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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오토뉴스 채영석 국장은 30년 동안 자동차 전문기자로 활동해 왔으며 인터내셔널 엔진 오브 더 이어, 월드 카 오브 더 이어의 심사위원이다. 골드만 삭스 등 투자은행들과 다른 시각으로 산업 분석을 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3,000종 이상의 차를 타고 시승기를 쓰고 있으며 세계적인 모터쇼와 기술세미나 등에 참석해 글로벌 차원의 트렌드 분석에 힘을 쏟고 있다. 2013년 골드만 삭스가 유가 200달러 시대를 이야기했을 때 역으로 유가 폭락 가능성이 있다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9. 자동차회사와 석유회사들의 로비와 음모에 의한 산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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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charleychae@global-autonews.com)
승인 2016-12-13 11: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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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에서 시작된 대량 생산 기법을 바탕으로 자동차를 산업화한 것은 윌리엄 듀란트와 루이 쉐보레, 알프레드 슬론 등이 이끈 GM이었다. 단일 차종으로 모델체인지 한 번 없이 20년 동안 1,574만대를 판매한 포드와 달리 GM은 주기적 모델체인지를 비롯해 다양한 배기량과 차별화된 브랜드 전략 등을 도입해 소비자들을 끌어 들였다. 그 결과 1920년에는 전 세계 자동차 생산의 85%가, 1950년에는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이기는 했지만 81.5%가 미국산 제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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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자동차의 폭발적인 증가의 배경에 석유가 있다. 석유는 1879년 노벨 형제가 러시아의 바부에서 유전을 발견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1886년에는 칼 벤츠와 고트리프 다임러가 휘발유 자동차를 만들었다. 석유는 19세기 말에는 등유용 정도로밖에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1901년 미국의 텍사스주에서 거대한 유전이 발견되면서 석유는 점차 부자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1908년 포드가 모델 T를 내놓으면서 석유는 가치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1차 대전이었다. 영국이 대형 선박을 움직이는 에너지 원을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면서 석유에 대한 시각은 급변했다.

 

본격적으로는 1920년 미국 펜실베니아주에 최초의 석유 시추탑이 세워지면서 권력으로 부상했다. 엑슨, 모빌 오일, 셰브런, 걸프, 텍사코, 브리티시 석유, 로열 더치쉘 등 미국계 5사, 영국계 1사, 영국- 네델란드 합작 1사 등 소위 말하는 세븐 시스터스로 불리우는 종합석유회사가 등장한 것이 1920년대다. 1938년에는 쿠웨이트에서, 1948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유전이 발견됐다.

 

여기에 민영화로 부패한 미국의 철도 재벌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뿌리 깊은 반감과 결합해 석유를 사용하는 자동차는 미국인들의 개척정신에 걸 맞는 새로운 탈 것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미국은 철도 왕국이었다. 1850년에 이미 3만 3,600km, 1870년에는 11만 km를 넘어섰고 1900년에는 36만 km에 달했다. 자동차회사들은 철도산업에 제공되는 보조금을 자기들에게 끌어 들여 철도의 수송 대신 자동차의 이용을 늘리도록 했고 전차회사를 인수해 전차를 생산하지 않는 방법을 동원해 고사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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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산업혁명은 미국의 자동차회사와 석유회사들의 로비와 음모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그 주역은 GM 이다. 포드가 모델 T에 대량 생산기법을 도입해 자동차의 대중화를 촉발시켰다면 그것을 본격적으로 산업화한 것은 GM 이었다. General Motors라는 거대 기업은 윌리엄 듀란트에 의한 것이었다. 1908년 듀란트에 의해 GM 컴퍼니가 설립됐고 곧바로 뷰익을 합병했다. 이듬해에는 올즈를, 1909년에는 오클랜드(폰티악의 전신)와 캐딜락을 합병했다. 지주회사였던 GM컴퍼니에서 자회사들은 모회사와 독립적으로 사업 운영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듀란트는 창업 후 2년 만에 25개 회사를 합병했다. 11개는 자동차회사, 2개는 전기램프회사, 나머지는 자동차 부품 및 엑세서리 제조업체들이었다. 이는 오늘날 구글이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닥치는 데로 수많은 회사들을 인수하는 것과 비슷하다. 미국인들의 비즈니스에 대한 사고는 시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처럼 현실을 앞서가는 과잉 확장으로 GM컴퍼니는 출범 2년만에 경영권을 상실해 투자은행그룹 등 은행권이 1915년까지 운영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은행권은 수익성 없는 사업들을 청산하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런 확장과 구조조정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이 시기는 포드가 주도했다. 1911년 미국 자동차 생산은 21만대에서 1916년에는 160만대로 급증했다. GM은 1910년 4만대에서 1915년 약 10만대로 늘었지만 포드에 비하면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

