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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오토뉴스 채영석 국장은 30년 동안 자동차 전문기자로 활동해 왔으며 인터내셔널 엔진 오브 더 이어, 월드 카 오브 더 이어의 심사위원이다. 골드만 삭스 등 투자은행들과 다른 시각으로 산업 분석을 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3,000종 이상의 차를 타고 시승기를 쓰고 있으며 세계적인 모터쇼와 기술세미나 등에 참석해 글로벌 차원의 트렌드 분석에 힘을 쏟고 있다. 2013년 골드만 삭스가 유가 200달러 시대를 이야기했을 때 역으로 유가 폭락 가능성이 있다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6. 자동차 경주, 애국심을 바탕으로 하는 국위 선양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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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charleychae@global-autonews.com)
승인 2016-12-07 23:36:26

본문

자동차는 정치적인 바람을 많이 타는 상품이라는 얘기는 모터스포츠 부문에서도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자동차 경주대회를 정권 홍보에 이용했다. 히틀러의 아우토반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국민들은 반응했고 이후 이탈리아는 각종 자동차 경주대회에서 독일, 프랑스와 함께 상위권을 장악했다. 20세기 중반까지 자동차 경주는 나라의 기술력의 경연장으로서 중요성이 부여되었다. 오늘날의 월드컵이나 올림픽처럼 애국심과 그것을 토대로 한 국위선양을 하는 수단으로 사용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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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가 생겨나자 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경주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것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을 새로운 각도로 보고 대중화하기 위한 노력도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세계 최초의 자동차 레이스가 펼쳐진 것은 벌써 1세기 이상 전의 일이었다. 그것은 프랑스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그 때 자동차의 평균 시속은 겨우 24km/h로 자전거와 비슷한 속도였다.
 
당시의 모터스포츠는 오늘날과 같은 개념이라기보다는 아직 상품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자동차를 판매하기 위한 이벤트 성격이 짙었다. 돈은 많지만 할 일이 없어 따분해 하던 귀족들을 한 자리에 모아 지금껏 보지 못했던 행사를 통해 자동차를 상품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지금의 시각에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지만 괴상한 탈 것을 거액을 지불하고 구입하게 한다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자동차 경주라는 이벤트를 통해 호기심을 유발했고 그것이 결국은 사람들에게 자동차라는 것이 부자들의 사치품으로 여겨지게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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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의 자동차회사의 성격은 지금과는 달랐다. 자동차 경주를 무엇보다 중시했다. 유럽의 경우 더욱 두드러졌다. 물론 지금도 기업들은 모터스포츠에 어느 정도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업의 이미지를 높인다고 하는 2차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당시는 보다 더 절실한 의미가 있었다. 즉, 차를 팔기 위해서는 자동차 경주에서 이기든가, 아니면 최소한 좋은 성적이라도 내야만 했다. 초기의 자동차에 관심을 보이고 이것을 사려고 하는 사람들은 왕족, 귀족, 부유층이라고 하는 소위 '여유 있는 계층'에 한정 돼 있었다. 그들이 자동차가 갖는 스포츠 성을 중시해 그것을 무엇보다도 판단기준으로 삼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허영심을 채워주기 위해서는 특별한 그 무엇이 필요했다. 자동차를 다룬다는 것은 당시에는 수퍼리치들의 취미에 속했던 것이다.

 

모든 새로운 기술과 장비가 그렇듯이 사람들에게 받아 들여지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당시에 이 기이한 탈 것에 관심을 보인 것은 엔지니어들과 상인들 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상인들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돈이 되는 것을 찾아냈고 자동차 역시 그들 눈에는 새로운 시대 그들의 부를 늘려 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을 입증해 보인 장이 자동차 경주였다. 자동차 경주에서의 승리를 위해 엔지니어들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기술을 개발했고 그때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속도로 성능은 대폭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리고 자동차 레이스는 국위선양의 장으로 이용되었다. 상인 말고 정치인들도 이것을 활용에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정책을 통해, 또는 자금 지원을 통해 기술 개발을 독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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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자동차 경주는 아주 다양한 형태로 세계 여러 나라의 엔터테인먼트가 되어 있다. 자동차 경주의 최고봉인 F1그랑프리를 시작으로 르망 24시간 레이스로 대표되는 스포츠카 경주 외에 세계 도처에서 다양한 성격과 형태의 자동차 경주가 열리고 있다.

