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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오토뉴스 채영석 국장은 30년 동안 자동차 전문기자로 활동해 왔으며 인터내셔널 엔진 오브 더 이어, 월드 카 오브 더 이어의 심사위원이다. 골드만 삭스 등 투자은행들과 다른 시각으로 산업 분석을 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3,000종 이상의 차를 타고 시승기를 쓰고 있으며 세계적인 모터쇼와 기술세미나 등에 참석해 글로벌 차원의 트렌드 분석에 힘을 쏟고 있다. 2013년 골드만 삭스가 유가 200달러 시대를 이야기했을 때 역으로 유가 폭락 가능성이 있다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16. 합병의 시대- 1. BMW와 다임러의 세계화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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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charleychae@global-autonews.com)
승인 2017-01-13 05:30:46

본문

현대자동차가 기아자동차를 인수 합병했던 1998년, 독일의 다임러 벤츠와 미국의 크라이슬러가 합병했다. 회사 이름은 다임러크라이슬러로 바뀌었다. ‘세기의 합병’이라는 표현이 말해 주듯이 두 회사의 합병은 당시 자동차산업이 처한 입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20세기 말의 이런 인수합병 바람은 비용저감과 규모의 경제라는 자동차산업의 특징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량 생산 메이커들의 경우 연간 200만대 전후를 생산 판매해야 손익 분기점에 달할 수 있다는 이론이 통용됐었다. 그러던 것이 20세기 말에는 400만대로 확대됐다. 이는 시장에 따른 환경의 차이, 경기 불황 등으로 시판 가격을 올리지 못하게 되면서 그만큼의 비용저감을 위한 방안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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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자동차산업은 초창기부터 이합집산의 연속이었다. GM과 포드는 창업 초기부터 다양한 브랜드들의 집합체 형태로 발전했고 유럽에서는 1926년 고트리프 다임러와 칼 벤츠가 합병해 다임러 벤츠가 된 것이 대표적이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전 세계 자동차회사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그 결과 금융자유화를 기치로 내 세웠던 영국의 자동차회사들은 몰락하거나 외국 업체에게 넘어갔고 미국 자동차회사들은 파산보호신청을 통해 연방정부의 돈을 받아 다시 새로운 회사로 태어났다.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의 판단이 산업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지 잘 보여 준 사건이었다. 그래서 지금 더 이상의 해외 공장은 안 된다는 트럼프의 정책이 주목을 끌고 있다.

자동차산업만으로 국한하면 인수합병 바람의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 자동차회사들의 세계화 전략에 있었다. 1950년 전 세계 자동차 판매 70%를 장악했던 미국을 제치고 1980년 전 세계 자동차판매 1위에 오른 일본의 위세는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됐다. 현지 생산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해 1993년 다시 미국이 자동차 생산 1위에 오르게 했다. 미국산 일본차로 인한 것이었다.

 

이런 일본차의 급부상은 자동차 종주국 독일과 자동차 대국 미국에게 충격이었고 그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미국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차를 무시했다. 그러나 결국은 GM은 토요타와 합작으로 공장을 짓고 크라이슬러는 미쓰비시의 모델을 OEM으로 판매하는 등 일본차의 힘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 이 정도로는 궁극적인 비용저감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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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독일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극심한 불황이 닥쳤고 자동차회사들은 그 여파를 고스란히 떠 안을 수밖에 없었다. 양산 브랜드인 폭스바겐이 가장 먼저 어려움을 겪었고 그 다음으로 프리미엄 브랜드인 메르세데스 벤츠가 직격탄을 맞았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1992년 처음으로 BMW에게 판매 1위 자리를 내주었고 1992년 2만 2,000명, 1993년 1만 4,700명의 인원 감축을 해야만 했다.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은 것은 BMW였다. 그럼에도 1993년 상반기 순이익이 2억 5,500만 마르크로 40%가 줄었다. 당시 기자는 뮌헨을 취재할 기회가 있었는데 주당 근무시간에 대한 노사간의 협의과정을 지켜 볼 수 있었다. 노사는 주당 36시간으로 근무시간을 줄이면서 해고를 최소화하는 방안에 타협했다. 그럼에도 뮌헨 공장은 700명을 해고했다.

