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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차 첫걸음에서 비상까지 - 자동차 해외시장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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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webmaster@global-autonews.com)
승인 2012-12-30 16:47:28

본문

지난 번 이야기에 이어 금번 호에서도 현대자동차 미국 판매법인의 초대 사장을 역임한 박성학 사장으로부터 전해들은 해외영업 및 마케팅부문의 구체적인 실화와 숨은 에피소드 등을 토대로 하여 우리나라의 자동차 북미시장 개척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보도록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 자동차 산업 5대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중 하나는 북미시장에서의 성공이 아닐까 생각된다. 초창기 북미시장 개척을 위한 각고의 노력과 성공 스토리로 이어간 지난 열정뿐만 아니라 많은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신 박성학 사장께 지면을 통해 감사를 드린다.

글 / 이충구 (한국자동차공학회 전회장, 전 현대자동차 사장)
출처 / 한국자동차공학회 오토저널 2012년 10월호

지난 호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1980년대 초의 현대자동차는 세계 제2차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내수경기가 침체의 늪에 빠져 많은 관리직 인원을 정리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경영위기를 맞이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유럽 선진국의 수출시장 개척뿐만 아니라 북미 수출까지도 검토했다. 당시 우리의 열악한 기술과 품질 수준을 볼 때 북미 리콜을 염려하여 북미 수출만큼은 모두가 반대하는 분위기였지만, 직원들의 월급을 제때 지급하지 못할 정도의 위기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었다. 당시 최고책임자였던 정세영 사장의 북미 진출에 대한 의지는 너무나도 단호했고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우리는 곧장 50만 달러를 가지고 캐나다로 들어갔다. 하지만 미국시장은 겁이 났다. 결국 캐나다에 포니와 스텔라를 수출하고 난 다음에 포니엑셀을 가지고 미국에 진출하게 되어 캐나다, 미국의 순으로 북미시장을 공략했지만, 이렇듯 캐나다부터 들어간 자동차 업체는 우리만이 유일하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 북미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이러한 전략이 한 몫을 한 것이다. 우리는 캐나다 시장도 파악하기가 어려웠는데 미국시장은 캐나다의 10배에 달하는 큰 시장이어서 시장조사조차 엄두도 못 낼 정도였다.

우선 캐나다의 안전 법규와 배출가스 법규를 만족시키는 것이 문제였다. 포니의 배출가스 법규는 그럭저럭 만족시켜 가는 것 같았지만, 캐나다 차에 적용되는 5-마일 범퍼 대응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에는 자동차 메이커들이 투자비 절감을 위해 로비를 통해 2.5-마일 범퍼로 완화시켰지만, 캐나다의 경우에는 5-마일 범퍼로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우리는 캐나다도 2.5-마일 범퍼로 완화되리라 생각을 하고 그냥 무작정 법규 완화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캐나다 수출 진행이 지지부진해졌다. 캐나다 상공부의 담당자는 미국이 2.5-마일 범퍼로 완화시켰어도 캐나다는 바꾸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곧바로 포니의 5-마일 범퍼 개발이 착수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라다 차량이 캐나다에 수출되고 있었는데, 그들은 5-마일 범퍼를 적용하기 위해 별도의 범퍼를 캐나다에서 개발하였다. 항구에 도착한 뒤에 배안에서 범퍼를 달고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범퍼를 장착할 수 있도록 차체에 구멍만 뚫어 배에 선적한 것이었다. 이들은 5-마일 범퍼 규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차체와 범퍼 사이에 많은 공간을 두고 있었는데 꼭 트럭 범퍼를 연상시켰다. 우리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단기간에 5-마일 범퍼를 개발하여 캐나다 수출용 차량에 적용했다. 이 범퍼는 좀 더 안전하게 보이는 덕분에 국내에서도‘CX 패키지’(캐나다 수출용 사양)로 인기리에 팔
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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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차량의 개발 진행뿐만 아니라 딜러 선정도 해야했다. 통상적으로 딜러는 가장 번화한 도시의 한복판에 위치한다. 캐나다 도시 곳곳에 있는 딜러점에 직원들을 데리고 방문하면서 포니 판매에 대해 제안을 했지만 그들은 한국, 현대자동차, 포니 어느 하나도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포니 판매를 비관적으로 보면서 만일 200만 달러 정도를 지원해 주면 의향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가지고 나간 돈이 총 50만 달러였는데 딜러 한 곳이 200만 달러라니...... 캐나다에서의 포니 판매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캐나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잘 살펴보았다. 1960년대 초에 후진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 중 자동차 정비사로 일을 시작해 어느 정도 돈을 벌어서 자기의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심은 아니지만 도시 외곽 구석에서 자동차 정비업을 하는 사람들은 자동차 대리점을 하는 것이 그들의 꿈이었다. 20년간 남의 정비사업소에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독립한 그들은 꿈이 대단했다. 우리는 일본차량 딜러들의 성공 예를 들어가면서 우리 차량의 딜러들도 그들과 같이 될것이라는 커다란 꿈을 심어주었다. 이렇게 우리는 도심 한복판은 아니지만 도시의 외곽지역 100여 곳에 딜러를 선정했다. 정비소를 갖고 있고 정비의 경험이 많은 이들은 포니 판매에 결정적인 성공요인으로 작용했던 셈이다.

