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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오토뉴스 채영석 국장은 30년 동안 자동차 전문기자로 활동해 왔으며 인터내셔널 엔진 오브 더 이어, 월드 카 오브 더 이어의 심사위원이다. 골드만 삭스 등 투자은행들과 다른 시각으로 산업 분석을 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3,000종 이상의 차를 타고 시승기를 쓰고 있으며 세계적인 모터쇼와 기술세미나 등에 참석해 글로벌 차원의 트렌드 분석에 힘을 쏟고 있다. 2013년 골드만 삭스가 유가 200달러 시대를 이야기했을 때 역으로 유가 폭락 가능성이 있다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18. 합병의 시대– 3. 폭스바겐과 토요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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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charleychae@global-autonews.com)
승인 2017-01-19 17: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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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벌어진 인수합병의 열풍에서 폭스바겐과 토요타의 행보는 사뭇 달랐다. 회사의 창립은 두 회사 공히 1937년이지만 생산으로만 보면 토요다 자동방직기제작소에 자동차생산 사업부가 설치된 1933년의 토요타가 먼저다. 2차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난 비틀을 시작으로 골프 등 패밀리카의 대명사로 성장해 온 폭스바겐과 한국전쟁으로 기사회생한 토요타는 폭스바겐을 벤치마킹했지만 그 폭스바겐을 능가하는 기업 가치를 쌓았다. 두 회사의 20세기를 전후 한 발자취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토요타는 2009년 미국에서의 대규모 리콜사태와 동일본 대지진을 겪으며 위태로웠고 폭스바겐은 2015년의 디젤 게이트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연방정부의 도움을 받아 새로 태어난 GM과 달리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다.

 

20세기 말 폭스바겐도 인수합병의 대열에 뛰어 들었다. 1986년 스페인의 국영 자동차회사 세아트를 인수했고 1990년 르노와의 경쟁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의 스코다를 사들였다. 두 회사의 인수합병은 폭스바겐 그룹의 플랫폼 공유화 전략과 맞물려 상당한 성과를 냈고 경영진은 고무됐다. 1998년에는 부가티, 1999년에는 람보르기니 브랜드를 사들였고 2003년에는 BMW와의 경쟁을 통해 롤스로이스를 내 주고 벤틀리의 소유권을 넘겨 받기도 했다.

 

이어서 2005년부터는 포르쉐와의 합병이 진행된다. 2005년 10월 포르쉐가 폭스바겐의 지분 18.53%를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2006년에는 25.1%, 2007년 30.9%로 늘렸다. 그리고 2009년 1월 50.76%까지 늘렸고 그 해 5월 두 회사는 합병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포르쉐는 경영위기에 처했고 결론은 폭스바겐이 포르쉐를 인수하게 됐다. 이에 대해서는 페르디난트 피에히로 대변되는 이 가문의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어 간단하게 위에서 설명한 데로가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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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와중에 폭스바겐은 심각한 경영 위기에 처한다. 2004년 기준 폭스바겐의 10만 3,000명에 달하는 근로자들은 메르세데스 벤츠보다 15% 이상의 급료를 받고 있었다. 폭스바겐 디비전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가장 높은 보수를 받고 있었으며 더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는 아우디 디비전의 근로자보다 높았다. 그리고 노조측은 4%의 임금인상과 10년 동안 고용보장을 요구하고 있었다. 폭스바겐의 경영 상태는 가까스로 수지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도처에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폭스바겐의 최대 주주는 남 삭소니(Lower Saxony)주다. 주 정부 차원에서 수익보다는 고용보장에 더 비중을 두어왔기 때문에 유럽의 다른 메이커들에 비해 변화가 더뎠다. 이것이 잘 나갈 때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일본 메이커들의 공격과 중국시장에 대한 글로벌 메이커들의 대대적인 공략으로 폭스바겐의 입지는 축소됐다. 미국시장에서는 인센티브를 50%나 올렸으나 판매는 16%가 줄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비용구조의 개선밖에 없었다. 당시 GM은 유럽에서 1만 2,000명의 인원 감축을 발표했는데 그 대부분은 독일에서 이루어졌다.

