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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화상 딛고 일어선 세계 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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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6-07-28 22:33:40

본문

3회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니키 라우다는 ‘돌아온 영웅’으로 불린다. 1976년 독일 그랑프리에서의 사고를 딛고 일어선 그에게 모터스포츠 팬들이 붙여준 별칭이다. 심한 화상을 극복한 그는 불굴의 투지를 앞세워 그랑프리에 복귀했고, 85년 F1 드라이버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25승을 쌓았다. 2000년대 초반에는 재규어 레이싱팀 오너로도 활동한 그는 F1의 ‘살아있는 신화’로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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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니키 라우다는 19세 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터스포츠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미니 쿠퍼를 타고 힐클라임에 도전했다. 그 후 빠른 차를 타고 싶어 할머니에게서 빌린 돈으로 포르쉐 911을 마련했다. 69년 본격적인 포뮬러 레이스를 시작했고 F3(1970년), F2(1971년)를 거쳐 F1까지 쉴 새 없이 달려나갔다.

라우다의 F1 데뷔는 이른 감이 있었다. 연륜이 짧은 그는 F2 마치팀에서 눈에 띄는 성적을 올리지 못했고, 자신감만 앞서 있었다. 그런 라우다에게 팀은 F1 데뷔 조건으로 많은 돈을 요구했다. 그는 71년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 데뷔전을 치른 후 다음해 경기 참가를 위해 팀에 많은 돈을 들였다. 그 돈은 모두 은행에서 빌린 것이어서 빚이 산더미처럼 늘어났다.

가족들이 은행에서 더 이상 돈을 빌리지 못하도록 만들자 은행 간부를 따로 만나서 거래를 계속했다. 은행의 로고를 헬멧에 붙이고 레이스에 나가는 조건으로 대출을 받되 5년 동안 나눠 갚는다는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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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경쟁력이 떨어지는 마치팀의 경주차로는 그의 꿈을 이루기 힘겨웠다. 12경기를 뛴 72년 그는 단 1점도 따지 못했다. 그런 라우다에게 73년 구세주가 나타났다. 젊은 드라이버가 필요했던 BRM에서 팀의 세 번째 시트를 내준 것이다.

사기가 오른 라우다는 73년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5위를 낚아챘다. 영국 경기에서는 승리하지 못했지만 인상적인 레이스를 펼쳤다. BRM팀 오너 L. 스탠리는 라우다에게 만족감을 표시했고, 계속 뛸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라우다는 74년 페라리팀에 들어갔다. 73년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빗속을 역주하는 라우다를 보고 페라리가 시트를 제안한 덕이다. 라우다는 부진을 보이던 페라리를 다시 선두권으로 끌고 올라갔다. 그는 스페인에서 F1 첫승을 기록했고 네덜란드에서 2승을 챙겼다. 시즌 종합 순위는 4위였다. 9회 폴포지션을 감안할 때 적은 승수는 경험이 많지 않은데다 실수가 잦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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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F1 제10전 영국 그랑프리에서 라우다는 폴투윈을 노리고 있었다. 경기 도중 타이어에 문제가 생겨 피트로 돌아온 그는 어이없는 일을 당했다. 미캐닉들이 허둥거리며 시간을 끌어 우승컵을 J. 쉑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라우다는 화가 났고, 이어진 독일 경기에서는 무리한 추월을 시도하다 충돌사고를 일으켰다. 캐나다에서는 트랙에 묻어 있는 오일을 밟아 밖으로 나가떨어지는 일도 벌어졌다. 이 때문에 F1  평론가들은 그의 심성과 자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75년의 라우다는 이전과 달랐다. 겨울 동안 침착성과 노련미를 갈고 닦는데 힘을 쏟은 덕분이다. 라우다는 모나코, 벨기에, 스웨덴 그랑프리에서 3연승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그해 라우다는 첫 월드 챔피언에 올랐다.

76년은 그에게 시련의 해였다. 9전까지 5회 우승컵을 거두어 강력한 챔피언 후보로 꼽혔다. 그러나 10전 독일 그랑프리에서 부상을 입어 다잡은 타이틀을 놓치고 말았다. 코너에서 중심을 잃고 보호벽을 들이받은 후 다시 트랙으로 퉁겨 나와 뒤따르던 경주차와 충돌했다. 경주차는 화염에 휩싸였고, 동료 드라이버들이 정신을 잃은 라우다를 밖으로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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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고로 큰 화상을 입었지만 7주만에 다시 트랙에 복귀했다. 기적같이 빠른 회복을 보여주었지만 금세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최종전 일본 그랑프리에서 그는 첫 랩을 달린 후 경기를 포기했다. 화상 후유증으로 눈을 깜박이기 불편한데다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수술을 하면 완쾌되었지만 그에게는 경기가 더 중요했다. 그는 1점차로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J. 헌트에게 내주고 말았다. 

77년 부임한 페라리 감독 C. 로이트만은 라우다의 실력을 높이 사지 않았다. 그러나 라우다는 좋은 성적을 기록해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 해 3승을 올리고 여러 차례 입상권에 들어 두 번째 월드 챔피언에 올랐다. 모터스포츠 전문가들은 현역 드라이버 M. 슈마허를 제외하고 페라리팀을 거쳐간 가장 뛰어난 드라이버로 라우다를 꼽는다. 

시즌을 마감한 후 그는 브라밤팀 수트를 입었다. 그러나 경주차가 페라리만큼 빠르지 않은 탓에 겨우 2승을 건져 4위에 머물렀다. 79년 성적은 더 초라했고, 결국 라우다는 F1계를 떠났다. 사업가로 변신한 라우다는 자신의 이름을 딴 ‘라우다항공사’를 차렸다. 항공업은 기존 업체들이 득세를 하는 곳이어서 사업에 어려움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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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 라우다는 맥라렌으로부터 경주차 핸들을 잡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라우다는 3년 만에 컴백해 2승을 챙기며 시즌 5위에 올랐고 83년에는 10위를 기록했다. 84년 팀동료이자 떠오르는 스타였던 A. 프로스트를 1점차로 제치고 통산 3회째 세계 타이틀을 차지했다.

85년은 라우다에게 마지막 시즌이었다. 그는 더 이상 프로스트를 누를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시즌 중반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가까스로 프로스트를 누른 라우다는 마지막 경기인 호주 그랑프리를 끝으로 F1 드라이버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많은 사람들이 라우다에 대해 실력이 뛰어나서라기보다 제일 빠른 경주차를 탔기 때문에 승리를 올렸다는 말을 서슴없이 해왔다. 라우다 자신도 훗날 “적절한 시기에 잘 고른 경주차에 타고 있어야만 F1 월드 챔피언에 오를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부상을 입고도 레이스에 복귀해 보여준 불굴의 투지는 많은 드라이버들에게 귀감이 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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