우리는 포니를 알려야만 했다. 캐나다 사람들에게는 한국(Korea)이라는 나라조차도 생소했었기 때문에 광고가 아주 중요했다.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북미에서만은 혼다가 수입차 1위를 하고 있었다. 도요타, 닛산을 제친 혼다의 성공 이유를 잘 살펴보니, 첫 번째가 승용차 수출 이전에 혼다 오토바이로 기술적인 인정을 먼저 받은 상태였고, 두 번째로 초기에 광고를 아주 잘해서 성공한 것이었다. 우리는 혼다 광고회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당시 그 회사는 문을 닫은 상태여서 혼다 광고 아이디어를 낸 Creative(광고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창의적인 사람)를 찾아가 만났다.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포니를 광고하기 위해 약 300만 달러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그에게 300만 달러 광고를 맡길 테니 회사를 차려 포니 광고를 만들어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여 포니의 광고가 캐나다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시사에 관심이 많은 일부 캐나다 사람들만이 한국전쟁 정도를 알고 있었을 뿐 그 이외는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렇다보니 현대자동차 포니에 대해 알리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광고 Creative에게 포니가 중남미, 중동, 구라파 등 몇몇 나라에 수출을 하고 있으니 이를 참고해서 광고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현대 포니는 중동 사하라 사막을 거쳐, 런던 피카디리 광장을 거친 뒤에, 중남미 안데스 산맥을 넘어, 지금 막 캐나다에 도착한 승용차이다.’그가 만든 광고 카피는 1등 광고상을 받을 정도로 히트를 쳐 캐나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당시 국내 임금은 엄청나게 저렴한 시절이었다. 포니 캐나다 판매가격은 4,995달러(US 달러 기준)였지만 FOB가격은 1,900달러 정도로 책정해도 될 수준이었던 것이다. 포니는 인도나 멕시코 등 저개발 국가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나 사는 값싼 엔트리 카였다. 이런 엔트리 카들은 카 스테레오(오디오), 오토 도어 잠금장치, 파워 윈도우 등을 옵션으로 별도의 추가 가격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경쟁차 수준의 판매가격에 옵션 파트를 모두 스탠다드로 장착해 주어도 우리는 원가측면에서 남는 가격구조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카 스테레오, 오토 도어 잠금장치 등 옵션 파트 없이 모두 스탠다드로 적용하고 이러한 부분을 크게 광고했다. 3개월간 300만 달러 가량의 광고가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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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으로는 구라파와 미국에는 스포츠 뉴스가 많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 차의 선전을 위해서‘현대자동차가 주최하는 현대자동차배 세계 여자 배구대회’도 추진했다. 