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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남았으면 하는 드라이버, 요헨 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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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병헌(bhkim4330@hanmail.net)
승인 2019-03-25 09:06:05

본문

오스트리아 출신의 요헨 린트는 1960년 중반에 가장 눈여겨봐야 할 떠오르는 선수 중 하나였다. 1964년 젤트벡의 울퉁불퉁하고 바퀴자국이 무성한 비행장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 롭 워커가 이끄는 팀에 소속되어 브라밤-BRM을 타고 데뷔전을 치렀고, 이후 1967년 말까지 쿠퍼와 3년 계약을 맺었다.

 

1965년 1.5리터 포뮬러의 마지막 해. 쿠퍼는 지는 별이었다. 그러나 1966년에 팀은 F1에 3.0리터 엔진 규정이 생기면서 다시 살아났다. 린트는 쿠퍼-마세라티 T81을 타고 우승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이 빠르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 시기에는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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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트는 1968년에 브라밤으로 이적했다. 팀은 호주에서 만들어진 렙코 V8 엔진을 사용해 1966년과 1967년 연속으로 잭 브라밤과 데니 흄을 월드 챔피언으로 배출한 역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린트도 그 뒤를 따르고 싶었지만, 1968년에 그 팀에서 사용한 4캠 렙코 860 V8은 심할 정도로 안정성이 떨어졌다.

 

시즌이 끝나갈 무렵, 린트는 거액의 연봉을 제시한 로터스의 이적 제의를 받아들였다. 뛰어난 드라이버였던 지미 클라크가 1968년 초 독일 호켄하임 레이스에서 사망한 이후, 콜린 채프먼은 린트가 F1 그랑프리의 다음 챔피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채프먼은 린트에 이어, 북미에서 계약이 허용될 때 레이스에 나갈 수 있도록 마리오 안드레티와도 계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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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트는 팀이 자원을 늘리기 위해 내린 이 결정을 달갑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코스워스 DFV 엔진을 얹은 경주차를 몰고 싶다는 생각에 팀에 남아 있었다. 린트와 채프먼의 관계는 다소 복잡했다. 린트는 팀 보스가 진지하게 실행에 옮겼던 로터스 63의 사륜구동 프로그램에 별로 열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린트는 단지 로터스 49B를 타고 우승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뜻을 이루었다.

 

비록 그 여정이 험난하기는 했지만, 시즌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왓킨스 글렌의 미국 레이스에서 그 거대한 시험을 처음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그해 린트는 바르셀로나의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49B의 리어 윙이 부러지며 방호벽으로 돌진하는 대형 사고를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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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고로 린트는 콜린 채프먼에게 그 문제에 대해 항의서한을 작성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의 경주차는 아주 빨라서 취약한 부분을 보강하기 위해 몇 가지를 수정하더라도 여전히 경쟁력이 있을 것이다. 나의 제안을 고려해달라. 나는 내가 믿을 수 있는 경주차를 몰고 싶다. 이대로 간다면 더 이상 이 차에 대한 나의 신뢰를 지속하기 어려울 것 같다”

 

채프먼은 이 같은 린트의 제안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고로 채프먼과 린트 사이는 껄끄러웠다. 드라이버와 팀 보스로서 서로에 대한 예의는 지켰지만 사적으로는 그다지 잘 어울리지 못했다. 1968년 린트의 골칫거리이자 탈이 많았던 4캠 렙코 엔진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코스워스 엔진의 브라밤은 린트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린트는 브라밤으로 돌아가려 노력했지만 채프먼은 더 많은 보수와 요헨 린트 레이싱이라는 간판을 달고 에클스톤이 운영하는 F2 프로그램을 약속함으로써 그 시도를 좌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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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트는 채프먼과 계약을 체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모든 가능한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았지만 결국 1970년을 로터스와 함께 보냈다. 린트는 로터스 49C를 타고 출전한 모나코 그랑프리 마지막 코너에서 잭 브라밤을 볏짚 방호벽으로 몰아넣는 등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고, 시즌 첫 우승을 거머쥐며 앞으로의 활약을 예고했다.

 

그 후 새로운 로터스 72가 나오자 린트는 잔부르트, 클레르몽-페랑, 브랜즈 해치, 호켄하임에서 연속으로 우승했다. 린트는 몬자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직선주로에서의 스피드를 가능한 한 극대화하기 위해 날개를 제거한 그의 로터스 72는 열띤 연습주행 끝에 차체 안에 있는 앞 브레이크의 구동축 하나가 망가져 방호벽에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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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고정벨트를 하는 법이 없었던 그는 콕핏 밑으로 빨려 들어가 벨트 버클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충돌사고 후 그는 병원으로 후송되었는데 이는 이태리 의료 시스템 상의 한 절차였을 뿐이고, 사실 린트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를 잘 알지 못했거나 아주 잠깐 만났던 사람이라도, 그가 마지막으로 로터스 72에 올라탄 그 순간 이후 50년 가량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이야기에 매료되곤 한다. 이는 아마도 그의 역동적인 스타일과 불굴의 의지가 보여주는 감동 때문일 것이다.

 

글 / 김병헌 (모터스포츠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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