베네통은 피트가 아닌 스탠드에서 2002년 시즌을 맞는다. 베네통의 바통을 이어받은 르노 팀은 J. 트룰리와 J. 버튼을 태운 R202로 격전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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