 

폭스바겐의 문제는 독일의 높은 임금뿐만이 아니었다. 유로화의 급등으로 인한 경쟁력 약화도 한 몫을 하고 있었다. 경영에도 책임이 있었다. 환율 변동을 상쇄할만한 조처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페이톤이라는 럭셔리카를 개발하는데 과다한 투자를 했다. 당시 감독위원화를 이끌고 있던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주도한 것이었다.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폭스바겐은 다임러크라이슬러의 미국 디비전에서 디터제체와 함께 COO로 활약한 비용저감의 귀재 볼프강 베른하르트를 영입했다. 그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은 어떻게 노조문제를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폭스바겐 근로자들은 경영진과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독일 전후 시스템이 통하는 대표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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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폭스바겐은 BMW 출신 베른트 피셰츠리더가 이끌고 있었다. 그는 임금 2년 동결과 2011년까지 30% 인건비 저감을 위한 유연한 업무규칙의 제시, 그리고 2005년까지 50억 달러를 저감하기 위해 5,000명의 화이트 컬러 임원 감축 등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베른하르트는 모델 라인업을 증강시키면서 비용 저감을 이루어 내야만했다. 그는 크라이슬러에서 3년 동안 7개의 공장 폐쇄 및 매각과 35,000명의 인원 감축 등을 통해 140억 달러의 비용 저감을 이루어 낸 바 있다.

 

폭스바겐의 문제 중 일부는 관리자들이 비용 저감에 있어 재량권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시기임에도 남 삭소니 주는 정리해고나 공장폐쇄를 하지 않으려 해왔다. 한편으로 불의의 경영권 탈취에 대한 방어막으로서 역할을 해 주었다. 독일 자동차시장도 장기침체에 빠져 있었다. 2003년 폭스바겐 수익 12억 달러의 절반 이상을 올려준 중국시장의 수요도 냉각되고 있었다. 새로운 경쟁 브랜드들이 30%가 넘던 폭스바겐의 중국시장 점유율을 잠식해 오고 있었다.

 

그런 배경으로 인해 베른하르트의 영입으로 인한 주가의 8% 랠리 후에도 폭스바겐의 시장 가치는 130억 달러에 그쳤다. 이는 비슷한 규모인 다임러크라이슬러의 420억 달러라는 자산평가와 대비됐다. 폭이 크지는 않지만 볼프강의 영입 효과는 있었다. 2006년 폭스바겐 브랜드의 판매는 339만 5,000대로 2005년 대비 10% 가량 증가하는 성적을 거두었다. 폭스바겐 그룹의 다른 브랜드를 모두 합하면 573만대로 9.3%가 증가했다.

 

그런 상황에서 2006년 말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폭스바겐 그룹의 경영 전면에 나섰다. 피에히가 힘을 실어 준 마틴 빈터콘이 등장했고 베른트 피셰츠리더와 볼프강 베른하르트은 폭스바겐을 떠났다. 베른하르트는 지금 다임러 AG의 상용차 부문을 책임지고 있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라인업 구성에 대한 사고의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소프트 톱이 아닌 탈착형 루프를 채용한 이오스에 대한 것이다. 유럽에서는 소프트 톱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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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빈터콘은 ‘폭스바겐 모델은 폭스바겐답게’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등장으로 볼프강 베른하르트가 주도한 모델들에 대한 비판들이 나왔다. 그 때문인지 폭스바겐의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Peter Schreyer)가 기아자동차로 자리를 옮기는 일이 발생했다. 피터 슈라이어는 아우디 TT를 디자인해 상당히 촉망받는 디자이너로 평가 받아 온 인물이었다. 이 즈음 폭스바겐 산하에는 아우디와, 세아트, 스코다, 벤틀리, 부가티, 람보르기니, 폭스바겐 상용차 등 여덟 개 브랜드가 있었다.

