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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차가 옆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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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desk(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8-04-30 10: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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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헨 린트, 로니 페터슨, 질 빌르너브. 이들 공통점은 지난 1970년대 뛰어난 운전솜씨를 뽐낸 드라이버다. 이들보다 더 알려졌지만 어깨를 나란히 드라이버가 있었다. 바로 웨일스 출신의 톰 프라이스다.

 

조용했던 웨일스 드라이버는 다른 유명한 드라이버들과 맞먹을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프라이스는 특히 1974년 디종에서 열린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모터스포츠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금요일에 최고로 빠른 기록을 세운 프라이스는 DN3 머신을 3그리드에 포진시킨 뒤 눈부신 질주로 섀도우 팀을 2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하지만 프라이스의 드라이빙 스타일은 슬릭타이어와 윙 등이 추가되면서 서서히 잊혀지게 되었다.

 

그는 멋진 모습을 보였지만 항상 타이어를 가만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F1 그랑프리에서 레이싱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프라이스는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조금만 바꾸었으면 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프라이스는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단순하고, 솔직한 그저 달리고 싶어하는 영혼이었다. 재미있는 일화도 있었다. 프라이스가 섀도우 트럭 안에서 자고 있을 때 어떤 여자가 그와 얘기를 하고 싶다고 창문너머로 말을 걸었다. 하지만 프라이스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프라이스는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저 유명해짐에 따라 생기는 야단법석을 피하고 싶어 한 것이었다.

 

프라이스는 원래부터 수줍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차량에만 들어가면 어김없는 호랑이로 돌변했다. 프라이스는 1970년 데일리 익스프레스에서 우승했고 상으로 포뮬러 포드 롤라 T200 머신을 받았다. 그리고 로엘에서의 F100 투 시터 스포츠카 챔피언십을 우승한 뒤 F3로 올라갔다. 프라이스는 멋지게 1972년 F3 종합 챔피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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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포뮬러 애틀랜틱에서 승리했고 론 데니스의 론델 팀과 함께 F2에서도 우승했다. 하지만 그를 정말로 빛나게 한 이벤트는 1974년 3월에 개최된 모나코 F3였다. 그리고 1975년 챔피언십에서 우승해 F1에서 우승한 유일한 웨일스인이 되었다.

 

프라이스는 영국 브랜드해치에서 칼리버의 재킥 익스, 로니 패터슨, 존 왓슨, 마크 도노엘 등을 제압한 뒤 그 당시 세계 챔피언인 에머슨 피티팔디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빛을 보았다. 그는 남아프리카 그랑프리에서 티렐로 우승한 조디 쉑터와 겨뤄 폴포지션을 얻어내었다. 두 달 뒤 모나코에서 그는 블랙 섀도우 DN5를 F3 머신처럼 조정해 니키 라우다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의 세계적 실력을 확인시켜 준 대회였다.

 

프라이스는 실버스톤에서 열린 영국 그랑프리에서 부드럽게 운전하는 스타일을 이용해 폴포지션을 얻어낸 유일한 웨일스 사람이 되었다. 19랩에서 선두로 올라섰고 20랩까지 그 포지션을 지켰다.

 

하지만 그의 레이스는 변덕스러운 영국의 날씨에 의해 엉망이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젖은 날씨에서의 멋진 실력을 가지고 있던 그는 21랩에서 순간적으로 핸들을 놓쳐 리타이어 했다. 이 레이스에서 다른 유명한 선수들도 많이 사고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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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스는 그 후로 독일 뉘르부르크링에서의 과감한 드라이브를 선보였다. 심각한 연료누출로 인한 부상을 입으며 4번째로 밀려나기 전에까지 유일하게 카를로스 루트만이 그를 앞서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화상을 입고 물집이 잡혔다. 하지만 프라이스는 전혀 게의치 않고 달려 특별상을 받았다. 오스트리아에 비오는 경기 날에는 빅토이로 브랜빌라와 제임스 헌터에 이어 3위로 골인해 웨일스 출신으로 처음 F1 시상대에 올랐다.

 

하지만 연말에 소속팀 섀도우의 메인 스폰서가 빠지면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면서 1976년 그는 부진의 늪에 빠졌다. 그해 그의 가장 좋은 성적은 브라질 3위, 네덜란드와 영국에서의 4위 정도 뿐이었다.

 

하지만 1977년 초에 그의 미래는 다시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엔진이 나가기 전까지 브라질에서 2위로 달렸고 업데이트된 DN8을 남아프리카 그랑프리로 가져갔다. 섀도우는 그가 수요일에 열린 연습경기에서 모든 선수들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며 환호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 프라이스는 15위를 차지했다. 그는 또 한 번의 좋지 않은 시작인 22그리드에서 출발해 13위를 기록했다. 이때 그는 한스 스턱의 마치가 그의 시야에 들기 전까지 다섯 번째로 빠른 랩을 기록하고 있었다.

 

21랩에서 그의 팀동료인 렌조 조지가 피트 반대쪽에 멈춰 섰다. 조지가 차량에서 나올 때 연기가 그의 뜨거운 엔진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는 레이싱 슈트를 벗기 위해 몸부림쳤다. 2명의 지원자들이 응급상황에 대처해야 한다고 판정하고 트랙을 건너 그에게로 뛰어갔다. 한 명은 빌이라는 25살 판금공이었고 다른 한 명은 젠센 반 버렌이라고 확인된 잔 스머트 항공사의 19살 티켓 판매 직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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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은 살아남았지만 40파운드의 소화기를 들고 있었던 반 버렌은 그러지 못했다. 프라이스는 트랙 왼편에 있었고 마치 뒤에 꽉 붙어 있었기에 그의 시야에 반 버렌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빌리를 간발의 차이로 피할 수 있었지만 반 버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반 버렌을 170mph로 들이받아 버렸다. 반 버렌이 들고 있던 소화기는 프라이스의 얼굴을 직통으로 강타했다. 프라이스는 도움을 받기 힘든 상태였다. 특히 그의 발은 조절판에 끼어있었다. 머신은 전혀 줄지 않은 스피드로 달렸고 자크 라피트의 리기어와 충돌 후 크로우흔의 뱅크로 추락하며 사망했다. 비극적 승리는 지난 시즌에 심각한 사고를 당했었던 라우다에게로 돌아갔다.

 

라우다는 “프라이스는 진심으로 레이싱을 사랑한 사람이었다”며 “그가 살아있었다면 대단한 선수가 되었을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1976년에 란시아 스트라토스에서 투어 오브 이집트를 프라이스와 함께 한 친구인 데이비드 리차드는 동료로부터 아들의 사고를 들은 어머니와 TV를 통해 이 비극적 소식을 들은 아버지와의 인연을 계속했다. 그리고 2009년에 프라이스의 기념비가 세워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프라이스 아버지는 루딘의 클위드 거리에 세워진 기념비를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어머니는 다행히 자랑스러운 아들의 업적을 볼 수 있었다.

 

데이비드 리차드는 “내 기억 속의 프라이스는 주변의 상황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진정으로 타고난 실력을 가진 선수이다”며 “진정한 웨일스 사람이며 요즘 F1 선수들과 다르게 진심으로 그의 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기념비는 리차드와 프라이스의 미망인 넬라에 의해 그의 60번째 생일이 되었을 날에 공개되었다. 화강암 위에 놓인 청동 기념비엔 ‘그저 그는 자신의 뿌리를 잃지 않으면서 최고를 이겼다. 더 이상 말할 필요는 없다’라고 웨일스어로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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