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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카레이싱 현장에서 활동한 모터스포츠 전문기자 출신이다. 그동안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F1 그랑프리, 르망 24시, 사막 랠리, 포뮬러 닛폰, F3, 카트 등 수많은 굵직한 이벤트들을 지켜봤고 포뮬러 르노,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들을 시승했다. 아울러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경주 안내서인 모터스포츠 단행본도 발간했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할만큼 늘 모터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최고의 페라리 F1 머신 걸작품은?

페이지 정보

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3-04-21 23:19:10

본문

슈퍼카 메이커로 알려진 페라리의 공식 F1 팀 명칭은 스쿠데리아 페라리로 F1이 시작된 1950년부터 지금까지 활동하는 유일한 팀이다. 페라리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기록과 수많은 세계 최고의 머신들을 배출해왔다. 이 가운데 페라리 F1 머신의 최고 걸작품을 뽑아 보았다.

페라리 500
F2 머신이다. 하지만 1952년 초 유럽의 레이스 주최자들은 F1 머신의 경쟁기준에 부합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월드 챔피언십에 포함된 개별 레이스를 모두 F2 규정에 따르도록 바꿔 버렸다. 이러한 결정으로 재미를 본 팀은 페라리였다. 1954년부터 시행될 2.5리터 F1을 기대하던 엔초 페라리는 아우렐리오 람프레디에게 F2와 F1 모두에 적합한 새로운 4실린더 엔진을 설계하라고 지시했다. 각 실린더의 배기량은 500cc였고 엔진은 180마력 가량의 최고출력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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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는 이 머신으로 17번의 레이스 중 16번의 우승을 차지하며 1952년과 1953년 시즌을 장악했다. 연료가 부족해 곤란을 겪었던 경쟁자들과 달리 이들은 논스톱으로 달리는 일도 자주 있었다. 1952년 벨기에 스파 프랑코르샹에서 열린 유럽 그랑프리에서는 그 위세가 워낙 대단했던 터라 토요일에 연습주행도 하지 않았다. 이미 상대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던 것이었다.

페라리 156
1961년 F1은 규정을 손질했다. 가장 큰 변화는 엔진 크기가 2.5리터에서 1.5리터로 줄어든 것. 페라리는 1.5리터 머신에 사용할 새로운 엔진을 개발하기 위해 1960년 F2 레이스를 활용했다. 당시 F2에서 활약하고 있던 V6 디노 156은 1960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5위를 차지할 만큼 뛰어난 성능을 발휘했다. 쿠퍼와 로터스 같은 영국의 출전 팀들이 막판 정치적 로비 공세로 새 규정을 피하려고 한 반면 페라리는 계속해서 철저하게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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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 엔지니어인 카를로 치티는 겨울 동안 실린더가 120도 간격으로 벌어진 발전된 형태의 1,500cc 엔진을 설계했다. 유명한 ‘샤크 노즈’ 섀시까지 갖춰 완성된 모습의 156은 모나코에서 첫 선을 보였지만, S. 모스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156은 그해 챔피언십의 전반기 7전 중 5승을 거두었다. 팀동료였던 폰 트립스가 몬자에서 치명적인 사고를 겪은 후, P. 힐은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차지했고, 페라리는 처음으로 컨스트럭터즈 왕관을 쓰게 되었다. 156은 1962년 시즌에도 등장했으나, 1승도 거두지 못했다.

페라리 312T
페라리의 1975년형 경주차에 붙은 T는 횡단선(이태리어 트라스베르실레)을 의미했다. 가로로 놓인 5단 트랜스미션이 1974년 머신과 비교해 가장 크게 변한 것이었다. 살아남은 것은 거대한 수평대향 12기통 3.0리터 박서 엔진. 섀시는 이전 해에 사용한 312B3의 개량형으로, 경주차의 공식적인 이름도 312B3(T)였다. 새로운 기계적 구조는 조작성을 향상시켰고, 페라리를 챔피언십 정상으로 올려놓았다. 게다가 이 경주차는 향후 5년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312T가 진화를 거듭하는 동안 312T4로 출전한 1979년을 비롯해 총 4번의 컨스트럭터즈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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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머신은 피오라노에서 수천 마일의 테스트를 마친 뒤, 1975년 시즌의 3라운드인 남아공에 와서야 뒤늦게 데뷔할 수 있었다. 이상한 광고들이 난무하던 시절에도 머신 컬러는 역시 이탈리아의 국가색인 로소 코르사를 유지했다. 미스터 페라리가 살아있는 한 예외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머신으로 페라리는 그해 남아 있던 12전 중 6승을 거두면서 스쿠데리아에 1964년 이후 첫 컨스트럭즈 타이틀을 안겨주었다. N. 라우다를 월드 챔피언으로 만들어준 것으로도 모자라 1976년 시즌에서도 3전까지 우승을 차지했다. 놀랄 만큼 빠를 뿐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F1 페라리로 꼽힌다.

페라리 F2004
미하엘 슈마허와 마지막 챔피언십 우승을 함께한 머신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최고로 손꼽히는 F2004는 미쉐린타이어가 우위를 점령하고 J.P. 몬토야와 K. 라이코넨이 타이틀을 노리며 슈마허를 열심히 추격하던, 화려했던 2003년 시즌 막바지에 완성되었다. 사실 슈마허는 그해 헝가리에서 백마커로 뒤처지는 수모까지 당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바로 이전 해 경주차로 시즌 개막전에 출전하는 관행을 무시한 채 F2004를 호주로 끌고 간 페라리는 가장 가까이 따라오던 라이벌보다도 30초 이상 앞서 레이스를 마치는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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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전을 마치는 동안 완주하지 못한 곳은 모나코뿐이었고, 슈마허는 120점을 따내며 위세를 떨쳤다. 기록으로 남은 그의 일곱 번째 타이틀 획득은 14라운드인 몬자에서 확정되었는데 이곳은 슈마허가 F1에 첫발을 내닫은 곳이기도 하다. 이후 페라리는 R. 바리첼로가 따낸 두 번의 우승을 포함해 추가로 3승을 올렸고, 컨스트럭터즈 타이틀의 전체 포인트 중 81%를 휩쓸었다. 이는 2, 3위팀을 합친 것보다 높은 점수였다. 아스카리 이후로 그리고 페라리가 처음 타이틀을 차지하기 시작하던 시절 이후로는 볼 수 없었던 대단한 위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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