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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돌아본 한국모터스포츠 25년사 (2)

페이지 정보

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1-04-04 17:07:39

본문

지난 1988년은 한국에 역사적인 올림픽이 치러진 해로 모터스포츠인들 역시 올림픽의 열기에 동참하는 행사를 가졌다. 부산의 용두산공원을 출발해 해상을 제외한 전국의 육로를 차량으로 달려 서울 잠실주경기장에 닿는 ‘올림픽성화 봉송로 달리기’였는데 9명의 드라이버가 참가한 이 행사는 한국타이어가 지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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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의 첫 경기는 WCRC가 5월 14∼15일 주최한 제1회 월드9000자동차스피드경주대회로 충남 서산의 청포대해수욕장 모랫벌에 2.4km를 20주해야 하는데 예선결과 박정용의 콩코드가 워낙 성능이 뛰어나 맨 후미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현장에서 팀장간 회의를 한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대로 났고 2위와 3위도 프라이드가 차지해 기아자동차의 퍼펙트게임으로 레이스가 종료된다.

이때를 시작으로 7년 후인 1995년 온로드 레이스에서 종합우승을 일궈낸 기아 콩코드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우승자는 트로피와 프라이드, 2위 트로피와 125cc 오토바이, 3위 트로피와 컬러 TV를 받았다.

엔진을 튜닝한 대부분의 차량은 트러블로 리타이어 했으며 쇼크 업소버가 잘 터졌고 액슬샤프트 이상이 많았다. 또한 하중이 무거운 차량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대부분의 드라이버들이 프라이드를 선호하게 되었다. 당시는 차량규정이나 경기규정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팀장회의를 통해 적당한 선에서 해결했다. 개성이 강한 그들이지만 그래도 자동차경주라는 특수성, 참가자라는 공통성, 특히 한국모터스포츠계의 선구자라는 프라이버시로 상부상조하며 동호인으로서 잘 어울려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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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8∼19일 인천 송도에서 치러진 세 번째 경기 제3회 그랑프리코리아 자동차경주대회는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500마일 참관티켓이 부상으로 걸렸고 한국타이어, 한독시계, 발보린이 협찬을 했다. 이때 미국 발보린사가 우승 드라이버와 주최자, 한국발보린의 관계자 등 3명을 초청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우승자였던 황운기 씨는 그 참관티켓보다는 이후 자신의 스폰서가 되어줄 것을 제의했고, 발보린이 그것을 받아들여 현재까지 그 관계가 지속되어온 것이다.

세 번째 경기인 제2회 월드9000자동차경주대회는 7월 29일부터 3일간 청포대에서 여름피서객 3,0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렸다. 코스의 노면이 비록 단단하다고는 하지만 모래인지라 경주차가 아웃사이드 부분에 빠지면 급격히 속도가 떨어지며 엔진에 무리를 주었다. 그로 인해 경기는 하중이 가벼운 프라이드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수상자 모두가 프라이드가 되었다.

11월 6일 송도비치호텔 앞 매립지에서 그해의 마지막 대회로 열린 ‘88 한일 카레이스’는 일본인 선수 3명이 내한해 국내 드라이버 28명과 함께 경기에 참가했다. 차종은 프라이드가 주종을 이룬 가운데 르망(4대), 포니(3대), 프레스토(2대), 포니2, 뉴 코티나, 마크V가 각각 1대씩 참가했다. 코스상태가 잔돌과 먼지 등으로 워낙 험해서 타이어버스트, 추돌, 전복 등 온갖 사고가 속출해 차량의 대부분이 리타이어 했다.
이 경기에서는 선두차량에 1랩을 추월당한 후미차량은 자동 실격 처리된다는 규정을 정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이때 빈번한 전복사고에도 드라이버를 보호할 수 있는 롤바와 화재에 대비한 소화기 장착이 과제로 대두되었고, 원시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기록측정방법과 기록원의 자질향상, 미숙한 경기진행 등을 출전자들은 주최 측에 불만사항으로 지적했다. 당시 내한했던 일본인 드라이버는 미타라시 다카시(선빔레이싱팀), 오쿠치 치카케(로드런너팀)와 미라지팀의 원메이크 여성선수 아이자와 이쿠(당시 2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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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랠리 출전경력이 있는 미타라시를 제외한 두 드라이버는 다트경기가 처음이었다. 주최 측은 일본 드라이버에게 기본 튜닝한 차량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지켜지지 않았고, 그래서 경기당일 제공된 노멀 프라이드는 여성 드라이버 아이자와를 태우고, 두 남자 드라이버는 낡은 르망 렌트카를 태워야 했다. 당시 프라이드는 그런 대로 괜찮은 편이어서 아이자와에게 제공했으며 중고 르망 2대는 미타라시와 오구치에게 배정했다.