 

1919년에는 판매금융회사인 GMAC를 설립하는 등 사업을 확대해 오늘날의 GM이 있게 한 기반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 GMAC가 20세기 말 GM이 본업보다는 돈놀이에 더 집중을 하며 파산에 이르게 한 배경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 과정에서 찰스 W. 내시(Charles W. Nash)와 듀란트의 조합, 루이 쉐보레, 그리고 듀퐁사 등이 GM의 경영 재건에 각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은행권으로부터 벗어날 즈음 듀란트는 다시 GM의 사장으로 복귀했으며 이 때 쉐보레를 합병했다. 하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1920년 그는 경영권을 넘겨야 했다. 가장 늦게 GM 그룹에 합류한 쉐보레는 지금 GM의 대표적인 글로벌 브랜드로 존재감을 키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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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의 브랜드 중 뷰익은 1908년 General Motors Corp.의 창업을 가능하게 했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세 확대의 기반이 되어 주었다. 뷰익의 생산량은 1909년 1만 4,606대, 1910년에는 3만 525대로 미국 전체 자동차 생산의 15%에 달했다. 뷰익은 오늘날에도 GM의 효자 브랜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2009년 GM의 파산보호 신청으로 ‘나쁜 GM’과 ‘좋은 GM’ 으로 나누어 청산 절차에 들어가며 여러 브랜드들이 사라졌지만 뷰익은 건재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시장인 중국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2014년 뷰익의 전체 판매는 117만대였는데 그 중 92만대 가량이 중국시장에서 팔렸다. 

 

GM 컴퍼니가 설립될 당시의 자동차 속도는 20~50km/h 정도에 불과했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블릿첸 벤츠가 1909년에 200km/h의 벽을 넘었지만 실험 차원이었다. 자동차 경주장에서의 속도와 일반 도로의 그것은 달랐다. 무엇보다 도로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1903년 200만 마일의 도로가 있었지만 포장률은 7%에 지나지 않았다.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은 자동차는 그런 악조건에서도 사람들의 꿈으로 자리하기 시작했고 생활 전체를 바꾸었다. 부동산으로 돈벌이를 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도심이 아닌 교외에서 생활하는 것을 부자들의 상징으로 여겼고 그 때 필요한 것은 자동차였다.

 

이동과 공간을 단축시켜 주는 자동차는 교류를 활성화하고 경제 성장을 이끄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차를 타고 도망갈 수도 있다는 생각도 가능하게 했다. 서부 개척시대에는 총잡이들이 말을 타고 미 대륙을 누볐으나 자동차를 타고 어디든지 활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동차의 대중화를 부채질한 것은 1921년에 등장한 진정한 의미의 신용카드의 등장이었다. 신용카드는 외상 구매로 물건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1923년에는 렌터카 회사 허츠(Hertz)도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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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미국의 자동차 보유대수도 급증했다. 1910년 50만대에서 1915년에는 200만대, 1917년에는 500만대 가까이로 증가했다. 1914년 미국이 130만대를 넘었는데 독일은 6만 4,000대, 프랑스는 10만대, 영국은 24만 5,000대 수준이었다. 미국에서 얼마나 빠른 속도로 자동차의 대중화가 진행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수치이다. 1920년 미국의 자동차 보유대수는 1,000만대를 돌파했는데 이는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자동차를 합한 것보다 많은 수치였다. 점유율로는 85%에 달한다.

 

자동차의 증가는 고용창출에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 1930년 미국의 자동차 대수가 2,500만대를 넘었을 때 자동차산업에 종사한 인원은 500만명에 육박했다. 그만큼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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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GM의 사장 겸 CEO에 취임해 1956년까지 경영권을 장악한 알프레드 슬론의 저서 ‘나의 GM 시절’에는 GM의 거대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초기에 ‘조직 연구’라는 저술을 통해 자동차회사의 틀을 갖추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는 복잡한 자동차사업의 구조를 체계화 해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한 사업으로 하고자 했다. 주목을 끄는 것은 CEO의 경영권을 최소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만 그는 그 힘을 분별력을 가지고 행사했다고 서술했다. 다른 사람에게 지시하기 보다는 설득함으로써 나아지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는 장기적으로 자동차회사를 개발과 생산, 판매 등으로 조직 단위를 나누고 각 부서간의 협의 등을 통해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하며 판매해야 한다는 개념을 정립했다.

