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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자동차경주에 뛰어든 항공회사, 마트라 (Matra)

페이지 정보

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7-07-27 13: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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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시사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항공·무기 등 최첨단 영역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는 ‘마트라’(Matra)라는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마트라는 자신들의 기술적 위업을 과시하기 위해 자동차 분야에도 관심을 둔 바 있었으며 회사를 홍보하기 위해 뛰어든 모터스포츠에서도 꽤 독특한 팀으로 기억된다.

 

마트라가 F1 그랑프리 무대에 등장한 것은 1969년이다. 그해 마트라 섀시와 코스워스 엔진을 쓴 티렐 경주차를 몰고 재키 스튜어트가 월드 챔피언에 올랐다. 마트라는 1960년대 중반 포뮬러 주니어에서 뛰던 르네 보네팀에 경주차 보디를 공급한 것을 계기로 모터스포츠에 발을 들여 놓는다. 르네 보네가 파산하자 마트라의 사장이던 장 뤽 라가르데르는 1965년 ‘마트라 스포츠’(Matra Sports)를 만들어 보네를 인수했다. 마트라는 F3 경주차 제작으로 기술력을 인정받아 이듬해부터는 F1 섀시를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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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티렐팀을 이끌던 켄 티렐은 섀시 제작을 의뢰하기 위해 마트라를 찾았다. 티렐은 1968년 그랑프리를 위해 코스워스 DFV엔진을 마련하고, 재키 스튜어트를 드라이버로 영입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

 

티렐은 1968년 마트라의 MS10 섀시의 경주차를 내세워 월드 챔피언 사냥에 나섰다. 데뷔전은 독일 그랑프리였다. 스튜어트는 멕시코 경기에서 로터스팀의 그레이엄 힐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를 펼쳤지만 마지막 랩에서 추월당했다. 비록 우승컵을 놓쳤으나 그의 탁월한 달리기는 깊은 인상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한편 마트라의 대주주의 엘프와 프랑스 정부는 새로운 V12 엔진 개발을 위해 80만 프랑을 투자하기로 했다. 마트라 V12는 장피에르 벨투아즈가 디자인한 MS11 섀시와 짝을 이루어 서킷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마트라 엔진은 코스워스와 경쟁하기에는 많은 것이 부족했다. 1969년을 위해 벨투아즈는 코스워스 DFV를 얹을 섀시 개발에 착수했다. 이와 함께 스포츠카 경기에 주력하는 한편 V12 엔진 개발에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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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용으로 제작한 뉴 마트라 MS80은 MS10보다 15kg이나 무게가 줄었다. 콕핏의 주인은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스튜어트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MS10으로 우승을 거둔 직후 스튜어트는 번외경기인 브랜즈 해치 레이스에 MS8을 몰고 나가 성공적으로 데뷔전을 치렀다.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스페인 그랑프리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서킷의 강자 로터스가 새로 적용한 하이 윙의 트러블로 비틀거린 것이 마트라에 게는 행운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다.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뚜렷한 원인도 없이 스튜어트의 경주차가 멈춰 버렸다. 하지만 그동안 포인트 관리를 잘한 덕분에 팀과 드라이버는 여전히 우세한 위치에 있었다. 영국 그랑프리에서는 마트라의 스튜어트와 로터스를 몬 요헨 린트 사이에 박빙의 승부가 펼쳐졌다. 결국 린트는 로터스의 고질병인 경주차 트러블로 우승권에서 밀려났고, 스튜어트가 표창대 정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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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몬자에서 스튜어트는 또 다른 대서사극을 펼쳤다. 당시 그 유명한 트랙에는 시케인이 없었다. 그래서 이태리 그랑프리는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 앞차에 바짝 붙는 슬립스트림을 쓰면서 달려야 했다. 스튜어트는 마지막 코너를 가장 빨리 탈출하기 위해 최고단 기어비를 선택했다. 이것이 주효해 린트가 코너에 먼저 들어갔으나 나올 때는 스튜어트가 앞서 있었다. 피니시라인에 4대의 차가 동시에 머리를 디밀 정도로 치열한 싸움이었다. 판정 결과 스튜어트가 우승 도장을 찍었고, 그해 월드 챔피언에 올랐다.

 

마트라는 F1 그랑프리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섀시 제작자로서였다. 따라서 종합우승의 기쁨은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 것이었다. 팀과 엔진 제작자가 영국에 기반을 두고 있고, 재키 스튜어트 역시 스코틀랜드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1970년 마트라는 티렐에 자사의 V12 엔진을 쓰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티렐과 스튜어트는 엔진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고, 섀시 공급처마저도 마치로 옮겨 버렸다. 마트라는 차선책으로 자회사 심카에서 제작한 ‘마트라 심카 MS120’을 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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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결과가 좋아 세 차례 3위에 입상하는 전적을 올렸다. 드라이버는 벨투아즈 및 앙리 페스카롤로였다. 1971년 벨투아즈 대신 크리스 아몽이 핸들을 잡고 번외경기인 아르헨티나에서 우승을 거뒀다. 그 후 2년이 넘도록 좋은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트라는 르망 24시간에 주력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F1에서 손을 뗐다. 1977년 리지에가 마트라제 V12 엔진을 사들여 스웨덴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 마지막 우승이 되었다. 그 후 ‘마트라’라는 이름은 그랑프리 무대에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글 : 김병헌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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