 

이런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독일 회사들은 밖으로 눈을 돌렸다. BMW가 앞장 섰다. 영국의 로버 그룹을 인수하고 미국 스파르탄버그에 현지 공장을 건설하는 등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1994년 영국의 쓰러져가는 MG로버를 인수한 BMW는 처음에는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대중차 브랜드인 로버와 오프로더 브랜드 랜드로버, 그리고 롤스로이스까지 얽힌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단순한 시너지 효과만을 계산했던 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로버 75라는 모델을 만들어 주목을 끌기도 했으나 이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2002년에 폭스바겐으로 자리를 옮긴 당시 CEO 베른트 피세츠리더가 MG로버 그룹 매각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로버의 미니만 소유권을 가져 오고 폭스바겐이 가져갔던 롤스로이스에 대한 소유권도 손에 넣었다. 당시 폭스바겐과의 사이에서 벤틀리와 롤스로이스에 대한 소유권을 놓고 저울질했었는데 최종적으로 벤틀리는 폭스바겐으로 넘어갔다.

 

영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하이엔드 브랜드를 놓고 다투는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그들이 살려 내지 못한 롤스로이스와 벤틀리는 독일인들의 손에 의해 날개를 달게 됐고 지금은 판매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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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손에 넘어간 롤스로이스와 벤틀리는 예상 외의 성공을 거두었다. 벤틀리는 컨티넨탈 GT와 플라잉 스퍼의 수요가 급증해 폭스바겐의 페이톤을 생산하는 드레스덴의 유리공장에서도 생산됐다. 롤스로이스는 BMW 7시리즈와 플랫폼을 공유한 팬텀을 출시해 시장에서 높은 반응을 얻었다.

 

BMW가 이즈음 결정했던 것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영국 국민차 미니 살리기였다. 사실 미니는 미니는 1959년 처음 태어나 2000년 9월 538만 7,862대째를 마지막으로 로버의 손을 떠났다. 단종될 당시의 미니의 엔진은 1,271cc로 최고출력이 53마력과 압축비를 올려 63마력으로 올린 두 가지가 있었다. 그때의 인상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처음 만난 것은 일본이었다. 에어컨도 없고 좁아 터진 실내는 답답하다 못해 짜증이 날 정도였다. 미니를 누군가가 한국에 수입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불가능한 가장 큰 이유를 에어컨과 자동변속기가 없다는 점을 꼽았다. 당시 이 차를 사랑하는 영국인들의 시각으로 보면 자동변속기는 가당치도 않은 장비였지만 한국 시장은 좀 달랐다.

 

어쨌든 미니의 모회사인 로버가 BMW로 넘어가고 다시 벤처회사에게 넘어가는 과정을 겪으면서 미니의 운명도 폭풍 속의 돛단배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BMW는 랜드로버까지 포드에게 넘기면서도 미니만은 놓지 않았다.

 

아니 놓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지금의 미니를 만들어 내기 전까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이미지 구축작업을 했다. 차가 없는데도 새로운 분위기를 통한 커뮤니티 활성화 작업 등 정말 지극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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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는 영국에서 생산되지만 품질과 신뢰성, 성능 등으로 명성 높은 독일 BMW의 엔지니어들에 의해 개발되었다는 이유로 영국인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품질이 조악하다는 이유로 1967년 미국시장에서 철수했던 미니는 BMW에 의해 재 탄생해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있고 그 다음이 일본이다.

 