 

자동차 경주의 성격은 20세기에는 세대별로 성격이 달랐다. 크게 1차 대전 전과 후, 그리고 2차 대전 이후로 구분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자동차 경주는 상업주의의 색채가 농후해져 버린 것이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이 엔터테인먼트의 요소가 가미되면서 과거와 같은 총체적인 치열함은 약해졌다.

세계 최초의 자동차 경주는 1894년 파리-루앙간의 128km의 경주였다. 이 순위 경쟁 경주에서 프랑스의 베르 드 디옹과 조르쥬 뷔똥은 60km/h의 속도를 내는 증기차를 만들어 첫 번째로 골인했다. 하지만 객차를 하나 더 달았다는 이유로 실격되어 푸조와 르왓슬에게 1위를 내 주었다. 

 

이듬해인 1895년에는 스피드 레이스가 최초로 행해졌다. 프랑스자동차클럽(ACF)에 의해 개최된 파리-보르도간의 레이스는 전장 1,178km의 거리에서 개최됐다. 자동차 탄생 후 겨우 10년만에 프랑스에서의 자동차 개발을 어떻게 해서 급속도로 진척시켰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독일인들이 발명한 내연기관차를 돈을 받고 판매하는 상품으로 만드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프랑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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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회에 출전한 22대 중 15대가 가솔린차, 6대가 증기차, 1대가 배터리 전기차였다. 당시는 세 종류의 엔진이 공존하고 있었고 소위 주도권 쟁탈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자동차들은 어떤 연료를 사용하느냐에 대해 확실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었다. 자동차 경주를 통해 세 가지 자동차의 실력차는 확실히 판가름 났다. 완주한 것은 9대뿐이었는데 그 중 8대까지가 가솔린차였다. 우승은 케클란이 운전한 프랑스의 푸조에게 돌아갔다. 

 

자동차 경주를 통해 실력이 드러나면서 배터리 전기차는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됐다. 화석연료의 사용에 대한 거부감이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종합적인 성능에서 우위를 보이는 탈 것이 눈길을 끈 것은 당연했다.

 

파리를 기점으로 해 빈, 베를린, 모스크바 등 유럽의 주요 도시를 잇는 소위 파리 레이스는 그 후 매년 계속되어 치열한 경쟁을 했고 그를 통해 자동차의 성능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자동차는 경주를 통해 약한 체질이 단련되었고 보다 실용성 높은 탈것으로 육성되었다. 당연히 자동차의 속도도 빨라졌다. 1898년에 43.29km/h, 1900년에 64.70km/h, 1903년에 105.90km/h로 가볍게 처음으로 100km/h의 벽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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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초의 국제 레이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1900년부터 시작된 ‘고든 베네트 배 레이스’로 역시 프랑스자동차클럽(ACF)이 운영을 담당한 경주였다. 이 경주는 한 나라에서 세 팀이 참가할 수 있는, 나라를 대표하는 팀 간에 치러지는 것이 큰 특징이었다. 오늘날의 자동차 경주에서는 채용되지 않는 국가별 경주차 차체 도색도 제 1회 레이스부터 실시되었다.

 