 

당시 상황은 양산차 메이커들의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중 예외적으로 토요타는 끝없는 전진을 하고 있었다. 나머지 메이커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판매 감소와 수익률 저하 등을 겪으며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폭스바겐만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 ‘타도 토요타’를 목표로 전의를 불 태울 정도로 호전됐다. 2006년 폭스바겐 그룹 전체의 승용차 판매대수는 523만 1,162대. 그 중 폭스바겐 브랜드가 331만 9,168대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아우디가 92만 846대, 체코의 스코다가 55만 6,347대, 스페인의 세아트가 42만 2,670대, 벤틀리 1만 36대, 람보르기니 2,095대 등이었다.

 

마틴 빈터콘의 힘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였다. 마틴 빈터콘이 전면에 나섰을 때 폭스바겐은 폭발적인 신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는 “driving ideas”라는 새로운 캐치 프레이즈를 내 세웠다. 자동차를 이용하는 즐거움을 모두 향유하면서 동시에 미래를 위한 창조적인 행보를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달리는 즐거움부터 하이테크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자동차산업이 직면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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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인 면에서도 직분사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다운사이징을 선도하며 경쟁자들에게는 트렌드세터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했다. 더불어 모델 라인업에서도 메르세데스 벤츠, BMW, 아우디 등과 같은 트림 다양화 전략을 통해 시장에 따른 대응을 철저히 하고 있다. 폭스바겐은 골프에 100개, 파사트에는 130개가 넘는 트림을 운용하고 있다. 골프의 경우 3도어와 5도어 차체를 시작으로 9개의 엔진, 4개의 변속기 등을 갖추고 있다. 이는 세분화라고 하는 시대적인 흐름을 주도한 폭스바겐의 힘을 보여 주는 내용이다.

 

마틴 빈터콘은 8개의 브랜드를 이용해 ‘통합과 분리’, 또는 ‘선택과 집중’을 좀 더 종합적으로 실행했다. 이 때부터 그의 카리스마가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의 작품인 소형차 UP! 이 그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어떤 상황에서도 다양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으면서 운동성능도 뒤지지 않으며 4인 가족이 필요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탈 수 있는 모델이 UP! 다. 마틴 빈터콘은 이 컨셉트카를 진정한 폭스바겐 이라고 했다. 물론 당연히 최고의 연비를 보여주어야 하고 충분한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2차 대전 당시 히틀러가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에게 요구한 국민차의 컨셉과 유사하다. 그래서 마틴 빈터콘은 “Back to the Basic’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다른 점이라면 양산 모델의 확대와 고급화 전략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것이다. 개성이 다른 브랜드들을 묶어 내고 동시에 분리 및 차별화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해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영역을 구축한다는 전략이다.

그의 생각은 빛을 발해 2007년 그룹 연간 판매 600만대를 돌파했다. 2014년에는 1,000만대 시대의 문을 열었고 지금은 토요타, GM, 르노닛산, 현대차그룹 등과 함께 볼륨 경쟁에서 앞 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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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빈터콘은 그러나 그를 믿어 준 피에히 박사를 2015년 봄에 밀어 내고 얼마 되지 않아 ‘디젤 게이트’라는 큰 산을 만나 불시에 퇴진하고 말았다. 엄청난 벌금울 내야 하는 사건으로 사태가 불거진 당일 독일 증시에서 폭스바겐 주가가 20조원 가량이 날아가 버렸다.

 

폭스바겐 디젤 게이트의 핵심은 질소산화물 저감장치의 품질 보증기관에 관한 것이다. 배기가스 저감장치는 백금을 비롯한 희귀금속이 많이 사용된다. EU에서는 8년, 일본은 16년, 미국은 24년의 품질 보증 기간을 담보할 수 있는 저감장치가 채용되어야 한다. 그만큼 고가이고 그것을 양산차인 폭스바겐 모델에 채용하면 시판가격이 높아진다. 그래서 무효화장비를 사용한 것이다. 이는 폭스바겐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도덕성에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다. 무효화 장비를 채용한 것은 비난을 받아 마땅하고 그에 상응하는 조처를 취해야 한다.