총 30만 달러가 소요되었는데 우리나라, 캐나다, 미국, 일본, 페루 등 8개국을 초청하여 토론토와 벤쿠버를 오가면서 시합을 열었다. 연일 방송을 타는 현대자동차배 세계 여자 배구대회 뉴스는 광고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딜러들에 대한 지원도 신경을 많이 썼다. 딜러들이 고객에게 차량을 넘겨주기 직전에 Pre-Delivery Inspection을 통해 차량의 이상 유무를 살펴보는데, 통상적으로 차량 메이커가 1시간의 노임을 지원해 주고 있었다. 우리는 2시간의 노임을 지원해 주었다. 포니가 팔려나가 몇 개월간 고장이 없으면 품질이 좋은 차로 금방 소문이 나리라 생각해서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라고 주문한 것이다. 우리 딜러는 모두 정비사 출신이라 차량에 대해 잘 알고, 평생 소원이었던 자동차 대리점을 시작해 고객관리를 잘하고, 판매가격 좋고, 고급 옵션 파트를 스탠다드 사양으로 판매하는 등 차가 잘 팔릴 수 밖에 없었다. 처음 우리는 3천 대를 팔면 잘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영국 2백만 대 시장에서 5천대 정도를 판매했기 때문에 그보다 작은 캐나다의 80만대 시장에서는 3천 대도 의욕적으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2~3개월이 지나자 포니는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몇 번 생산 오더를 변경할 정도로 정말이지 정신 없이 팔려 나갔다. 캐나다에서 첫 해 포니 2만 5천대를 판매하는 기염을 토해낸 것이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대수가 판매가 되어 FOB가격을 세 번이나 올려주었다. 당시 캐나다의 관리담당 책임자는 사간거래로 국세청에서 조사가 나오면 큰일 난다고 까지 걱정했지만 넘쳐나는 매출이익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에 FOB 가격인상을 여러 번 결정한 것이었다. 다음 해에는 스텔라를 포함하여 7만 8천 대를 판매했고 캐나다 수입차 부문에서 1위를 하게 되었다. 캐나다 진출 후 2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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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사람들은 자기 차가 고장이 나면 대부분 자기들이 스스로 정비를 한다. 인건비가 비싼 탓에 수리비가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당시 경쟁차들은 전륜구동형으로 엔진룸이 상당히 복잡했는데, 포니는 한 세대 이전기술인 후륜구동형이었다. 따라서 포니의 엔진룸을 열어보면 다른 차와는 다르게 휑하니 엔진룸을 정비하기가 너무나 수월했다. 한 세대 이전의 낙후된 포니의 단점이 장점으로 작용하여 판매에 붐을 일으킨 측면도 있었다.