미니는 초창기 연간 10만대 판매를 목표로 했었으나 2016년에는 36만대를 넘겼으며 누계 생산대수도 벌써 400만대에 육박하고 있다. 라인업도 해치백을 시작으로 쿠페, 크로스오버, 로드스터, 등 7가지 차체 타입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이런 전략은 영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 미니의 주인 MG로버를 끝으로 영국의 자동차회사들은 모두 외국 자본에 넘어갔다. 대형 공장도 선더랜드는 닛산에게, 더비는 토요타, 스윈든은 혼다, 그리고 옥스포드의 미니는 BMW에게 넘어갔다. 마가렛 대처가 금융자유화를 부르짖은 결과 영국 내 제조업 종사자게 800만명에서 300만명으로 줄어든 것과 궤를 같이 하는 내용이다. 미국도 레이건의 금융자유화 정책으로 1,500만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정치가 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트럼프가 제조업의 회귀를 부르짖으며 보호 무역정책을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이런 소형차의 재발견은 메르세데스 벤츠의 스마트에서도 확인된다. 스위스 시계 회사와 합작에 의해 개발된 스마트는 2016년 14만 4,479대가 팔려 미니의 36만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다임러AG의 전동화 전략을 위한 기간 모델로 많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유럽에는 없는 598cc라는 초 저 배기량에 터보차저 인터쿨러를 장착한 엔진을 탑재한 스마트는 두 사람이 타는 데는 부족함이 없는 모델이다.

 

이 스마트라는 차를 만드는 회사는 MCC(Micro Compact Car). 스마트카는 탄생 초기에는 스위스 비엘에 있는 바로 이 MCC에서 생산 판매를 담당했었다. 처음 출발할 당시에는 스와치라는 시계로 잘 알려진 SMH사와 메르세데스 벤츠간의 합병회사였다. 그런데 데뷔 초 판매부진으로 인해 MCC는 지금은 메르세데스 벤츠의 자회사가 되어 있다. 1998년 MCC Smart gmbH로 바뀌었다가 2002년 9월 Smart gmbH로 다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BMW 미니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차체 타입의 모델로 라인업을 확대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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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용보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임러 벤츠와 크라이슬러의 합병이 더 주목을 끌었다.  1998년 합병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은 ‘세기의 합병’이라는 표현까지 동원하며 폭 넓은 잠재력을 바탕으로 그 시너지 효과가 상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합병은 독일의 고급자동차 기술과 재빠르게 몸집을 줄인 미국 경영진의 결합이었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두 자동차 브랜드, 다임러 벤츠의 매끈한 메르세데스 세단과 당시로서는 높은 인기 속에 수익성이 높은 크라이슬러의 지프 디비전의 SUV와 닷지 디비전의 픽업이 한 팀을 이루었다며 누구나 좋은 평가를 내렸다.

 

비용을 절감해 다임러크라이슬러 AG를 일본과 독일, 그리고 미국의 자동차회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혹독한 경쟁을 견디어 이겨낼 수 있는 거대 자동차 회사로 만들고자 하는 저변에는 규모의 경제의 논리가 있었다.

 

협상의 기획자이자 주관자였던 당시 다임러 AG의 CEO 위르겐 슈렘프(Juergen Schrempp)의 진두 지휘 하에 두 회사의 합병으로 크라이슬러의 새로운 세단에 메르세데스 벤츠의 첨단 드라이브 트레인을 채용한 신차가 나왔다. 그는 더 많은 신 모델을 선보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합병으로 인한 완벽한 강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서로 다른 브랜드를 갖고 있던 회사이니만큼 어떻게 협조해야 하는 가를 먼저 배워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다임러 벤츠와 크라이슬러가 합병했을 때는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의 공조방법에 대한 교과서는 없었다는 것이다. 부품과 설계작업을 서로 공유하여 비용을 줄이고 생산량을 늘려 비용을 저감하게 된다는 이론적인 생각은 있었다.

 

배워 나가는 동안 회사의 주가와 수익률 특히 수익성이 취약하던 크라이슬러는 심각하게  침체됐다. 크라이슬러는 GM 및 포드와의 가격 전쟁으로 인해 2003년 2사분기에 11억불의 적자를 기록했고 3사분기 소득은 겨우 1억7,100만 달러에 그쳤다. 그것도 CEO 디터 제체(Dieter Zetsche)사장이 2001년 시작한 구조조정으로 3만여명의 인원감축과 6개의 공장을 폐쇄한 후에 고통을 통해 얻어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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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병 당시 급등했던 다임러크라이슬러의 주가는 그러나 내리막길을 걸었다. 1998년 합병 당시 다임러크라이슬러의 통합 주식은 11월 12일 뉴욕 주식거래소에서 84.31달러에 거래되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2003년에는 지난 몇 년 동안의 경제적인 어려움과 주식시장의 손해로 인해 30불 수준으로 하락했다. 시장의 반응이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다임러크라이슬러는 2007년 5월 14일 미국 크라이슬러 그룹의 80.1% 및 크라이슬러 관련 금융서비스회사를 55억 유로(74억 1,000만 달러)에 미국 투자회사(국내에서는 사모펀드라고 하고 있다.) 서베러스(Cerberus) 캐피탈 매니지먼트(CBS.UL)에 매각되기에 이르렀다.

