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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오토뉴스 채영석 국장은 30년 동안 자동차 전문기자로 활동해 왔으며 인터내셔널 엔진 오브 더 이어, 월드 카 오브 더 이어의 심사위원이다. 골드만 삭스 등 투자은행들과 다른 시각으로 산업 분석을 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3,000종 이상의 차를 타고 시승기를 쓰고 있으며 세계적인 모터쇼와 기술세미나 등에 참석해 글로벌 차원의 트렌드 분석에 힘을 쏟고 있다. 2013년 골드만 삭스가 유가 200달러 시대를 이야기했을 때 역으로 유가 폭락 가능성이 있다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7. 포뮬러 원(F1)과 르망24시간의 탄생, 그리고 대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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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charleychae@global-autonews.com)
승인 2016-12-09 10:44:39

본문

제 1차대전 후 자동차산업은 폭발적인 호경기를 맞아 전쟁 중 쇠퇴한 레이스는 자동차산업의 진흥책의 일환으로서 다시 치러지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그랑프리 레이스만 큰 주목을 끌었던 것은 아니다. 1923년에는 스포츠카에 의한 르망24시간이 시작되고 거기에 그 4년 후에는 저 유명한 밀레밀리아가 탄생했다. 온갖 형태의 모터스포츠가 자동차 메이커에 의해 그들이 만든 차의 선전 수단으로서 이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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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그랑프리 레이스의 규정은 대전 직후의 수년간은 스포츠카가 그랑프리 머신과 함께 레이스가 가능하게 되는 등 수차례 변경되었다. 1922년부터 24년까지는 엔진 배기량은 2리터 이하로 되고 또 최저 차중은 650kg까지 끌어내려졌다. 또 1대당 2인 승차가 의무적으로 되고 그것을 합한 차중은 120kg이상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 경우에는 그만큼의 무게를 더 실어야만 했다. 이 라이딩 미케닉제는 기계적인 문제가 줄지 않았기 때문에 1925년에 폐지되었는데 그래도 시트는 그대로 남았다.

 

1926년에는 엔진 배기량은 1.5리터 이하로 최저 차량중량은 600kg까지 낮춰지게 되었다. 하지만 다음해에는 최저중량은 700kg에 조정되었고 1 시트도 허용되게 되었다. 1928년 대폭적인 그리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 규정 변경이 실시되었다. 엔진 배기량에 의한 제한은 완전 폐지되고 차중은 550kg에서 750kg 사이를 지켜야만 했다. 또 처음으로 레이스거리가 룰로 정해져 최저 600km이상으로 되었다. 1929년에는 거기에 또한번 변경이 가해져 중량은 최저 900kg이상, 그리고 연비는 100km당 19리터 이하로 제한되었다.

 

제 1차 대전 발발 전부터 1920년대 후반에 걸쳐 빅 레이스 수는 증가해갔고 1928년에는 레이스에 대한 개개 메이커의 관심은 이미 떨어졌다. 모든 수단과 마찬가지로 그랑프리 레이스도 그 목적을 완수해 이익을 올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할 필요는 더 이상 없었다. 1928년부터 31년에 걸쳐 자동차 레이스는 그랑프리 레이스의 규정에 적합한 종래보다 소형 머신이 주류로 되어 세력을 모아갔다. 이때 관심을 보인 것은 메이커가 아니라 열렬한 개인참가자들이었다. 그래서 레이스는 자기자금으로 레이스활동을 하는 유복한 애호가에 의한 아마추어 스포츠에로 그 양상이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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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애호가 중 한사람이 에토레 부가티였다. 유명한 마제형 라디에이터를 가진 그의 머신은 1920년대 30년대의 전설적 존재다. 특히 타입35 그 최고걸작으로서 2000 이상의 레이스에서 승리했다. 부가티, 그리고 1.5리터 드라쥬는 최후의 위대한 2인승 그랑프리 머신이었다.

 

제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시대 중 레이스가 정치선전의 무대로서 이용되게 되자 대 메이커가 컴백했다. 특히 1931년에 규정 중에 제한이 완전 폐지되고 규제를 완화한 포뮬러 리브레로 되자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당은 뉴 머신을 개발해온 알파로메오에 국가적인 원조를 하게까지 되었다. 1934년에는 최대 차중 제한(750kg)이 부활되었는데 무솔리니에 뒤지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한 히틀러는 메르세데스와 아우토우니온의 2팀에 대해 역시 국가적인 자금지원을 시작했다.

