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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시대를 풍미한 ‘F1 팀’ 되짚기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7-02-28 07:06:06

본문

모터스포츠 최고봉 F1에 새겨진 팀들의 이름은 다양하지만 그들이 그랑프리를 떠난 이유는 비슷하다. 팀들이 자발적으로 문을 닫거나, 파산 관리원들이 그들을 대신해 문을 닫아주었다. 서킷을 떠나는 팀들의 이유도 익숙하다. 팀들은 다른 모터스포츠에서라면 충분했을 예산이 F1에서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실 F1 무대를 밟기 위해선 단순히 경쟁력 있는 머신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재정이 튼튼해야 한다. 이처럼 돈은 성공은 물론 생존의 중심에 있다. 재정난으로 지금은 그리드에서 사라졌지만 한 때는 페라리, 맥라렌과 같은 거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컨스트럭터들을 소개한다.

 

티렐
1968년에 밑바닥부터 시작한 티렐은 나무로 지은 차고에서 제작한 머신들로 출범한 지 2년 만에 챔피언십을 따냈고 그 뒤 4시즌 동안 두 개의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이는 팀 오너인 켄 티렐의 실용주의 원칙과 그의 드라이버 재키 스튜어트의 숙련된 기술 덕분이었다. 여기에 엘프와 포드의 지원이 더해져 효율적인 패키지를 탄생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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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가 작았기 때문인지 티렐은 한 가족 같았다. 오랫동안 충실히 자리를 지킨 미캐닉들 중에는 팀 오너인 켄이 주니어 포뮬러에 있을 때부터 함께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장 어려운 시기는 마지막 10년 동안 찾아왔다. 1973년 말 스튜어트의 은퇴와 함께 천천히 시작된 팀의 쇠퇴가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가속화 되었다. 팀의 소박한 철학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던 F1을 따라잡지 못한 데서 비롯된 침체였다.

 

티렐의 잔고는 말라버렸고, 필요한 금액을 마련해줄 마땅한 수단을 찾지 못했던 셈이다. 켄 티렐은 모터스포츠를 애지중지했지만 뜨거운 열정만으로 자신이 아끼던 팀을 유지할 수 없었다. 티렐 레이싱은 1997년 말 BAT에 매각되어 BAR이 되었다. 4년 뒤 켄 티렐은 세상을 떠났다. 지금과 전혀 다른 한 시대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브라밤
브라밤은 자신의 머신을 직접 제작하려 했던 한 사람의 소망으로부터 탄생한 팀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 오너가 돈을 버는 데 정신을 쏟아 그 꿈은 빛을 잃었다.

쿠퍼와 함께 두 번의 월드 타이틀을 일궈낸 잭 브라밤은 같은 호주 출신의 론 타우라닉과 손을 잡고 1961년 MRD를 설립했다. 그들은 후에 프랑스에서는 MRD가 좋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브라밤으로 팀 명칭을 바꾸었다. 브라밤은 1962년에 첫 번째 머신을 등장시켜 2년 후 첫 우승을 거두었다. 브라밤이 빛을 발한 것은 1966년. 호주회사인 렙코에 올즈모빌 V8을 기본으로 안정적인 엔진을 의뢰했고 그 덕분에 1966년과 67년 데니 흄과 함께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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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말 브라밤이 은퇴한 뒤 타우라낙은 팀을 버니 에클레스톤에게 팔았다. 에클레스톤은 디자인에 대한 재능과 더불어 훌륭한 상상력을 소유하고 있던 젊은 디자이너 고든 머레이를 고용했으며 이들은 1974년에 3승을 올렸고 75년에는 컨스트럭터즈 2위를 차지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팀은 81, 83년 넬슨 피케가 따낸 월드 챔피언십으로 정점에 올랐다. 머레이는 연료보충 피트스톱의 재도입과 함께 또 한 번 혁신을 일으켰다. 그 후에는 점차 기세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린 버니는 88년 팀을 매각하기에 이른다. 이후 내리막길을 걷다가 92년 중반에 문을 닫았다.