열전을 벌인 끝에 이창복(푸마) 씨가 우승, 2위에 이주철(월드카) 씨, 3위에 이차혜(부산에이스) 씨가 각각 프라이드로 입상해 아낌없는 성원을 받았다. 일본 레이서인 미타라시는 7위(르망), 아이자와는 21위(프라이드), 오구치는 23위(르망)를 했다.
당시 결과의 결과만 보고 우리나라 드라이버들은 그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사실 그들은 일본에서 꽤 알려진 상위권 드라이버들이었다. 르망을 타고 나와 7위를 차지한 미타라시 타카시는 당시 나이 40세로 1969년 모터스포츠에 입문해 랠리, 더트 트라이얼 드라이버로 1984년까지 200여 경기에 참가해 입상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 1980년 RAC 랠리, 1981년에 세계랠리선수권(WRC) 클래스 6위 경력을 바탕으로 1988년까지 일본자동차연맹(JAF) 지방선수권 랠리, 더트 트라이얼을 60전 이상 주최한 경력을 갖고 있다.

대우 르망으로 23위를 한 오구치 지카케는(당시 31세) 로드런너팀의 프로 레이서로 그의 경력 또한 화려했다. 1979년 일본 후지 스피드웨이 1000km 레이스에 사반나 RX-7으로 우승, 1981년 후지 스피드웨이 500km 제2전 2위, 제4전 2위, 1982년 후지 GC 제1전 2위, 후지스피드웨이 500km 레이스 2위, 1983년 스즈카 500km 레이스 2위, 1983년 후지 GC 제3전 우승, 1984년 후지 스피드웨이 500km 레이스 우승, 스즈카 그랑프리에서 포르쉐로 우승, 같은 해 4월 WEC 몬자 1000km 레이스 4위, 5월 WEC 르망 24시간 레이스 클래스 우승, 7월 WEC 프랑스 1000km 레이스 2위의 경력을 가진 드라이버였다.
여성인 아이자와 이쿠는 미타라시나 오구치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원메이크 미쓰비시 미라지 레이스에서 상위권에 입상한 유망 레이서였다. 미타라시나 오구치는 그야말로 1988년도 당시로서는 우리에게 너무 큰 거물이었지만 이들의 경력을 모르는 대부분 사람들은 결과만 보고 그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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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끝났을 때 이들의 경주차는 좌석이 뒤틀려 있었고 과자 부스러기와 과일조각이 나뒹굴고 있었다. 일본 드라이버 3인방은 우리 코스에 관해 ‘하루 종일 달려도 재미있는 코스라며 그렇지만 3바퀴가 지나면 차는 부서질 것 같다’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또한 코너진입과 주행 시의 우선 순위를 알려 주었으며 기본기와 테크닉부족, 클래스구분의 모호함, 레이스 에티켓의 부재, 트랙의 안전문제, 메이커의 관심부족을 문제로 지적했다.

한편 한일 카레이스 대회가 이루어지기까지는 김선우 씨와 기노시다 노부로 씨의 노력이 컸다. 전 일본챔피언 출신 기노시타 노보루 씨는 1986년 11월 르망 5만km 논스톱 테스트에 관계하면서 한국 모터스포츠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87년 6월 13∼14일 모터스포츠연맹(당시 회장 조경철 박사)이 주관했던 제1회 그랑프리 코리아 경기를 시작으로 레이스가 열릴 때마다 찾아와 레이스에 대해서 많은 조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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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레이스 현황과 일본 레이스 사정을 들려주었으며 앞으로 한국 모터스포츠가 나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 후 모터스포츠연맹을 백형두 씨가 이끌면서 친분을 더욱 두텁게 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 88 한일전에 참가한 일본 선수들을 기노시타가 인솔했으며 OZ 레이싱팀과 내한해 세팅된 경주차로 잠실 탄천에서 열었던 레이싱 스쿨도 주선했다. 1989년에는 황운기 씨를 필두로 윤철수, 정용호를 일본 닛산 마치 레이스에 참가시켰고 1990년에는 박정용 씨에게 기회를 주었다. 이와 같이 기노시타 씨는 한국 모터스포츠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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