 

1934-37년의 최대 차중 제한은 전체적인 부품이 경량화의 대상이 된 것을 의미하고 있다. 또 이 제한은 결과적으로 엔진 배기량의 향상을 초래해 아우토우니온의 C타입 등은 600bhp가까이까지의 출력도 가능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어느 쪽도 서키트 내외에서 우위를 보이고자 노력해 1934년부터 39년까지의 시기는 이 두 나라가 레이스를 지배했다. 우선 우위에 선 것은 이탈리아의 알파로메오로 1934년에 몬레리에서 치러진 프랑스GP에서는 루이 시롱을 선두로 3위까지를 알파로메오가 독점했다. 하지만 그 후로는 독일이 지배적인 입장에 서 대부분의 그랑프리 레이스에서 메르세데스 아니면 아우토우니온이 선두로 골인했다. 1938년에는 규정이 또 변경되어 자연흡기 경우는 4.5리터, 과급기 부착의 경우는 3리터로 엔진 배기량 상한이 정해져 있었는데 그래도 독일세는 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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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대전 직전, 알파로메오의 팀 매니저를 담당했던 엔초 페라리는 그 관심을 그랑프리에서 일단 아래의 보아츄레트 레이스로 옮겼다. 보아츄레트는 이미 1차대전 전부터 존재했었다. 최초는 엔진 배기량이 3리터 이하로 치러졌었으나 양 대전 사이의 시대에는 1.5리터 이하로 되었다. 참가자는 주로 아마추어 드라이버로 대개 그랑프리 레이스보다 거리가 짧았다. 그리고 1930년대 중반에는 독자적인 레이스 캘린더를 갖게 되었다. 엔초 페라리는 머지않아 다가오게 될 전쟁 후에는 자금난에 시달리고 주행할 수 있는데 드는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 4.5리터 그랑프리 머신 대신에 보아츄레트가 주류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던 것이다.

 

페라리는 대전 직전부터 보아츄레트의 제작에 힘을 쏟아 1938년에 이탈리아의 레그호른에서 치러진 레이스에 그의 야심작인 알파로메오 티포 158을 데뷔시켰다. 수퍼차저를 장착한 배기량 1.5리터의 직렬 8기통 엔진, 뾰족한 테일, 그리고 튜블러 프레임을 이 머신은 머지않아 자동차 경주 사상 불후의 명차가 된다.

 

그 데뷔 레이스에서 알페타는 1,2위를 독점했다. 드디어 이탈리아가 독일을 따라잡은 것이다. 이탈리인들은 이 승리를 계기로 이 상황이 확실하게 계속되도록 하기 위해 규정에 손을 댔다. 요컨데 이탈리아 국내 레이스를 전부 보아츄레트 클래스로 치르기로 했던 것이다. 정확히 1939년 트리폴리GP가 임박해지고 알파로메오는 이 레이스의 승리로 자신을 얻었다. 하지만 독일 진영의 대표 메르세데스는 이탈리아 진영이 알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아주 짧은 기간에 알페타보다 고성능의 머신을 개발했다. 결국 독일의 우수한 기술은 그 레이스도 지배해 메르세데스가 1위, 2위를 독점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알파 로메오는 아주 큰 차이로 3위를 차지하는데 그쳤다. 서키트에서의 숙명의 라이벌, 프랑스와 독일은 그 후로도 끝없는 혈전을 펼치는 운명에 놓였고 이탈리아에게 있어서 트리폴리 레이스는 대전 전에 독일 라이벌을 타도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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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대전 후 이탈리아는 다시 레이스에 있어 지배적인 입장이 되었다. 한편 독일은 참가를 허용하지 않았다. (아우토우니온의 공장은 철의 장막 동독지역에 있어 한편 메르세데스의 공장은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파멸상태에 있었다.) 그들도 머지않아 컴백하게 되지만 우선은 국가의 부흥을 위해 건설차량의 생산 쪽이 우선이었다. 1946년에는 그때까지 국제자동차공인글럽협회(AIACR)를 모체로 국제자동차연맹(FIA)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스포츠 부문의 운영관리는 국제 스포츠위원회(CSI)에 위임되었다.

 

예상되어왔던 것이었지만 자금과 연료의 부족으로 인해 그랑프리 레이스가 전전의 피크 때의 상황으로까지 돌아가는 것은 그로부터 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1945년 9월 9일에는 벌써 파리근교 블로뉴 삼림에서 첫 레이스 프리즈너스 컵이 개최되어 굉음이 울렸다. 이 레이스에서는 부가티에 탄 장피엘 위뮤가 승리했다. 그 후 니스, 마르세이유, 아르비, 제네바 등에서도 레이스가 개최되었고 이런 초기 레이스에서는 마세라티가 우세를 보였다. 이 당시의 레이스는 그랑프리 머신과 스포츠카가 함께 달려 ‘포뮬러 리브레’로서 치러졌다.