 

제품 정책의 정립도 그의 아이디어다. 당시 정립된 GM의 제품정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 째, 저가부터 높은 등급의 대량 생산 차에 이르기까지 각 가격대 시장에서 한 라인의 차는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러나 소규모 생산으로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대로 진출해서는 안 된다. 둘 째, 가격 단계는 라인 내에서 큰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가격 단계의 수량을 유지하기 위한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량 생산의 최대 이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그 가격대나 단계에서 중복이 없어야 한다.

 

그가 제안한 제품정책은 브랜드 성격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도 전 세계 대부분의 자동차회사에 적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회사의 안정화를 위해 위원회를 통한 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을 비롯해 재무통제 기법의 개발, 새로운 정책의 창조 등 사업적 측면에서 전반적인 상황을 꿰뚫어 보고 조직을 구축해 나갔다. 20세기 말 GM 이 하락세를 탈 때는 ‘위원회를 위한 위원회’가 설립되는 등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지만 초기에는 이런 정책은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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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시대에 따른 자동차의 진화와 연식 모델의 도입, 스타일링과 디자인 정책, 엔지니어의 육성과 기술 개발, 유통과 딜러제도, GMAC, 해외 사업 등 그야말로 미래를 내다 보는 글로벌 조직으로서의 GM을 이끄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는 경영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남다른 시각의 소유자였다. 그는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동기부여와 기회라는 두 가지 요인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자의 상당 부분은 인센티브 보상에 의해, 후자는 분권화에 의해서 제공된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경영은 집권화와 분권화의 조화 또는 ‘조화로운 통제하의 분권화’에 달려있다고 했다. 21세기의 우리가 보아도 그의 경영 철학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수요의 증가와 함께 자동차의 외형에도 변화가 왔다. 천이나 비닐로 만들어졌던 차체 지붕 대신 고정형이 등장한 것이다. 1920년경 10% 가량이었던 고정형 지붕의 비율이 세계 대공황 시절인 1930년에는 90%가 넘었다. 이 때 등장한 용어가 세단이다. 프랑스 스당(Sedan) 지역 귀족들이 타던 가마에서 유래된 말이다. 영국에서는 설룬(Saloon)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이후 등장한 쿠페와 왜건 등과 함께 초창기 이 용어가 정립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자동차는 점차 고급스러워져 갔다. 그 이야기는 신분의 상징으로서의 역할이 강해져 갔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사업가들은 그만큼 돈벌이가 된다는 것을 알아챘다. 당시의 사업가들은 자동차산업의 미래를 내다보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창출해 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GM 의 브랜드 계열화와 모델체인지라는 마케팅 기법이었다. 하나의 모델로 시장에서의 반응을 지속적으로 얻기에 어렵다는데 착안해 매년 새 모델을 만들어 소비자들을 끌어 들이는 전략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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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저가에서 고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브랜드를 만들어 소비자들의 수요에 부응하는 전략도 수립하게 된다. GM의 경우 대중 브랜드인 쉐보레부터 시작해 올즈모빌, 폰티악, 뷰익, 그리고 럭셔리 브랜드인 캐딜락까지 다양한 브랜드와 모델을 구비해 규모의 경제의 조건을 만족시키기에 이른다. 단순히 생산해서 판매한다는 개념에서 진 일보 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동원한 마케팅을 통해 자동차산업을 거대화 한 것이다. 이는 ‘모든 지갑과 목적에 맞는 차’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GM은 시장의 세분화에 대해 눈을 일찌감치 눈을 떴다.

 

이런 GM의 거대화 전략은 1929년 발발한 경제 대공황의 탈출과정에서도 빛을 발한다. 이어 모델(Year Model)의 개념을 도입해 신차효과를 노린 차 만들기를 통해 소비자들을 끌어 들인 것이다. 정부는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해 도로 건설에 나섰고 자동차에 대한 갈망은 더 강해졌다. 그러니까 경제 발전을 위해 도로 건설을 하고 그 도로를 자동차가 달리게 하는 20세기 국가주도 개발형 경제의 전형이었다. 승용차의 판매대수는 1929년 459만대에서 1932년에 114만대로 감소했는데 1937년에는 397만대까지 회복했다. 이 과정에서 빅3의 시장점유율은 90%를 넘었다.