 

통합에 의한 시너지 효과를 지나치게 평가해왔다는 것이 다임러 벤츠의 공식 입장 표명이었다. 1998년 당시 '세기의 합병'을 도출했던 크라이슬러의 밥 이튼과 다임러 벤츠 위르겐 슈렘프의 판단이 옳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불어 다임러와 크라이슬러 모두 새로운 기회를 찾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시인했다. 다임러크라이슬러의 디터 제체 사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세기의 합병’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인정했다.

 

합병한지 8년 반. 픽업 트럭등 대형차와 SUV 등이 주력인 크라이슬러와 프리미엄 브랜드 메르세데스 벤츠를 보유한 다임러와의 이질성은 차종 구성의 차이만이 아니었다. 다임러측은 메르세데스 벤츠의 이미지에 손상을 입을 것에 대해 우려를 했고 그 때문에 합병의 최대 효과 중 하나인 비용 저감으로 연결되는 부품 공유화에도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다른 합병 회사와 달리 두 회사간의 플랫폼 공유 등이 폭 넓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다임러에 의한 크라이슬러의 지배가 확실해지고 그로 인해 크라이슬러로부터 인재 유출도 발생했다고 한다. 두 회사는 법적으로는 합병을 했음에도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찾지 못하고 서로가 기회만 보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크라이슬러는 북미사업부의 판매 부진으로 더욱 압박을 받게 되어 인원저감을 중심으로 한 구조조정을 반복하는 현상을 초래했다. 뿐만 아니라 미씨비시와 현대자동차와의 제휴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확대 노선에도 수정이 가해졌고 결국 이 두 회사와는 상호 출자해소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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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터 제체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문화가 다른 두 회사간의 궁극적인 합병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데에 대한 이사회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크라이슬러에 대한 경영권을 포기하는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1998년에 독일 다임러 벤츠가 미국 크라이슬러를 360억 달러에 매수함으로써 실현된 대서양을 가로 지르는 자동차 메이커의 대형 합병은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은 막을 내리게 됐다.

 

하지만 두 회사의 가장 큰 문제는 독일과 미국 엔지니어들간의 현격한 가치관의 차이에 있었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입장에서 본 크라이슬러의 기술력은 형편없었다. 이는 공유할 부분이 없는 태생적 한계와 더불어 서로의 장점을 살린다는 합병의 근거를 찾지 못했다. 결국 두 회사는 물리적인 합병을 통해 화학적인 합병을 기대했으나 갈라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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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임러크라슬러의 사건은 독일 메이커들이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의 입지 확대를 위한 것이었다. BMW는 미국에 생산 공장을 건설하며 Made in Germany 에서 Made by Germany로 전략을 바꾼다. 1995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스파르탄버그에서 3시리즈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는 3시리즈와 5시리즈, Z4를 비롯해 SUV 시리즈가 생산 중이다. 지금은 멕시코에 또 다른 공장을 건설해 신형 3시리즈 생산에 들어간다.

 