이때부터 자동차 레이스는 가혹한 실험대의 의미와 함께 출장하는 나라의 기술력의 경연의 장으로서 중요성이 부여되었다. 애국심과 그것을 토대로 한 국위선양을 고려한 것은 20세기 중반까지의 이어졌었다.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 대국인 한국에서는 자동차 경주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데 유럽과 미국에서는 올림픽과 월드컵에 맞먹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초창기 그랑프리용 경주차는 맘모스(대 배기량) 엔진이 주류였다. 1907년 피아트는 15리터, 1908년 메르세데스는 13리터 등이 활약했다. 수치가 말해 주듯이 자동차 경주에 출전하는 차의 배기량은 해를 거듭할 수록 늘어만 갔다. 예를 들면 1899년 경주용차의 배기량은 4.4 ℓ이었다. 1901년에는 10.1리터, 1902년에는 13.7리터로 확대됐다. 성능 측면에서는 1904년에 처음으로 100마력을 넘었는데 이 때 배기 량은 13.6리터였다. 1910년대 까지는 10리터 이상의 레이싱 카가 아니고는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없었다. 자동차의 거인시대라고 불리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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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국제 레이스 중에서 가장 중요시되어 온 것은 1906년부터의 프랑스 그랑프리(GP)다. 프랑스 GP는 제 1차 세계대전 후인 1921년까지 유럽 에서의 유일한 최대 GP레이스였다. 1921년에는 제 1회 이탈리아 GP가 열렸다. 프랑스에서 이런 종류의 중요한 경기가 개최된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세계 재일의 자동차 생산국이었다. 메이커의 수도 세계에서 가장 많았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1906 년 미국이 생산대수 세계 제일의 왕 좌에 올랐다. 기술이 시장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당시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제1회 프랑스 GP 에는 프랑스 10팀 26 대, 이태리 2팀 6대, 독일 1팀 3대의 총 35대가 출전했다. 프랑스 팀의 우세를 잘 알 수 있다. 영국으로부터는 단 1팀도 참가하지 않았다. 이 시합에서는 프랑스의 르노가 이탈리아의 피아트를 누르고 우승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07년부터는 프랑스세는 피아트팀에 크게 밀렸다.

 

그 배경에는 배기량을 늘리는 간편한 방법과 함께 당시는 엔진 디자인의 변화가 있다. 구조가 간단한 사이드 밸브(SV)식 외에 이미 OHV(오버 헤드 밸브)는 물론 OHC(오버 헤드 캠 퍄스트)형까지 시도되고 있었다. 참고로 사상 처음으로 SOHC(싱글 오버 헤드 캠 샤프트) 엔진을 설계해 실용화한 것은 1902년 영국의 선박용 증기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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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부터 10년간 엔진의 거대화 경향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 때문에 1908년 메르세데스와 벤츠가 두각을 냈었지만 프랑스 GP는 3 년간 중지되고 1912년에 겨우 재개하게 되었다. 중단된 이유에 대해서는 주최자인 ACF(프랑스 자동차 클럽)가 프랑스차가 이길 수 없게 되자 의욕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막대한 레이스를 위한 출자에 고민한 자동차회사측이 스스로 레이스를 중단한 것이 옳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당시 레이스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거액의 돈이 들었다. 지금과 같이 주최측이 착수금을 지불해 준다거나 상금을 지불하는 일은 없었다. 출전 신청 비용만도 5,000금화 프랑이었는데 이 금액은 당시의 고급차 1대의 값이었다. 또한 출전 준비 팀의 관리운영 등에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경기장은 흥행 장소만이 아닌 기업간의 결전장이었다.

 

프랑스 GP 중단 중에 포르쉐와 부가티를 위시해 여러 가지 기술혁신이 이루어졌다. 자동차 기술의 진보는 점점 빠른 속도로 전개 되어 갔다. 특히 엔진에서 새로운 것들이 차례로 실용화돼 갔다. 그리고 이 면에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몇 사람의 기술자가 훌륭한 업적을 세웠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페르디난트 포르쉐였다.

 