 

폭스바겐그룹의 미국시장과의 악연은 이번이 두 번째다. 1985년 전후해서 역시 미국에서 아우디를 중심으로 한 급발진 사태가 떠 올랐다. 그 사건으로 아우디는 미국시장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급발진으로 신고된 98% 이상이 조작 부주의로 밝혀져 유야무야로 끝났다. 의문을 제기했던 교수는 언론에 해명 기사를 싣는 등 공식적으로 사과까지 했지만 이후 미국시장에서 아우디는 고전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미디어들은 앞다투어 폭스바겐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금방이라도 회사가 무너질 것이라는 전망까지 서슴치 않았다. 2009년 토요타 리콜 사태와 비슷했다. 거의 모든 미디어들은 토요타의 종말을 예언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토요타만 남고 모두 사라진다.'는 논리에 동의했던 사람들은 토요타의 종말을 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떠들어댔다. 특히 한국에서는 폭스바겐의 몰락으로 현대차그룹이 가장 큰 혜택을 볼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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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예측은 다분히 감정적인 것이었다. 유럽시장에서는 50% 가량이 디젤차이지만 사건이 터진 미국은 3% 이하, 일본은 1%이하만의 디젤차가 판매된다. 세계 최대시장 중국은 승용차는 가솔린이 주류이다. 사건이 발발한 이후 여전히 폭스바겐과 아우디산 디젤차의 질소산화물 배출량 가장 적다는 데이터가 속속 나오고 있다.

 

2015년 약간 주춤했지만 2016년 폭스바겐 그룹 전체 판매 대수는 역대 최대 실적인 전년 대비 3.8% 증가한 1,031만 2,400대로 2년 만에 1,000만대를 돌파했다. 폭스바겐 브랜드는 2.8% 증가한 598만 7,800대가 팔렸다. 이로서 토요타를 제치고 2016년 글로벌 판매 실적 1위를 달성이 확실시 되고 있다. 토요타의 2016년 글로벌 판매실적은 1009만대로 전망되고 있다. 토요타는 매년 2월 초에 연간 판매대수를 공개된다.

 

폭스바겐 그룹을 들여다 보면 양산차의 대명사인 폭스바겐은 물론이고 프리미엄 브랜드 아우디의 활약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우디의 2016년 판매대수는 187만대로 메르세데스 벤츠와 BMW에 이어 3위이다. 그룹 전체 판매의 1/4 가량인데 영업이익은 전체의 5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다. 메르세데스 벤츠나 BMW보다 한 대 당 수익이 더 높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래서 지금 글로벌 플레이어들은 럭셔리 브랜드에 투자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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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토요타를 비롯해, 닛산, 혼다, 미쓰비시, 마쓰다, 스즈키, 후지중공업, 다이하츠 등 8개의 승용차 제조업체를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의 트럭 및 버스, 이륜차 회사등이 존재한다. 지금 글로벌 플레이어로는 토요타와 닛산, 혼다가 3강을 이루고 있다.

 

20세기 세계화 전략으로 전 세계 자동차업계를 긴장시켰던 일본 자동차회사들은 21세기 들어서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토요타는 1973년 4월부터 완전 주 5일 근무제를 시작한 이후 전체 고용인원의 1%가 채 안되는 수준의 비정규직을 유지해 갔다.

 

일본 자동차회사를 거론할 때 종신 고용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종신고용이 아니라 장기고용이라고 말한다. 이는 또 하나는 1950년대 파업의 경험에서 배운 상호공존의 정신이 토요타의 철학이 되었다. 여기에 토요타의 경우는 저 비용, 고효율을 기본 이념을 바탕으로 개선문화를 실천하고 있다. 거기에 세계화 전략, 즉 Made By Japan이 있다.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는 것은 ‘모노쯔꾸리(물건 만들기)’이다. 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정신이다. 토요타는 거의 모든 분야의 핵심기술을 직접 개발한다. 독일이 주도하고 있는 기술을 마냥 가져다 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술력이고 그로 인해 경기침체 속에서도 탄탄한 경영기반을 구축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노사간에 끊임없는 대화가 있다고 말했다. 서로간에 의견 차이가 있으면 마주 앉아 대화를 통해 풀어 가는 문화가 무엇보다 큰 자산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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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대규모 리콜 사태로 어려움을 겪었을 때도 그런 토요타 정신이 힘이 되어 극복했고 여전히 자동차업계 브랜드 순위 1위를 지키고 있다. 그 힘은 소비자들로부터 나왔다. 미국의 토요타 소비자들은 2009년 리콜 사태 때 여론의 질타를 무시하고 오히려 토요타를 옹호하는 움직임을 보인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80년 일본 자동차생산이 세계 1위로 올라선 이후 토요타는 그때까지 세계 1위 업체였던 GM과 항상 비교의 대상이 되어 오고 있다. 77년 동안 지켜오던 GM의 세계 1위가 창사 100주년을 맞은 2008년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판매 대수 기준인 세계 1위는 상징적인 의미가 다분하다. 토요타는 순이익 면에서 GM을 뛰어 넘은 지 오래다.