 

1946년에는 그랑프리 레이스를 위한 새로운 규정이 정해졌다. 그것은 과급 엔진의 경우는 배기량이 1.5리터까지 또 자연흡기의 경우는 4.5리터까지로 되었다. FIA의 발표에서는 이 규정은 1953년에 끝날때까지 계속되도록 되었기 때문에 당시 메이커에 있어서는 뉴 머신의 개발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규정은 1930년대부터 보아츄레트를 전문으로 제작해 온 영국의 컨스트럭터에 유리해 보여, 특히 레이몬드 메이즈가 운전한 수퍼차저를 장착한 ERA(English Racing Automobiles)와 같은 높은 경쟁력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1946년은 전후 그랑프리 레이스의 부활에 있어 중요한 해였는데 한편으로는 위대한 브룩랜즈 서키트가 사라진 해로서 안타까운 해이기도 했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 부가티의 머신이 이 명성 높은 코스를 질주하는 광경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브룩랜즈는 전쟁 중, 항공기 메이커의 뷔카스사에 접수되어 대전 후의 1946년에 33만 파운드로 그들에게 매각되었다. 이것이 자동차 레이스에 있어 가장 유명한 서키트의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브룩랜즈는 없어졌지만 그랑프리 레이스는 부활의 기치를 높이며 최대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1947년에는 포, 블렘가르텐(스위스), 스파, 밀라노 등에서 국제적인 그랑프리 레이스가 부활했다. 이런 레이스에서는 강적 독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세가 우위에 섰는데 알파로메오는 이번에는 마세라티로부터 도전을 받게 되었다. 1947년 10월 2일, FIA의 연차 총회에서 다음해인 48년부터 두 개의 포뮬러 레이스가 치러진다고 발표되고 그때까지 치러지던 그랑프리 레이스는 F.I.1, 그리고 500cc의 과급 엔진이나 2리터 자연흡기 엔진을 탑재한 머신으로 싸우는 새로운 포뮬러는 F.I.2로 불리게 되었다. 이것이 포뮬러 원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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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동안 같은 차로 운전자를 교대해 가며 멈추지 않고 달리는 르망 24시간은 1923년에 시작됐다. 레이스가 태동하던 시절에는 프랑스 육군이 서치라이트로 코너를 비추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오늘날은 F1그랑프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끄는 르망 24시간이지만 그룹C의 대표적인 경기로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F1 그랑프리 챔피언십을 필두로 각국에서 열리는 포뮬러 3000, 카트 챔피언십, 그리고 미국의 대표적인 레이스인 인디아나폴리스 500마일 레이스가 이어진다. 그리고 스포츠 레이싱 타입의 머신에 의한 GT챔피언십, 거기에 포함된 르망 24시간 레이스가 있다. 세계 랠리 챔피언십(WRC), 투어링카 챔피언십도 이어지고 유럽의 독자적인 랠리 크로스와 힐 클라임에 이르기까지 자동차 경주의 춘추전국시대가 전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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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 레이스의 최고봉은 뭐라해도 F1그랑프리다. 제 1차 세계대전(1914∼18년) 후 급속히 발달한 항공기술이 자동차에 환원되어 그 성능은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유럽에서도 자동차는 일상의 교통수단으로 되고 프랑스의 시트로엥은 1922년에 5CV에 유럽 최초로 양산 방식을 채용하고, 영국에서도 같은 해 오스틴 세븐이 등장하는 등 소위 중산계급에서도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되었다.

 

GP머신에는 어느 시대에도 최첨단의 기술이 빠짐없이 채용되어 왔으나 20년대 중반이 가까워지면서 그들은 일상의 자동차와의 성능 차이는 커지게 되었다. 그래서 보통 거리에서 볼 수 있는 통상적인 자동차만으로 하는 레이스를 기획한 것이 프랑스 자동차 저널리스트, 샤를르 펄 외의 몇 사람 들이었다. 장소는 자동차, 그리고 비행기와 인연이 깊은 르망이 선정되었다. 여기에서는 1906년 제 1회 프랑스 그랑프리가 개최되기도 하고, 1908년에는 라이트 형제가 유럽에서의 첫 비행을 한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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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의 성격은 단순히 스피드만이 아니고 내구력을 테스트하는 것에 주안점이 주어졌다. 24시간이라고 하는 장시간 레이스로 된 것은 당시 아직 불완전했던 조명장치를 테스트한다고 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레이스를 개시하게 되자 역시 위험을 고려해 코너 등에는 프랑스 육군의 탐조등(야간에 적기를 발견하기 위한 강력한 조명)부대를 배치해 드라이버의 안전을 도모한 조치를 취했다.