'로넬' 사에서 전기자동차 설계에 성공한 포르쉐는 1905년 30세의 나이에 아우스트로 다이믈러사에 입사해 양산형과 함께 몇 가지 경주차용의 설계를 했지만 그 중에서도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해준 것은 1910년의 프린스 헨리 트라이얼 용의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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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기술 사상 또 한 사람의 천재, 이태리 태생의 에토레 부가티도 엔진 디자인 면에서 특이한 일을 하고 있었다. 예술가의 기술과 천부적인 기술자의 재능을 겸비했던 부가티는 19세 때인 1900년에 자동차를 설계해 주목을 끌었다. 1910년에는 자기 이름을 붙인 차를 완성시켰다. 이런 변혁기 속에서도 피아트사는 아직도 맘모스 엔진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1908년에는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했다. 물론 엔진은 내연기관이 탑재되었고 자동차와 선박 외에 또 다른 차원에서의 기술 발전의 계기가 됐다. 그리고 저 유명한 블릿첸 벤츠라는 차가 등장한다. 차체 디자인을 유선형으로 해서 전면 투영 면적을 감소시키는 등, 당시 최첨단의 공기역학적 설계를 하고 최대한의 경량화를 시행한 것이었다. 1909년 에밀리는 영국의 부룩크란즈에서 블릿첸 벤츠로 202.65km/h로 사상 최초로 200km/h를 돌파하는 속도기록을 세웠다. 그것은 당시의 비행기 보다 빨랐다. 비행기 속도가 처음으로 200km/h 를 넘은 것은 그 4년 후인 1913년이었다 (프랑스의 도페르뒷상 단엽기, 204km/h).

 

그러나 그 당시 더 유선화한 보디를 붙인 블릿첸 벤츠는 미국으로 운반돼 데이토나 비치에서 속도기록에 도전해 1910년 바니 올드필드의 조종으로 211 .94km/h까지 공식기록을 늘렸다. 이 수치는 1922년까지 깨지지 않았던 큰 기록 이었다. 비록 배기량이 22리터로 거대했지만 이를 끝으로 맘모스 시대는 막을 내리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엔진의 경량화에 대한 사고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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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에는 자동차의 맘모스 시대 종결의 시작을 알리는 한 레이스가 있었다. 프랑스의 ACF 산하에 있던 사르트 자동차 클럽이 주최한 '그랑프리 드 프랑스 레이스'가 그것이다. 사르트는 르망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의 주명이다. 이 경주에서 10리터의 피아트와 1.3리터의 부가티차가 경쟁하며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본격적으로 다운사이징이 시작된 것은 1912년에 재개된 프랑스 GP 다. 이 레이스에서 피아트의 14.1리터차와 푸조의 7.6리터차가 경쟁해 절반 정도의 배기량인 푸조가 우승을 차지했다. 이 엔진은 사상 처음으로 실용화된 기통당 4밸브, DOHC(캠 샤프트가 두 개)를 채용한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이라는 평가를 들었던 이 엔진은 배기량은 줄이면서도 열효율을 높였다. 바로 이 DOHC의 등장으로 맘모스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제 1차 대전 후에는 그때까지 프랑스뿐이었던 GP레이스가 각 나라에서 개최되게 되었다. 이탈리아(21년), 스페인(23년), 벨기에(25년), 영국, 독일(26년), 모나코(29년) 등이 그것이다. GP레이스는 각 나라의 대중의 큰 오락으로 인기가 높아져갔다. 이런 붐에 편승에 자동차로 국민의 인기를 얻으려고 했던 두 명의 독재자가 있었다. 베니토 무솔리니와 아돌프 히틀러가 그들이다. 그들은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을 내 세우며 자국 국민들의 애국심을 끌어 올리기 위해 자동차 경주를 이용했다.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약점을 덮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는 역사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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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엔초 페라리가 이끄는 알파로메오 레이싱 팀은 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초에 걸쳐 유럽에서 무적의 활약을 이어갔다. 무솔리니는 중요한 레이스가 시작되기 전 페라리 경주차 앞에 서서 ‘이탈리아를 위해 레이스에서 승리를!’이라고 격려의 전보를 칠 정도였는데 히틀러도 두 손가락을 펴 보이며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1926년 칼 벤츠사와 고트리프 다임러사가 합병한 다이믈러 벤츠와 아우토우니온 양사는 1934년부터 획기적인 경주용차의 개발을 진행시켰다. 히틀러도 양사에 자금을 제공했는데 그 액수는 일부에서 말하는 정도의 거액은 아니었다는 얘기도 있다. 다임러 벤츠는 이 때 저 유명한 전설적인 실버 애로우를 완성했다. 이는 자동차 경주에서 독일세가 군림하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독일 양사의 경주차는 압도적인 파워를 발휘했으며 1934년부터 1939년까지의 시기는 GP레이스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리고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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