2년 뒤인 1997년 메르세데스 벤츠가 미국 앨라배마 투스칼로사 공장에서 M클래스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프리미엄 SUV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출시되어 오늘날 스포츠카 메이커까지 SUV를 내놓게 했다. 이곳 역시 SUV를 중심으로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독일에서 가장 잘 나가던 두 회사가 독일이 최악의 경기침체를 겪는 중 미국에 공장을 세우기로 한 데는 이유가 있다. 달러와 독일 마르크간의 통화변동을 피할 수 있으며 인건비가 독일은 아주 높았고 미국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또한 미국인들이 미국에서 일하게 함으로써 일본인들이 겪은 바 있는 미국의 보호주의를 피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차가 가장 많이 팔리는 곳에서 차를 생산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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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독일에서 미국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바로 미국인인 크리스 뱅글이 1992년 BMW의 디자인 수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BMW 최초의 미국인 디자이너인 그의 시대 BMW는 엄청났다. 대표적인 것이 2001년의 5세대 7시리즈였다. 그의 디자인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그가 있는 독안 BMW는 메르세데스 벤츠를 추월해 프리미엄 브랜드 1위에 올랐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끊임없는 의견 충돌에 지친 크리스 뱅글은 2009년 BMW를 떠났다.

 

독일 메이커들의 미국 진출에서 가장 빛을 본 것은 프리미엄 SUV의 시장의 대대적인 확대다. 메르세데스 벤츠 ML클래스에 이어 2000년에 BMW가 브랜드 이미지에 걸맞게 ‘달리는 SUV’를 표방하며 X5를 출시했다. 이 때부터 거의 모든 메이커들이 SUV 시장에 뛰어 들었다. 정통 스포츠카 메이커인 포르쉐도 카이엔이라는 SUV를 내놓았다. 이후 석유가가 치솟자 ‘소형 SUV’, ‘컴팩트 SUV’, ‘크로스오버’ 들이 속속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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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V의 시조는 미국 크라이슬러의 지프 체로키다. SUV는 Sport Utility Vehicle의 약자로 원래 픽업트럭을 즐겨 타던 미국의 소비자들이 화물 적재보다는 탑승자에 더 비중을 두고 부드러운 승차감을 추구한 모델을 일컫는다. 이를 두고 MPV(Multi Purpose Vehicle;다목적용자동차), 또는 RV(Recreational Vehicle:레저용 자동차)라고들 했었다. 21세기 들어서는 이들 용어가 크게 SUV로 통일되었다. 대신 각 메이커들의 차의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다양한 파생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SUV는 장르상으로 구분하자면 크로스오버, 즉 승용차 감각과 레저용차의 감각을 동시에 지닌,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퓨전카이다. 음식이나 음악에도 두 가지 이상의 장르를 혼합하면 퓨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다시 대형, 중형, 소형 SUV 로 구분되는데 우리는 편의상 크로스오버라고 하면 소형과 중형 SUV를 떠 올린다. 그 중에서도 사다리꼴 프레임이 있는 트럭을 기본으로 한 모델이 아닌 승용차 플랫폼(차대)를 베이스로 하는 모델들을 말한다.

 

승용형 SUV의 개념을 처음 도입한 것은 프레임을 베이스로 모노코크 차체를 올린 기아자동차의 초대 스포티지였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는 1994년 당시 모노코크 보디의 플랫폼을 베이스로 개발한 토요타 RAV4가 ‘승용형 SUV’의 시조로 인정받고 있다. 모노코크 보디 SUV의 두 번째 일본 모델은 시빅을 베이스로 1995년에 출시된 혼다 CR-V. 이 후 두 모델은 미국시장에서 세단형 도시 감각의 SUV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크로스오버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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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는 2000년에 처음으로 X5를 SAV(Sport Activity Vehicle)이라는 장르를 표방하고 출시된 이래 지금은 X1부터 X7까지 모든 세그먼트를 망라하고 있다. 메르세데스 벤츠도 앞바퀴 굴림 모델을 기본으로 하는 GLA를 필두로 GLC, GLE, GLS 등 풀라인업을 구축하고 있다.

 

이 싸움에서 BMW가 벤츠보다 우위에 서게 된다. 2005년 BMW가 다시 메르세데스 벤츠를 제치고 프리미엄 브랜드 세계 1위 자리로 올랐다. 그런데 메르세데스 벤츠 브랜드는 2015년 말 SUV 라인업을 재정비한 것이 성공을 거두어 2016년 판매에서 208만대를 판매해 200만대를 판매한 BMW를 14년만에 다시 역전에 성공했다. 지금은 SUV의 싸움이 성패를 좌우하는 시대이다. 중국시장에서의 SUV붐은 미국의 그것을 훨씬 뛰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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