 

토요타가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강화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1997년 세계 최초의 양산 하이브리드 전기차 프리우스의 출시이다. 환경에 시대적인 대세로 떠 오른 상황에서 프리우스는 토요타를 친환경 메이커라는 입지를 구축하게 했다. 더불어 독일 메이커들이 주도한 파워트레인 개발에서 토요타만의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했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지금은 렉서스 브랜드의 모든 모델에 하이브리드 버전을 라인업하며 공세적인 자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21세기 전동화 바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초에는 토요타의 현금 보유 능력이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다. 토요타는 2003년 3월 31일 시점에서 150억 달러(1조 6,232억엔)의 현금 또는 현금 등가물을 보유하고 있었다. GM과 포드도 같은 정도의 현금을 보유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1979년까지의 일이었다. 제2차 석유파동으로 빅3는 큰 타격을 받아 GM은 1921년 이래 최대의 적자를 내고 말았다.

 

토요타는 2010년 최종 인수한 다이하츠를 비롯해 2005년 GM으로부터 인수한 후지중공업(스바루)이 있다. 2016년 말에는 스즈키와의 제휴를 검토하고 있다. 그러니까 혼다와 닛산을 제외한 일본의 군소업체들이 토요타를 중심으로 뭉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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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생산대수에서 GM은 874만 5,838대, 토요타는 754만 7,177대였다. 그러던 것이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판매가 급증해 2005년에는 823만대, 2006년에는 906만대로 GM을 제쳤다.

 

이런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토요타는 해외 생산 비중을 더욱 늘렸다. 다른 브랜드를 인수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기술로 생산 시설을 확대해 간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토요타는 2006년 국내 생산 411만대, 해외 생산 400만대 수준이었다. ‘2010년 글로벌 비전’을 통해 1,040만대 목표를 설정하면서 해에 공장 10개 추가, 생산 260만대 증강 계획을 발표했다. 일본 내 420만대, 해외 620만대가 그것이다.

 

이런 확대 정책은 와타나베 가츠아키 사장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토요타 CEO중 유일하게 ‘세계 제일’을 외쳤던 경영자다. 그는 세 확대에 더 비중을 두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을 간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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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는 2006년부터 리콜의 급증으로 이어졌다. 자동차산업의 규모의 경제의 지배를 받는다. 가능한 같은 부품을 많이 생산해 제조 단가를 낮추는 비용 저감 기술이 절대적이라는 얘기이다. 가격 경쟁력을 내 세우는 양산차회사들은 더 그렇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플랫폼 공유화이고 부품 공용화다. 과거에는 2만개가 넘는 부품을 거의 자동차회사에서 개발 생산해 조립하는 방식을 취했었다. 그렇게 해서는 수익을 낼 수 없다. 그래서 점차 서플라이어들에게 부품 공급을 받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모듈화이고 시스템화다. 대시보드 전체를, 시트를 통째로 외부에서 공급받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엔진과 트랜스미션도 다른 공장에서 가져와 자신들의 차에 탑재한다. 때문에 자동차회사의 정확한 명칭은 자동차조립회사라고 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문제가 발생했다. 같은 공장에서 납품 받은 한 가지 부품에 이상이 생기면 그 부품을 채용한 모든 차종을 리콜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2009년 대규모 리콜 사태 이전 토요타는 이미 리콜로 인해 골머리를 앓기 시작했다. 비용저감과 생산성 효율화에서 가장 앞선 토요타가 바로 그런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두드러지 않은 것은 실적 때문이었다. 2007년 3월기의 연결 영업이익이 2조 2,000억엔에 달해 수익면에서도 세계 톱에 올랐다. 그런 판매 증가는 인터브랜드가 발표하는  2006년 글로벌 100대 브랜드 중 자동차 부문 1위에 토요타가 올랐다는 것이 입증했다.