 

출전차는 투어링용의 보디를 가장한 모델만으로 셀프 스타터를 갖추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드라이버는 1924년부터 5랩 주행 후에 스스로 덮개를 올려(당시 클로즈드 보디는 귀했다) 사이드 커튼을 걸도록 정해져 있었고 그대로 일정 거리(2랩)를 주행해야만 했다. 카테고리는 4개로 나뉘었고 거기에 성능 지수상(인덱스 오브 퍼포먼스)이라고 불린 배기량과는 무관하게 각 차의 상대적인 성능을 비교해 주어지는 상도 있었다. 이에 따라 소배기량차도 균등하게 명예를 가리는 것도 가능하고 이 점도 르망 24시간 레이스의 큰 특징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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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레이스는 1923년 5월 26일∼27일에 치러졌다. 후에 개최일은 낮이 긴 6월 하지에 가까운 날로 바뀌었다. 출전차는 35대로 완주는 30대. 우승은 프랑스의 3리터 셰나르 볼케일, 드라이버는 라가슈/레오날 조로 주행거리는 2,209.536km, 평균 시속은 92.06km/h였다. 이 경주에서 우승한 자동차회사의 판매는 급증했고 때문에 자동차회사들은 이 레이스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했다. 그 때문에 출전차는 해마다 증가해 24년은 41대, 25년에는 미국, 영국, 이탈리아에서도 속속 참가해 49대에까지 늘었다.

 

이해부터 그때까지 두 대씩 나란히 서는 그리드식이 개정되어 소위 르망식 스타트로 되었다. 머신과 드라이버가 코스 양쪽에 나누어 정렬하고 신호기가 펄럭임과 동시에 드라이버가 머신에 올라 타는 방식이다. 이렇게 해서 르망 24시간 레이스는 어디까지나 오너 드라이버에 의한 일반차 레이스라고 하는 성격을 강하게 내 세워왔었는데 이 레이스는 소위 빈티지 스포츠카의 대결장으로서도 큰 의미를 갖게 되었고 제 1차 세계대전 전에는 없었던 ‘스포츠카’가 일반 승용차, 그리고 GP머신과 별도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시초가 되게 되었다.

 

르망 레이스의 초기는 현지 프랑스세가 당연히 우세했다. 그런데 1924년은 개인 엔트리인 벤틀리가 행운의 1승을 올려 그것을 시작으로 1927년부터 30년까지 4연승해 벤틀리의 전설을 만들었다. 1931년부터 34년까지는 엔초 페라리가 이끄는 알파 로메오가 4연승하고 이후는 난전 양상을 보였다. 제 2차 세계 대전(1939∼45년) 후 첫 르망 레이스는 1949년에 치러졌는데 이때 막 탄생한 페라리 2리터(기네티/셀즈돈 조)가 우승해 주목을 끌었다. 평균 시속은 132.420km/h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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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의 르망 레이스의 인기가 높은 만큼 메이커간의 경쟁은 해마다 격렬해지게 되었다. 50년대에 들어서자 메르세데스 벤츠 300SL과 재규어 C/D타입의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었는데 이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것은 1955년의 소위 ‘르망의 비극’이다. 이것은 재규어와 메르세데스 벤츠의 싸움이 원인이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1955년 6월 11일, 오전 4시, 60대의 머신이 일제히 발진했다. 그리고 그 2시간 20분 후, 피트측으로 4∼5대의 머신이 접근했다. 선두는 한 바퀴 늦은 마클린의 오스틴 히레이, 그리고 마이크 호손이 탄 브리티시 그린의 재규어 D 타입, 이어서 3대의 메르세데스 벤츠 300SLR이었다. 호손은 마클린을 제치고 어찌된 일인지 오른쪽에서 옆으로 꺾어 피트로 들어왔다. 마클린은 당연히 급 브레이크를 밟으며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이 때문에 히레이는 미끄러져 왼쪽의 메르세데스 벤츠를 밀어내게 되었다.

 

220km/h의 속도로 접촉한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에밀 르와슬이 탄 메르세데스는 공중으로 높이 솟아 올라가 만원인 관중석으로 처박히며 폭발했다. 사망 80명, 부상 200명이라고 하는 대 참사가 일순간에 일어났다. 이것은 자동차 레이스 역사상 최악의 사태였다. 현대를 상징하는 스피드의 제전, 자동차 레이스는 언제나 죽음과 떨어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것이 어쩌면 사람들의 마음에 강한 인상을 심어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사고로 메르세데스 벤츠는 자동차 경주장에서 모습을 감추게 된다. 32년이 지난 1987년 그룹 C를 통해 모터스포츠에 복귀했고 2010년에는 F1의 황제 미하엘 슈마허와 함께 55년 만에 팩토리 팀으로 F1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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