 

1938년 루즈벨트 대통령이 남북 각각 세계의 고속도로 9만 Km를 건설했다. 그로 인해 인구 5만명 이상 도시가 이 고속도로망과 연결되게 되었다. 미국은 도로 정체 현상이 나타나면 ‘카 풀’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도로 건설을 요구해 지금은 전체 경작 면적의 10%가 도로다. ‘카 풀’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기름 절약 캠페인을 위한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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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부터 미국 자동차회사들과 독일 등 유럽 메이커들의 라인업 전략에 차이가 나기 시작한다. 미국 메이커들은 모델 라이프 사이클을 짧게 해 소비자들의 보유기간을 줄여 신차로 교환하도록 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 과정에서 등장한 마케팅 용어가 ‘의도된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다. 선대 모델과 확연히 구분되는 스타일링 디자인과 기술의 채용을 통해 소비자들의 구매 욕구를 부추긴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이후 자동차뿐 아니라 모든 산업에 걸쳐 확대되어갔다. 당연히 자동차회사들은 끊임없이 새 차를 쏟아냈다.

 

그에 반해 시장의 규모가 작은 유럽 메이커들은 변화를 위한 차 만들기보다는 전통을 중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는 20세기 말 일본차의 부상으로 다시 한 번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유럽 메이커들은 8~10년마다 모델체인지를 하는데 반해 미국 메이커들은 평균 6년 정도의 주기를 두었다. 그에 비해 일본 메이커들은 4년마다 새 차를 내놓아 빠르게 변화하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뿐만 아니라 2년 마다 부분 변경 모델을 내놓고 매년 초에는 이어 모델로 상품성을 개량해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어쨌든 GM의 전략은 시대적인 흐름과 맞아 떨어져 미국의 자동차업계는 1930년대 이후 적어도 규모의 측면에서는 세계를 주름잡기에 이른다. GM은 1931년에는 미국 최대 메이커로 부상해 오랜 영화의 바탕을 마련했다. 이후 끝없는 성장을 거듭해 1954년에는 미국 내 시장 점유율 50%를 차지하며 군림하기 시작했고 그 해 자동차는 누계 대수 5,000만대를 돌파했다. 국내 기반이 확고히 정비되자 해외에서도 사업확장을 계속해 나갔다. 1925년에는 영국의 복스홀을, 1929년에는 독일의 아담 오펠을 매수했고 프랑스에서는 부품생산을 개시했다. 1930년 이래 호주, 브라질, 멕시코, 남아프리카 등으로도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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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민간용 승용차 생산을 중단하고 군수용차를 만들었다. GM은 미국에서 생산한 자동차는 연합군에게 납품하고 1929년에 인수한 독일의 오펠이 만든 자동차는 히틀러에게 공급했다. 2차 대전 중 250개의 미국 기업이 히틀러에게 부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미국에게 전쟁은 선과 악, 혹은 동서간의 전쟁이 아니라 그들만의 이익을 위한 시장이었다.

 

대전 후는 전후 재건으로 인한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한 수요의 급증과 한국전쟁에 의한 호황으로 국내 수요는 1950년대에 500-600만대로 증가함과 동시에 승용차의 대형화, 고급화가 진척되었다. 이런 시장의 변화에 따라 GM은 V형 8기통 엔진과 자동변속기 탑재 등 많은 제품을 적극적으로 투입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자동차의 복수 보유 세대수가 증가하고 유럽 수입차를 중심으로 소형차 시장이 확대되자 GM은 1970년에 서브 컴팩트카 베가(Vega)를 투입하는 등 1973년에는 전 차종 다운사이즈를 결정했다. 유럽에서의 다운사이징에 이은 두 번째 소형화가 이루어졌다.

 

포드와 크라이슬러를 합해 소위 말하는 빅3로 완전히 통합된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미국의 자동차산업은 세계를 호령했고 더불어 미국 경제를 부흥시켰다. 물론 미국 내에서는 1920년대 후반 철도산업과 자동차산업 중 어느쪽을 택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 끝에 자동차쪽으로 결정하면서 그 힘은 훨씬 커진 역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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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1960년에서 1970년대까지 GM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를 지배했었다. 그래서 GM의 CEO를 13년이나 역임하고 후에 국방장관이 된 찰스 윌슨은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 좋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었다. 특히 2차 대전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많은 유럽의 자동차 종주국과 달리 미국의 자동차회사들은 사업의 연속성을 살릴 수 있었다. 1955년 GM은 세계 최대 기업이 되었고 GM의 경제력은 미국 GNP의 3%에 달했다. 1950년대는 말 그대로 GM의 시대였고 명실상부한 미국의 국민 기업이었다. 그래서 20세기를 미국의 세기라고 한다.