 

2005년 세계 자동차 메이커의 순이익 순위에서는 역시 토요타가 1조 3,000억엔으로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혼다로 5,970억엔, 3위 닛산 5,180억엔, 4위 르노 4,848억엔, 5위 다임러크라이슬러 4,098억엔, 6위 BMW 3,224억엔, 7위 현대 2,777억엔, 8위 포드 2,338억엔, 9위 폭스바겐 1,613억엔 , 10위 PSA푸조시트로엥 1,482억엔 등의 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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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01년 5만 5,000대였던 리콜 대수가 2005년에는 무려 188만대까지 늘었다. 2006년과 2007년을 합해 900만대 가까운 리콜을 해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리콜은 자동차회사들이 소비자들을 위한 사후관리 활동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

 

그런 가운데 2007년 발표된  ‘토요타 글로벌 비전 2020’ 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수치가 목표인 것이 아니라 기간기술로 입지를 구축한 하이브리드카를 전 차종에 전개하는 외 로봇과 고성능 전지 등 차세대 기술의 사업화 등을 정한 것이다.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지역 제일의 기업’이라는 목표다. 이미 GM을 제치고 생산 및 판매에서 세계 1위에 올랐지만 이윤추구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지역사회와 조화하고 동시에 성장함으로써 ‘지구에서 제일가는 기업’을 목표로 한다고 한다. 다국적 기업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한 것이다.

 

2009년 미국에서 발생한 대규 리콜 사태는 그런 토요타에게 커다란 위기였다. 국내에는 급발진으로 알려진, 미국 부품회사로부터 공급 받은 가속 페달의 결함이 발단이 된 토요타자동차의 리콜 문제로 900만대에 육박하는 차량의 리콜을 해야만 했다. 이 사건은 5년 만인 2014년 3월 19일 미국 법무부에 12억 달러, 우리 돈으로 1조 3천억 원에 달하는 벌금을 내기로 하고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벌금과 가속페달 결함에 대한 수사 중단을 맞바꾼 셈이다.

 

당시 미국시장에서는 토요타의 어려움을 이용해 판매를 늘리고자 엄청난 인센티브 공세가 이어졌다. GM과 포드, 현대는 토요타 오너에게 1천 달러의 인센티브를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리콜 사태는 단지 토요타만의 문제가 아니라 비용저감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는 양산 메이커 대부분이 처한 상황이다.

 

토요타는 이 리콜 사태와 후쿠시마 대지진, 미국발 금융위기 등으로 2008년 말에 2009년 3월기 실적 전망을 6,000억엔으로 하향 수정 발표했었으나 한 달만에 다시 1,500억엔 적자로 발표해 불과 한 달여 만에 7,500억엔 가량이 날아가 버렸다. 판매 전망도 당초 906만대에서 754만대로 152만대가 사라졌다. 통상적으로 자동차공장 하나에서 연간 30만대 가량 생산하는데 공장 다섯 개 분의 판매량이 없어진 셈이다.

 

리콜 사태로 아키오 토요다를 CEO로 불러 낸 토요타는 6년 만인 2014년 2014년 3월기(2013년 4월부터 2014년 3월까지)의 영업이익은 2013년기보다 82%나 증가한 2조 4,000억엔으로 늘며 위기를 벗어났다. 브랜드 가치는 여전히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를 앞서 자동차업계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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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형태로 합병 혹은 확대를 하던 중요한 것은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자동차회사들은 다국적 기업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더 이상 국가 단위로 묶어서 비교 평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자동차회사가 하나의 국가가 되어 세계 경제를 좌우하고 있다. 트럼프가 보호주의 정책을 내 세우며 변화를 예고하고 있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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