 

쿠퍼
한때 전성기를 구가한 팀. 찰스 쿠퍼와 그의 아들 존은 2차대전 이후 저렴하고 안정적인 레이시 머신을 원하는 시장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이들은 당시 싼값에 구할 수 있었던 소형 모터사이클 엔진을 단순한 원통형 섀시 뒤쪽에 위시본 서스펜션과 함께 장착해 만든 500cc 포뮬러카를 레이싱 열풍이 불어닥친 거대 시장에 공급했다. 간혹 F1에 출전한 프론트 엔진 쿠퍼-브리스톨을 제작하기도 했지만 쿠퍼는 경주차 뒤에 엔진을 얹는 방식으로 그랑프리 레이싱에 혁신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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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1.9리터 쿠퍼-클라이맥스는 엔진 출력이 부족했지만 S. 모스는 1958년 아르헨티나 그랑프리의 타오르는 열기 속에서 타이어 교체도 하지 않고 첫 우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코펜트리-클라이맥스가 엔진을 2.5리터로 확장시키면서 쿠퍼는 새로운 색깔로 재탄생하게 된다. 잭 브라밤은 이태리 출신 라이벌을 앞서기 위해 더욱 민첩한 머신을 사용했고 결국 1959년과 1960년 연속 2회 월드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로터스
로터스는 언제나 변함없이 혁신을 거듭하는 팀이어서 경쟁력이 악화된 때가 있었음에도 영국의 아이콘으로 통했다. 1952년에 회사를 설립하고 6년 뒤 F1에 입성한 콜린 채프먼은 모노코크 섀시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63년에는 클라크와 함께 7승을 거두었다. 65년에 두 번째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따낸 채프먼은 67년에 포드 V8을 장착한 로터스 49를 출전시켰고 이듬해 그레이엄 힐과 함께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날렵한 쐐기 형태의 로터스 72는 1970년 요헨 린트에게 사후 타이틀을 선사했고 2년 뒤에는 에머슨 피티팔디가 자신의 첫 챔피언십을 따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채프먼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공기역학을 한층 더 탐구하여 탄생한 그라운드 이펙트 로터스 79와 함께 마리오 안드레티는 1978년 F1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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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82년 12월 채프먼이 54세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자 팀은 피터 위의 손에 넘겨졌다. 이로써 르노는 물론 아일톤 세나와 손을 잡게 된 로터스는 1986년에 타이틀 경합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세나가 맥라렌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소유주, 디자이너, 드라이버들이 연달아 교체되면서 팀은 1995년에 결국 끝을 맞이한다.

 

마트라
프랑스의 거대 항공회사가 자동차 분야에서도 자신들의 기술적 위업을 과시하기 위해 설립한 마트라는 꽤 독특한 팀으로 기억된다. 마트라가 자동차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때는 디젯을 인수한 후였다. 그들은 이 작은 스포츠카 회사를 홍보하는 데 모터스포츠가 유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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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라의 첫 레이싱카는 1965년에 등장했고 그들의 의도는 명백했다. 1967년 굿우드에서 재키 스튜어트에게 마트라 머신을 테스트하도록 했던 켄 티렐은 곧 섀시의 강성과 뛰어난 제작 품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티렐은 F2에 내보낼 경주차 제작을 마트라에 맡겼고 이는 양쪽 모두에게 장기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마트라는 F1 머신뿐 아니라 V12 엔진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미리 시험해보는 의미에서 그들은 티렐의 F1 팀에 섀시를 제공했다. 마트라가 섀시 개발에 애쓰는 동안 스튜어트는 팀이 F1에 출전한 첫 해에 챔피언 문턱까지 다가갈 정도로 많은 승리를 티렐에 안겼고, 1969년에는 결국 타이틀을 따냈다. 그리고는 정치가 개입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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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라의 자동차 부서가 크라이슬러 프랑스에 매각되자 모회사는 자신들의 V12를 사용할 것을 고집했다. 티렐은 여전히 포드 엔진을 얹었고 섀시만 마치로 바꾸었다. 티렐과의 결별로 마트라-심카가 된 마트라는 출력이 부족하고 경주차 후미를 무겁게 하는 약점 탓에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마트라가 점점 스포츠카에 중점을 두면서 르망에서 우승하자 F1 운영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72년에는 크리스 아몽 혼자서 그리드에 나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74년 마침내 F1에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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