 

GM 등 미국 자동차회사들은 소비자를 끌어 모으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미국인의 개척 정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도구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동성과 자유, 그리고 권력의 상징으로 그들은 프론티어 정신을 이용했다. 그 결과 지금도 미국의 빅 20 스포츠 이벤트 중 17개가 모터스포츠다. 문화적으로는 자동차 극장이 생겨났고 맥도날드와 홀리데이 등 숙박업소는 도심이 아닌 고속도로 주변에 생겨났다. 젊은이들은 바짝 붙어 대열 주행을 하며 그들의 힘을 과시했다. 꼬리를 물고 달린다는 의미로 이들을 테일 게이터(Tail Gater)라고 한다. 그들이 하는 행위는 테일게이팅이다. 히치 하이킹이라는 단어도 이 시대의 산물이다.

 

불후의 청춘 스타, 제임스 딘은 포르쉐 스파이더를 사랑했다. 그는 결국 사랑하는 포르쉐를 몰고 질주하고 교통사고로 짧은 생을 마쳤다. 클라크 게이블과 소피아 로렌은 2인승 벤츠 오픈카로 스피드를 즐겼고, 「세기의 발레리나」 이사도라 던컨은 이탈리아의 명차 부가티로 드라이브를 즐겼다. 로큰롤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도 자동차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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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 머스탱을 튜닝한 1967년산 셸비 GT40은 니콜라스 케이지가 '식스티 세컨즈'에서 시속 230㎞까지 달리다가 360도 회전하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007 제임스 본드 영화 시리즈는 영국의 스포츠카인 애스턴 마틴을 세계적인 차로 만든 계기를 마련했다. 자동차광들이 스타가 되었는지, 스타들이 자동차광이 되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미국인들에게 자동차는 이동 수단과 신분의 상징을 넘어 선 그 무엇이었다. 그것은 PPL기법으로 발전해 오늘날 TV드라마와 극장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다. 

 

자동차회사들은 SUV와 픽업트럭 등 라이트 트럭에 대한 세제 혜택을 이끌어 내며 수익성 높은 차의 생산을 늘려갔다. 그만큼 연비 및 안전 기준은 약해졌다. 1950년대는 도심의 스모그의 화학성분을 분석해 자동차 배기가스가 주범이라는 것을 밝혀냈지만 자동차회사들의 로비에 당국은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이런 다양한 전략으로 인해 자동차는 제재 받지 않는 마약이 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자동차는 미국인의 세속적인 종교이자 자유와 독립의 상징이며 소비주의 욕망의 지존이라고 한다.
 
GM은 그러나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의 금융 우선 정책에 현혹되어 본업보다는 GMAC에 더 비중을 두면서 산업의 본질을 잃어갔다. 레이건 대통령의 금융 우선 정책은 미국 제조업 종사자 1,500만명의 일자리를 앗아갔다. 마가렛 대처 수상도 금융 우위의 정책으로 영국의 제조업 종사자를 800만명에서 300만명 수준으로 떨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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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정부 시절의 금융규제 철폐로 제조업보다는 금융업 중심의 경제가 부각되면서 미국 자동차산업은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그것이 ‘역외 이전’으로 표현되는 해외 현지 건설이었다. 투자자나 자동차회사의 입장에서는 수익을 낼 수 있었을지라도 미국인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이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엄청난 예산을 전쟁에 허비한 부시 정부의 실책과 맞물려 미국 경제는 점차 그 힘을 잃어갔다.

 

1921년 이래 60년 이상 흑자를 기록해 오던 GM은 1980년대에는 적자로 돌아섰고 1998년 영업이익의 80%는 자동차 판매가 아닌 금융사업으로부터 나왔다. 영국의 로버는 도산했고 2009년 미국의 GM과 크라이슬러는 파산보호신청까지 들어갔다가 연방정부의 돈으로 가까스로 회생했다. 신자유주의를 부르짖는 미국의 경제논리와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만큼 자동차산업이 한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말해 준다.

 

진정한 디트로이트 맨 밥 러츠(Robert Lutz)는 자동차산업은 '돈 놓고 돈 먹기' 산업이 아니며 서비스업과 제조업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고 일갈하고 있다. 그는 2009년부터 시작된 21세기 전기차 바람의 주역으로 쉐보레 볼트를 기획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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