캐나다에 진출한지 2년 만에 수입차 부문 1위를 차지하자 미국과 캐나다뿐만 아니라 일본의 언론들까지 우리의 성공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후진국이었기 때문에 GSP 관세혜택을 받아 무관세로 자동차를 수출하고 있었는데, 다른 수입상들이 우리의 질주를 막기 위해 무관세 혜택의 부당성을 거론하면서 언론과 정부에 로비를 하고 있었다.

만일 우리가 GSP 관세혜택을 받지 않으면 1천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세금을 내야 하니 걱정이 되어 곧바로 본사에 이를 알렸다. 정주영 회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토론토 외곽에 1~2천 평 정도의 땅을 매입하고 그곳에서 불도저를 왔다갔다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다름아닌 부품공장을 세우는 척하고 기자회견 등을 해서 이를 알려 우리의 GSP 관세혜택 논란을 잠재우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기술적으로 그나마 접근이 쉬운 알루미
늄 휠 공장을 세우는 것으로 대외적으로 발표를 하고, 캐나다 상공부 장관을 포함해 고위 관리들을 초빙하여설명하는 등 크게 떠들어대면서 위기를 겨우 모면했다.

캐나다에서의 판매 성공이 미국 언론에 연일 발표가 되자 미국 딜러들로부터 우리 차를 수입해 팔겠다는 제안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시장에 대해 겁이 났다. 워낙 큰 시장이어서 미국시장을 제대로 알 수 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미국시장을 알기 위해 보스톤 컨설팅 회사를 찾아가 시장조사를 의뢰했다. 미국 엔트리 플랜을 수립하기 위해 6개월간 보스톤 컨설팅 회사와 밤낮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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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엔트리 플랜이 수립되자 곧바로 미국에 판매법인을 설립했다. 직원들도 스카우트했는데, 도요타 자동차 출신의 미국 현지인을 수석 부사장으로 앉히고 마케팅, 판매, 서비스 부분에 부사장을 각각 한 명씩 두었다. 그들은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곧이어 딜러도 선정해야 했다. 매년 NADA(National Automobile Dealer Association) Conference가 열리는데, 1985년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되었다. 우리는 샌프란
시스코의 한 호텔에 묶으면서 딜러 어플리케이션을 받았다. 직원들이 딜러 지원자들과 정신 없이 면담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찰이 찾아왔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알아보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이십 층이 훨씬 넘는 곳에 우리의 숙소가 있었는데, 호텔 1층부터 우리 숙소까지 계단을 따라 수백 명이 줄을 서서 딜러 모집에 지원을 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었다. 캐나다에서의 대성공 얘기를 듣고 우리에게 벌떼처럼 달려든 것이었다. 당시 200개의 딜러 모집에 4천명이 지원을 했으니 그야말로 인기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세계에서 제일 작은 후발 자동차 메이커의 딜러 모집에 세계에서 제일 많은 딜러 지원자들이 모여들었고, 그래서 우리는 세계에서 제일 까다롭게 딜러를 모집할 수가 있었다. 전시장 위치 및 면적, 서비스 인원수 등 우리가 원하는 조건을 제시하여 만족되는 딜러들만을 뽑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딜러 모집에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기록을 다시 만들면서, 미국에서의 판매 역시 첫해 포니엑셀 한 차종으로 16만 8천 대, 다음해 26만 3천대, 그 다음해 26만 대의 판매 등 포니엑셀 신화를 통해 자동차 역사를 다시 쓰게 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이렇듯 미국과 캐나다에서의 성공은 결코 우연과 행운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캐나다에 진출한지 2~3년이 되자 문제가 하나 둘 발생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포니 차체에 부식이 생겨 구멍까지 뚫리는 차가 발생했다. 캐나다는 눈이 많은 나라여서 도로에 소금을 많이 뿌리는 탓에 플로어 패널 등에 방청대책을 철저히 하여 수출해야만 했다.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그동안 수출을 해왔던 것이었다. 또한 국내 기후와는 다르게 엄청나게 혹독한 추위에 잘 견디는 차량을 만들어 수출해야만 했다.

미국에서도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포니엑셀에 많은 품질문제로 초기부터 상당히 고전을 했다. 그들의 도로환경의 차이뿐만 아니라 운전 습관과 문화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만들어 수출한 결과였다. 또한 미국에 진출한지 3~4년이 지나자 차량의 내구품질 문제에 의해 시장에서의 반응은 처참할 정도로 악화되어 차량판매에 곧바로 반영되었다. 미국시장에서 내리막의 시작이었다. 이후 미국시장에서의 신뢰회복을 위해 오랜 기간 많은 노력을 기울여 현재의 자동차 강국으로 이끌었지만, 한번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처절한지를 알게 되는 값진 교훈을 얻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미국 자동차 시장과 미국의 자동차 문화에 대해서 새롭게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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